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장 포통 드 생트라유 Jean Poton de Xaintrailles |
|
생몰년도 | 미상 ~ 1461년 10월 7일 | |
출생지 | 프랑스 왕국 미상 | |
사망지 | 프랑스 왕국 보르도 샤토 트롱페트 | |
아내 | 카트린 프라쉐 | |
직위 | 생마케르 자작, 프랑스 원수 |
[clearfix]
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귀족, 프랑스군 원수. 백년전쟁 시기에 잉글랜드군에 맞섰다.2. 생애
출생년도, 출생지, 가문, 초년기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다만 가스코뉴 출신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는 일찍이 용병이 되어 백년전쟁에서 벌어진 여러 전투에 참여했고, 여러 마을을 습격해 약탈을 자행하면서 막대한 전리품을 챙겼다. 그러다가 1418년에 동료 용병인 라 이르와 함께 도팽 샤를의 군대에 참여했고, 1423년 크라방 전투에서 생포되었다가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으며, 1424년 베르뇌유 전투에 참여했다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1427년 몽타르지 공방전에 참여해 프랑스군의 승리에 기여했다.1428 ~ 1429년 오를레앙 공방전에 투입된 그는 루브레 전투에 참여했으나 패배를 면치 못했다. 이후 잔 다르크가 무장병 200명과 함께 오를레앙에 입성하자, 그녀를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지지했으며, 그녀와 함께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적극적으로 싸워서 오를레앙 공방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일조했다. 이후 루아르 원정에 참여했으며, 파테 전투에서 라 이르와 함께 프랑스군 선봉대를 맡아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1429년 8월 26일 ~ 9월 13일 1차 파리 공방전에 참여했다. 파리 공략이 실패한 후 잔 다르크가 깊이 슬퍼하자, 바꿀 수 없는 일에 대해 슬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달랬다. 1431년 콩피에뉴 공방전에 참여해 잉글랜드군이 콩피에뉴 포위를 풀도록 강요했지만, 1433년 8월 11일 셰퍼드 전투 도중 생포되어 잔 다르크가 구금되어 있던 루앙의 부브뢰이 성으로 이송되었다가, 파테 전투 때 프랑스군에 생포되었던 존 탈보트와 교환되었다.
이후 잉글랜드군이 점령한 노르망디를 지속적으로 습격을 가해 심각한 약탈을 자행했으며, 1432년 라니쉬르마른 공방전에서 베드퍼드 공작 존을 물리쳤다. 1435년 봄 샤를 7세의 지시에 따라 라 이르와 함께 제르베로이를 점령하고 요새를 재건했다. 이 무렵, 제르베로이에서 12km 떨어진 노르망디 국경 도시인 구르네앙브레이에 아룬델 백작 존 피츠앨런이 이끄는 잉글랜드군 3,000명이 솜 강 인근의 도시이며 샤를 7세에 충성을 맹세한 루 시를 공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프랑스군의 움직임이 전해지자, 아룬델 백작은 제르베로이부터 처리하기로 했다.
5월 8일 밤 구르네에서 출발한 아룬델 백작은 5월 9일 아침에 선봉대와 함께 제르베로이 외곽에 있는 발 다롱델 평원에서 적의 동태를 살폈다. 고원에 자리잡은 제르베로이 시에서 적 선봉대가 온 것을 확인한 라 이르와 생트라유는 저들이 선봉대이고 대규모 적군이 이곳으로 이동중이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요새를 막 재건하고 있는 상황에서 적의 포위 공격을 당해낼 수 없었기에, 행군 중인 적을 급습하기로 결의했다. 라 이르가 이끄는 기병대는 제르베로이 시를 떠나 적 선봉대가 자리잡은 위치를 우회해 적의 감시를 회피한 뒤 라우덴쿠르 마을 인근 도로에서 행진 중이던 적 본대를 기습 공격했다. 이와 동시에, 생트라유가 이끄는 보병대는 아룬델 백작과 함께하는 잉글랜드 선봉대를 공격했다.( 제르베로이 전투)
잉글랜드 궁수병들은 말뚝을 박아 스스로 보호하려 했지만, 프랑스 병사들이 컬버린(Couleuvrine: 핸드 캐논의 일종)으로 공격을 퍼붓자 점차 움츠러들었다. 이때 아룬델 백작은 컬버린에서 발사된 총탄이 한쪽 다리에 맞아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얼마 후 라 이르가 적 본대를 모조리 쫓아낸 후 제르베로이로 돌아오면서 완전히 고립된 잉글랜드 선봉대는 항복했다. 아룬델 백작은 생포된 후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지만 며칠 후 감염으로 인해 상처가 악화되면서 사망했다. 잉글랜드군의 손실은 수백명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프랑스군은 20명 내지 30명만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1445년 프랑스 무관장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정규군을 창설한 후, 생트라유는 용병 생활을 청산하고 정식으로 프랑스군 장성이 되었다. 이후 1449~1453년 프랑스군이 노르망디와 가스코뉴를 석권하는 데 일조했고, 샤를 7세는 이에 대한 보상으로 그를 프랑스 원수로 선임하고 생마케르 자작에 선임했다. 1458년 보르도의 샤토 트롱페트 총독이자 기옌의 보안관이 되었다.
1461년 10월 7일 샤토 트롱페트에서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카트린 프라쉐와 결혼했지만 자식을 낳지 못했고, 자기가 가진 재산을 수도원과 빈민에 기부하겠다는 유언을 남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