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9 18:58:57

이호원(독립운동가)

1. 개요2. 생애3. 참고 문헌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91년 4월 11일 충청남도 공주군 장기면 월송리(현재 공주시 월송동)에서 출생했다. 자는 송강, 삼송이며 이명은 강덕재이다. 그는 어렸을 때 부친을 여의고 7살 때부터 형과 함께 산에 가서 장작을 챙겨야 겨우 끼니를 이을 수 있을 정도로 빈한한 가정에서 자랐다. 하지만 학업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아 18살 때 한 동네에 살던 5촌 친척의 도움으로 서당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다. 당시 이호원이 다니던 서당에서는 글뿐만 아니라 민족정신을 가르치는 등 애국교육을 실시하였다고 한다.

1년 여간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한 뒤 1909년 공주군 보통학교에 입학하여 국어, 한문, 일본어, 산술, 이과 등의 근대식 교육을 받았다. 공주보통학교는 1911년 11월 1일 제1차 조선교육령에 따라 공주공립보통학교로 교명을 바꾸었다. 이호원은 훗날 <자전>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당시 최고의 고등교육기관으로 뽑히던 관립한성사범학교에 1912년 입학하여 1915년 졸업했다고 기술했지만, 이것은 사실과 맞지 않다. 한성사범학교는 1911년 폐지되었고 관립경성고등보통학교가 대신 설립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성고등보통학교는 4년제를 채택했기 때문에, 그는 1915년이 아닌 1916년에 졸업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호원이 수학한 경성고보는 조선총독부가 설립한 중학기관으로서, ‘조선인 동화를 선도해 나갈 지도자양성’을 목적으로 우수한 인재를 선발해 교육에 힘썼다. 하지만 일본의 중학교 과정에 해당하는 고등보통학교였음에도 불구하고 교육 수준은 그에 미치지 못하였다. 수업시간에는 줄곧 일본과 조선이 같은 나라이며 일본인과 조선인이 같은 인종이라는 것을 고취하는 등 끊임없이 덴노에 대한 충군애국과 감사함을 표현하게 했다. 경성고보 내 한인 학생들은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하고, 이를 옹호하는 식민교육내용에 반감을 가졌고, 독립운동에 뛰어든다.[1] 이호원도 이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호원은 경성고보에 다니는 동안 주시경이 설치한 조선어강습원을 찾아 고대 조선어와 현대 조선어 문법 강의를 들었다. 주시경은 주말과 방학마다 국어강습소를 열고 국어국문 교육을 시행하다가 1911년에는 조선어강습소를 확대해 조선어강습원으로 고친 후 보성학교 안에서 청년들을 모아 국어국문 무료강의를 진행하였다. 학급은 초등·중등·고등 3과에 각 1개 학년을 배정하였으며, 한 과정은 3학기로 이루어졌다. 이호원은 경성고보를 졸업할 때까지 이곳에서 강의를 들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1914년 주시경이 사망한 후에는 김두봉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조선어강습원을 다니며 민족 정체성에 대해 깊이 고민하면서 직접 관련 글을 지어 교내의 반일의식을 고취하려 노력했다. 또한 이를 책자로 만들어 학생들에게 돌려 읽게 함으로써 민족의식과 반일활동을 선전하기도 했다. 일례로 졸업을 앞두고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간 그는 일본을 둘러본 후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상황을 비교하며 친구들과 항일투쟁 문제를 토론하였다. 이때 그는 크게 일본의 정책을 비난하였고, 이러한 토론 내용을 다시 글로 정리해 소책자로 만든 후 학생들에게 배포하는 등 교내 반일활동에 앞장섰다.

