동학농민혁명 東學農民革命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colbgcolor=#94153e><colcolor=#ffd700> 배경 | <colbgcolor=#fff,#191919> 삼정의 문란 · 동학 · 만석보 · 아편전쟁 · 청불전쟁 | |
전개 | 장성 황룡촌 전투 · 전주 화약 · 갑오사변 · 갑오개혁 · 청일전쟁 · 우금치 전투 | ||
관련 인물 | <colbgcolor=#94153e> 농민군 | 전봉준 · 김개남 · 손화중 · 최시형 · 손병희 · 김창수 | |
조선 | 고종 · 조병갑 · 이용태 · 홍계훈 | ||
기타 인물 | 이홍장 · 야마가타 아리토모 · 오시마 요시마사 | ||
기타 | 사발통문 · 파랑새 · 갑오군정실기 | }}}}}}}}} |
SBS 금토 드라마 녹두꽃에서 묘사된 전주 화약 |
1. 개요
동학 농민 혁명 당시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군과 조선 조정이 1894년 6월 11일(음력 5월 8일)에 맺은 협정.2. 배경
전봉준은 황토현 전투에서 전라 감영군을 격파한 뒤인 음력 4월 19일, 경군을 이끌고 내려온 양호초토사 홍계훈에게 한 장의 정장을 보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호남 유생은 원한과 피를 머금고 백번 절하며 엄중한 위엄으로 밝게 살피시는 초토사께 편지를 올립니다. 삼가 생각건대, 저희들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교화에 참여하는 사람으로 어찌 감히 함부로 의롭지 않은 일을 하여 스스로 형벌에 빠지겠습니까?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고 근본이 견고하면 나라가 편안하다는 것이 옛 성인의 유훈(遺訓)이고 시무(時務)의 대강(大綱)입니다. 방백(方伯)과 수재(守宰)는 목민(牧民)하는 관리로서 선왕의 법으로 선왕의 백성을 다스린다면 비록 천년을 지난다고 해도 그 나라를 오랫동안 누릴 것입니다. 지금의 수령은 왕법(王法)을 돌아보지 않고 왕민(王民)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탐학이 일정하지 않아 군전(軍錢)은 때도 없이 함부로 배정하고, 환전(還錢)은 밑천을 뽑아 바치기를 독촉하며 조세는 명목이 없이 더 거두고 각종의 연역(煙役)은 날마다 중복하여 거두기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전운영의 균전관(均田官)이 전결(田結)을 농단하여 세(稅)를 걷으며 각사(各司)의 교례배(校隷輩)들의 토색과 지독한 탐학은 하나하나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그 둥지를 잃고 10중에 8~9명이 옷과 먹을 것이 없이 길바닥에 흩어졌고 늙은이를 부축하며 어린애를 데리고 온 자가 연이어 골짜기를 메웠습니다. 살아갈 방도가 만에 한 가지도 없습니다. 가엾은 이 백성은 죽어도 서로 모일 수가 없습니다. 수 백명이 본관(本官)에 호소하면 난류(亂類)라고 하고, 영문(營門)에 호소하려고 하면 역류(逆類)라고 지목하여 막중한 친군(親軍)이 마음대로 발포하여 여러 읍에서 병사를 모아 칼로 도륙합니다. 죽이고 없애는 데에 거리낌이 없으니 교화를 펴고 백성을 기르는 사람이 참으로 이와 같을 수 있습니까?
저희들의 오늘 거사는 어쩔 수 없는 사정에서 나왔고 병기를 쥔 것은 단지 몸을 보호하는 계획입니다. 일이 이런 지경에 이르러서 억조(億兆)가 마음을 한가지로 하고 팔로(八路)가 논의하였습니다. 위로는 국태공(國太公, 흥선대원군)을 받들어 부자(父子)간의 인륜과 군신(君臣)간의 의리를 온전히 하며 아래로는 백성들을 편안히 하고 종묘사직을 보호하려는 바람을 죽어도 변하지 않을 것을 서약했습니다. 초토사께서 살펴주시고 처분을 내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전봉준이 홍계훈에게 보낸 원정 출처
저희들의 오늘 거사는 어쩔 수 없는 사정에서 나왔고 병기를 쥔 것은 단지 몸을 보호하는 계획입니다. 일이 이런 지경에 이르러서 억조(億兆)가 마음을 한가지로 하고 팔로(八路)가 논의하였습니다. 위로는 국태공(國太公, 흥선대원군)을 받들어 부자(父子)간의 인륜과 군신(君臣)간의 의리를 온전히 하며 아래로는 백성들을 편안히 하고 종묘사직을 보호하려는 바람을 죽어도 변하지 않을 것을 서약했습니다. 초토사께서 살펴주시고 처분을 내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전봉준이 홍계훈에게 보낸 원정 출처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흥선대원군이 돌아와서 탐관오리 때려잡아주면 해산할게요.