경성고보를 졸업한 후, 이호원은 공주 보통학교에서 교원 생활을 시작했다. 이호원의 손자는 국가보훈처에 "충남 공주의 유계공립소학교에서 훈도 생활을 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당시 공주는 물론 충남의 보통학교 명단에는 유계공립학교가 없었다. 1916년 조선총독부직원록에 따르면, 이호원은 유구공립고통학교에서 월 18원을 받는 동급의 훈도로 근무하였다고 한다. 유구공립보통학교가 이호원의 고향과 가까운 공주군 신상면 석남리에 신설된 점을 볼 때, 이호원이 1916년 그곳에 근무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훈도로서 반일구국교육을 실시하였고, 이때문에 일제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경성고보 시절 쓴 문장과 일기가 일본 경찰에 발각되면서 조사를 받아야 했으며, 이후 ‘요시찰인물’로 분류되어 감시를 받기 시작했다. 국내에서 더는 활동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그는 중국으로의 망명을 결심하고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압록강을 건너 만주 신빈현 홍묘자촌으로 망명했다. 신빈현은 1910년 한일병합 이래 많은 한인이 이주해 집단 거주하던 지역으로, 1918년 이전에 이미 수백 호가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이호원은 신빈현에 위치한 홍동소학교에서 교원으로 지내며 민족 교육에 힘썼다. 그러던 1919년 3월, 일이 있어 심양에 갔던 그는 국내에서 3.1 운동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에 그는 신빈현으로 돌아가 홍동소학교 학생들을 규합해 시위를 준비했다. 3월 19일 신빈현의 한인들이 시위를 단행하여 현 내의 일본인들을 습격해 내쫓았다. 이후 3월 21일 왕청문 내 약 400여 명에 달하는 한인들이 태극기를 들고 독립 만세를 외쳤다. 홍경현 경찰사무소장이 보갑대를 동원해 한인들을 포위하고 해산을 명령했으나 시위대가 거부하자, 중국 군경은 시위대를 향해 총을 발사해 4명의 희생자를 냈다. 그럼에도 현 내 거주 한인 대부분이 만세시위에 참여하는 등 그 열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4월 홍동소학교 교장 이세일이 한인과 학생들을 모아 다시 한 번 만세시위를 추진했다. 5월 1일 남만주 각 한인촌에서 모인 수백 명의 한인이 홍동소학교 운동장에 모여 한민족을 상징하는 흰색 옷을 입고, 어깨에 붉은 기를 단 후 촌별로 대오를 만들어 태극기를 손에 든 채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호원은 이들과 함께 시위에 참여하며 독립만세를 고창했다. 이후 홍동소학교가 폐쇄되자, 그는 새로운 곳으로 이주해 민족운동에 전념하기로 마음 먹고 유하현으로 향했다.

유하현에 도착한 이호원은 그곳에서 민족운동을 수행하고 있던 경학사에 들어갔고, 이시열의 권유에 따라 한족회에 가담했다. 그는 <한족신보>의 편집사업을 담당했으나, 1920년 1월 16일 삼원보 중국 경찰대가 한족신보의 인쇄기와 문서를 압수했고, 뒤이어 간도참변으로 이호원과 함께 편집사업을 담당하던 방기전이 희생되는 등 큰 타격을 입는 바람에 발행이 중지되고 말았다.

1920년 2월, 이호원은 이시열, 현익철, 현정경, 이석영 등 한족회 인사들과 국내에서 활동하던 장명환[2]· 김관성·이춘산·김태호·박정호 등 40여 명과 함께 압록강 연안인 관전현 향로구에서 광한단을 조직하고 간의위원을 맡았다. 광한단의 설립 취지는 위로는 정부를 옹호하고, 아래로는 대소 단체를 연합해 적을 토벌하여 나라를 되찾는 것에 있었다. 이를 위해 구체적인 계획들을 수립하였는데, 먼저 단원들을 국내로 밀파하여 각 군과 면에 218개의 무장조직을 설치하고자 했다. 이후 폭탄 및 단총 등 무기를 준비해 일정한 시기가 도래했을 때 일본의 군사기관과 행정기관에 대한 타격 및 일본의 교통선과 전신선 등을 파괴함으로써 통치력 붕괴를 도모하였다. 더불어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는 장기적인 무장투쟁에 대한 계획도 세웠다.

이호원은 군자금 모집과 남부 지역에서의 조직망 건립 및 확대를 위해 국내로 파견되었다. 그는 1920년 가을 단원 박일, 이모 씨와 함께 남부 지방으로 잠입하여 권총을 휴대한 단원을 모집했다. 그 결과 안동군 임하면 임하동 출신에 한족회 간부를 지낸 바 있는 김성로를 소개받았다. 이호원이 찾아가서 계획에 협조해 달라고 요청하자, 김성로는 흔쾌히 수락했다. 이 밖에도 박의준 등 4명과 함께 평안 남,북도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한인 관공을 처단하려는 계획도 추진했다.

그러나 함께 들어온 단원 이모 씨의 백부가 이들을 밀고했고, 결국 1921년 3월 9일 안주 경찰서에 이 모든 사실이 발각되었다. 이호원은 서울로 잠입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체포되었고, 함께 들어왔던 박일은 마침 외출 중이어서 체포를 모면하였다. 이때문에 밀고자가 박일의 백부라는 기록도 있다. 이때 이호원을 비롯해 9명의 광한단원이 체포되었으며, 1921년 4월 26일 오후 1시에 열린 평양지방법원 공판에서 이들 모두에게 15년 형이 구형되었다. 이호원은 이에 불복해 상고하면서 취지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일본의 침탈로 삼천리 성역이 국방, 안녕 유지의 명목 하에 현세의 지옥이 되어 자유영생도 얻지 못하는 상황이다. (중략) 조선 민족이 생존권을 회복하고, 동양의 평화를 구하기 위해서는 인검을 수련하고 도포를 단조해 동양의 공적인 일본 무단정치가의 수족인 조선행정관리를 파쇄함은 물론 도로통신을 두절함으로써 그들을 맹아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1921년 7월 9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되었고, 그는 징역 10년형이 확정되어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7년 5개월간 수감 끝에 은사로 감형되면서 1928년 1월 23일 출옥했다. 이후 중국으로의 재망명을 결심하고 집안 식구들과 함께 왕청문으로 이주했다. 그는 화흥중학교에서 교원 생활을 시작하며 독립운동에 다시 투신했다. 화흥중학교는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가 흥경현 왕청문에 설립한 학교로, 학생들은 낮에는 공부를 하고 밤에는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이호원은 화흥소학과 중학에서 역사와 음악을 가르치는 주임교사로 근무했다.

이호원은 학생들의 독립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화흥중학교 교가를 직접 작사, 작곡해 3·1절과 국치일에 부르도록 했다. “대동의 위용 크게 떨치던 고구려, 부여 미친 옛터에 피땀의 결정 모아 지은 집, 우리 화흥교란다. 만세, 만세, 우리 화흥교"라는 가사를 통해 한반도 북부와 남만주를 아우르던 고구려와 부여의 후손임을 강조하고, 이 땅의 한인들이 피땀으로 세운 학교에서 강성했던 조국을 다시 건설하고자 하는 염원을 담았다. 이후 1929년 4월 1일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가 통합하여 국민부가 탄생하였다.

국민부는 긴급회의를 소집해 먼저 내부분열을 수습한 뒤 독립운동세력을 통일적으로 이끌어 나갈 최고 지도기관으로서 정당을 건립하기로 하였다. 1929년 9월 20일 길림성 장마항 국민부 주길사무실에서 제1회 중앙의회를 개최해 선언문을 발표하고 강령과 헌장 개정작업에 착수하였다. 이어 9월 27일 흥경현 왕청문 대황구에서 제2회 중앙위원회를 다시 열어 국민부의 새로운 중앙집행위원회를 구성한 후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을 조선혁명당으로 재조직하였다. 조선혁명당의 기본 임무는 ‘민족적 대당을 형성해 혁명사업을 수행하는 일’이었으며, ‘국민부와 조선혁명군을 지도·육성하는 일’을 현실적 과업으로 삼았다.

1929년 11월 15일, 조선혁명당창립총회가 현정경, 현익철, 이동림, 이진탁, 장승언 등의 발기로 화흥중학교에서 개최되었다. <이호원 판결문> 1932년 11월 21일 기록에 따르면, 이때 이호원도 창립총회에 참석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추선되었다. 하지만 창립총회 당시 선출된 23명의 중앙집행위원 명단에서는 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그가 근무하던 화흥중학교에서 창립총회가 열렸으니 그가 조선혁명당에 참여했을 가능성은 높다.