이후 4월 22일 이학승이 지휘하는 경군 별동대가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에게 대패하고, 27일 농민군은 전주부성에 무혈입성한다. 충격을 받은 고종은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고, 여기에 일본까지 끼어들면서 외국군대가 조선에 진주하게 된다. 농민군을 추격하던 홍계훈은 4월 28일 전주성이 훤히 내다보이는 완산에 진을 치고, 이를 몰아내기 위해 농민군이 출성하면서 완산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이전의 싸움과 달리 고지에서 신식 무기로 무장한 관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농민군은 참패를 거듭했고 총대장 전봉준이 부상을 입는 지경에 이른다.
하지만 청일 양군이 조선에 진주하면서 조선 조정도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 조선의 요청이 들어오자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창은 5월 2일 선발대로 청군 910명을 먼저 조선으로 보냈고 뒤이어 1,500명의 병력을 진주시켰으며 아산만에 청군 2,500명을 상륙시켰다. 그런데 일본도 여기에 끼어들어 조선 조정이 요청이 없었음에도 군을 진주시켜 5월 6일 제물포에 일본군 6천여 명을 상륙시켰다.[1] 그러자 처음에는 강경한 태도였던 조정도 태도를 바꿔 화의에 나섰다.
3. 전개
5월 3일, 전봉준은 관군이 주둔한 완산을 향해 총공세를 펼쳤지만 되려 막대한 병력과 장수를 잃고 그 자신도 허벅지에 총상을 입었다. 완산 전투가 시작된 이래 패배만 계속되자 농민군은 동요했고, 전봉준을 홍계훈에게 바치자는 목소리도 나왔다. 여기에 외국군이 개입하자 전봉준은 동요하는 농민군을 데리고 더 이상 싸울 수 없고, 농번기가 다가오고 있으며, 외국의 개입을 우려하여 화의를 제안하기로 마음을 먹었다.5월 4일, 전봉준은 홍계훈에게 폐정개혁안이 담긴 소지(所志)를 제출하였다. 하지만 조정은 전봉준의 휴전 제의를 거부하고 5월 5일 홍계훈에게 공격을 명령했다. 다음 날 전봉준은 사자를 보내 다시 휴전을 제의했고, 그 다음 날 농민군의 사자가 일전에 제출한 폐정개혁안을 실시하면 해산하겠다는 각서를 제출했다.
한편 조정 입장에서 보면 완산 전투에서 관군이 농민군을 상대로 연전연승하면서 굳이 외국군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졌다. 거기에다 청군에 더해 일본군까지 들어오니 여간 난처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고종은 신임 전라감사 김학진에게 전권을 주어 신속히 사태를 수습하도록 했다. 전봉준은 농민군이 해산하는 대가로 폐정개혁 27조의 실시를 요구했고, 김학진과 홍계훈은 수락했다. 홍계훈은 물침표(勿侵標)를 발급하고 각 군현에게 농민군을 체포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등 귀가하는 농민군의 안전을 보장했다.
5월 8일, 농민군은 자진 해산하여 귀가했고 홍계훈은 무혈로 전주성을 탈환했다.
4. 폐정개혁안
동학농민군은 거병했을 때부터 줄곧 폐정개혁(弊政改革)을 요구하였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은 시간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왜냐하면 농민군이 처음부터 개혁안을 작성하고 봉기한 것이 아니라, 상황의 진전에 따라 끊임없이 개혁안을 수정했기 때문이다.3월 20일 처음 거병했을 때까지만 해도 농민군의 구호는 일본과 권세가들을 몰아내는 것으로 간단했다. 이후 세력이 확대되자 구체적으로 폐단을 지적하고 시정을 요구했으며, 조항도 늘어났다. 막 세력이 확대되었을 때는 6개조였던 개혁안이 고부를 점거했을 때는 9개조로, 장성을 점령한 이후에는 13개조로 늘어나더니 전주 화약을 맺을 때가 되면 14개조가 되었다가 추후 보충하여 총 24개조의 개혁안이 전달되었다.