1931년 8월 중앙집행위원장이 현익철이 직접 봉천으로 가 중국국민외교협회 및 주요 인사들에게 연대를 강조하는 <중한 양 민족 합작 의견서>와 <동삼성한교정세>를 제공하고 한중연대를 제의했다. 그런데 그가 갑작스럽게 체포되면서 조선혁명당이 추진하던 한중연대와 당내 사업은 큰 타격을 입었다. 이에 8월 17일 조선혁명당은 긴급 회의를 열고 오랜 독립운동 경력이 있는 이호원을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했다. 그는 선출 이후 기존의 정책을 계승하는 한편, 이를 한층 더 발전시키고자 했다.

그는 국내외 정세를 분석해 조선혁명당의 노선에 대한 검토를 진행하였고, 그 결과 대내적으로 국민부의 권위적인 행태가 문제로 지적되었다. 당 구성원들 역시 분열의 위해성에 공감하고 단결의 필요성을 자각함에 따라 긴밀히 협심하여 끝까지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맹세하였다. 대외적으로는 현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중국과의 관계 회복 및 연대투쟁을 성사시키는 것에 있음을 지적, <동삼성한교정세>와 <만주정세> 등 다수의 팸플릿과 선전문 등 인쇄물을 한중의 노동자들에게 배부하며, 만보산 사건으로 악화일로를 걷고 있던 한중관계의 회복을 시도하였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발발했다. 조선혁명당 지도부는 대응책 마련을 위해 화흥중학교에서 조선혁명당과 국민부의 긴급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는 조선혁명당중앙집행위원회 주석 이호원, 군사부 위원장 김보안, 국민부 위원장 양인원 등이 회의에 참석해 본부를 다시 흥경현성으로 이전할 것과 중국과 상호 연합을 이뤄 함께 일본에 대항해 나갈 것을 결의하였다. 본부의 사무실은 흥경현 신빈진 하북에 두기로 했으며, 이곳에 위치한 중국인 지주의 집 8, 9칸을 임대해 기관사무실로 사용하고, 앞채에는 한인 서세명으로 하여금 합성호상사를 운영하도록 하였다.

이호원은 신빈으로 본부를 옮긴 뒤 본격적으로 중국과의 연대 활동을 추진했다. 중국 민중의 반일정서를 높이기 위해 격문·삐라·표어 등을 인쇄하여 각지에 산포하였으며, 일본군과의 무장투쟁에 대비한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그간 악화된 한중 관계를 회복함은 물론 일본의 만주침공으로 중국 내 반일감정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을 이용해 중국 정부 및 관계 부문과 연락을 취함으로써 강력한 연대를 이루고자 했다. 이에 왕동헌 등 중국 측 항일인사들을 자주 조선혁명당에 초청해 강연을 부탁하는 등 상호 이해와 관계유지를 위해 노력하였다.

이후 봉천성군정당국의 요원과 항일 계책을 상의하기 위해 직접 김보안, 장세용과 함께 왕청문 한족구장인 왕동헌을 찾아가 요원을 소개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장쉐량이 이끄는 봉천 군벌은 일본의 만주 침공에 대해 '무저항'으로 일관하였고, 일본군은 이를 틈타 만주를 신속하게 점령했다. 이후 동변도진수사 우지산이 일본의 위임을 받고 동변도 보안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50여 명의 군민부 간부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각현에 하달하였고,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을 탄압하는 데 앞장 섰다.

조선혁명당과 국미부 주요 간부 30여 명은 12월 17일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서세명의 집에 모여 긴급회의를 열고, 당면 정세와 새로운 투쟁 방침에 대해 논의했다. 그런데 12월 19일 새벽 통화보민회의 조선인 밀정 백몽량의 밀고로 이 사실이 일본군에게 알려졌다. 통화일본영사관은 즉시 일경 10명과 치안대 100여 명을 2대의 자동차에 싣고 흥경현으로 이동해 흥경현공서 경찰대와 함께 서세명의 집을 포위했다. 결국 현장에 있던 조선혁명당집행위원회 주석 이호원과 조선혁명군사령관 김관웅, 군사위원회 위원장 김보안, 부사령 장세용, 국민부 공안국장 이종건, 경위대 대장 이규성, 조선혁명당 기요비서 박치화 등 30여 명이 모두 체포되었다.