이 수많은 폐정개혁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전주 화약 이후, 집강소를 설치했을 때 시행되었다는 폐정개혁 12조이다. 이 12조는 당시 동학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오지영이 쓴 <동학사(1940)>에서 나오는데, 문제는 동학사가 역사소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21세기 초 연구에서는 폐정개혁안은 후대에 창작된 것이고 실제 존재하지 않았다는 학설이 세를 얻었으나, 최근 연구에 따라 폐정개혁안이 실제 존재한다는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동학농민전쟁과 갑오개혁에 대한 시민혁명적 관점의 분석>등 최근에 나온 논문이 많으니 참고해보자.
동학사에서 제시한 폐정개혁 12조는 다음과 같다.
1. 도인(道人)[2]과 조정과의 사이에는 숙혐(宿嫌)을 탕척(蕩滌)하고 서정(庶政)을 협력할 것.
1. 탐관오리는 그 죄목을 사득(査得)해 일일이 엄징할 것.
1. 횡포한 부호배(富豪輩)를 엄징할 것.
1. 불량한 유림(儒林)과 양반배(兩班輩)는 못된 버릇을 징벌할 것.
1. 노비 문서는 불태워버릴 것.
1. 7종의 천인[3]의 대우는 개선하고 백정(白丁) 머리에 쓰는 평양립(平壤笠)은 벗어 버릴 것.
1. 청춘과부(靑春寡婦)의 개가를 허락할 것.
1. 무명잡세(無名雜稅)는 일체 거두어들이지 말 것.
1. 관리 채용은 지벌(地閥)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1. 왜(倭)와 간통(奸通)하는 자는 엄징할 것.
1. 공사채(公私債)를 막론하고 기왕의 것은 모두 무효로 할 것.
1. 토지는 평균으로 분작(分作)하게 할 것.
1. 탐관오리는 그 죄목을 사득(査得)해 일일이 엄징할 것.
1. 횡포한 부호배(富豪輩)를 엄징할 것.
1. 불량한 유림(儒林)과 양반배(兩班輩)는 못된 버릇을 징벌할 것.
1. 노비 문서는 불태워버릴 것.
1. 7종의 천인[3]의 대우는 개선하고 백정(白丁) 머리에 쓰는 평양립(平壤笠)은 벗어 버릴 것.
1. 청춘과부(靑春寡婦)의 개가를 허락할 것.
1. 무명잡세(無名雜稅)는 일체 거두어들이지 말 것.
1. 관리 채용은 지벌(地閥)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1. 왜(倭)와 간통(奸通)하는 자는 엄징할 것.
1. 공사채(公私債)를 막론하고 기왕의 것은 모두 무효로 할 것.
1. 토지는 평균으로 분작(分作)하게 할 것.
5. 화약 이후
이렇게 동학 농민군은 해산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무기를 손에 쥐고 있었다. 거기에다 경군이 대거 철수하면서 전주에는 겨우 200여명만 남았으니 전라도는 여전히 농민군 세상이었다. 농민군은 조정에서 폐정개혁을 미적거리자 직접 집강소를 차려 폐정개혁에 나섰다. 김학진은 무리하게 집강소를 탄압하기 보다는 그들의 질서를 인정하였다. 농민군은 전주에 집강소의 총본부를, 전라도 53개 주읍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폐정개혁을 서둘렀으나 나주[4], 남원[5] 등에서는 관군의 저항이 끊이지 않았다.조정은 교정청을 설치하여 개혁을 시작하고, 청과 일본 양측에 철군을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이 조선을 장악할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1894년 7월 여단장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 및 2대대장 야마구치 케이조를 필두로 일본군이 경복궁을 범궐(犯闕)하여 고종의 신변을 확보하고 친일내각을 세우자 개혁은 수포로 돌아간다. 결국 이 때문에 2차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