일본 경찰은 체포된 이들을 이송하는 과정에서 혹시 있을 지도 모를 무력 충돌을 대비해 통화까지의 직선도로인 왕청문에서 쾌대모자를 통과하지 않고 남잡목 해하구를 우회하여 통화에 도착했다. 체포된 인사들은 통화에 도착한 후 통화경찰서와, 봉천 일본총영사관을 경유해 다시 신의주서로 압송되었으며, 신의주 검사국으로 송치되어 심문을 받았다. 이호원은 미결수로 1년여가 지난 후에서야 7년형을 선고 받았으나, 이에 불복함에 따라 신의주형무소에서 평양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그는 만기가 4개월이 지난 1939년 5월에서야 출소해 통화현에 있는 자신의 자택으로 돌아가 관동군의 엄중한 감시를 받았다.

관동군은 출소한 이호원을 끊임없이 포섭했다. 1943년, 이호원은 관동군 통역으로 일하는 조카 이해수가 병으로 북평에 입원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북평으로 가 2달여 간 병간호를 계획했다. 이에 일경은 조카를 핑계로 그를 포섭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해수가 사망하면서 수포로 돌아가자, 이번엔 그가 조카의 재산을 가로챘다는 이유와 북평에서 어떤 교육활동을 했는지 심문한다는 명분으로 그를 유치장에 가뒀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귀순을 권유했으나, 이호원은 거부했다. 그러자 관동군은 이호원을 '가장 위험한 분자'로 간주하고 1945년 8월 9일 통화 경무소에 체포를 지시했다. 그는 마을 주민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다시 수감되었고, 일본이 패망한 뒤인 8월 19일이 되어서야 석방되었다.

8.15 광복 후, 이호원은 조선혁명당 관련 사업에 참여하려 했다. 그는 이시열, 이연, 김진호, 송헌, 장철, 최천[3] 등 옛 동지들과 함께 조선혁명당을 재건했다. 이때 조선혁명당이 신국가 건설을 목표로 발표한 정강은 다음과 같다.
1. 4천 년의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배경으로
2. 공의입국 만민평등의 민주주의 입헌공화국을 채용하며
3. 신국가의 경제조직은 주요 생산기관을 국유로 하여 직접생산자의 소득에 속하게 하여 만민의 생활과 직장을 보장하고
4. 정치는 일절의 계급적 대립을 부인하여 각층 인민이 균일한 참정권을 가지게 하며 행정조직으로는 중앙집권제와 지방분치제를 병용해야 한다.

그러나 1946년 국공내전이 발발하면서 만주가 혼란에 빠지자, 조선혁명당의 신국가 건설 관련 활동은 중단되었고, 동삼성 내 한인 교민들의 생명과 재산 보호, 귀국 문제 해결이 시급한 현안으로 떠올랐다. 이호원은 가족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귀국하지 않고 그대로 만주에 남아 한인 교민들의 귀환 및 만주에 남기로 한 한인들의 자제 교육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는 장춘에서 한교연합회 설립이 추진되었을 때 적극 참여하였으며, 설립 후에는 문화부장을 역임하였다. 이어 조선혁명동지회를 조직하고 이 단체의 주석을 맡았다.

1946년 4월 길림성 조선인민주연맹 주석으로 추대되었으며, 6월에는 중국 길림성 연길시 제2중학교(조선족중학교) 교장을 맡았다. 1948년1948년 한교연합회가 해산된 뒤 도문중학교 교장으로 재직하였으며, 1951년부터는 연변대학 조문과(조선 언어, 문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1955년 6월 연변 조선족 자치주 부주장에 당선되어 1965년까지 부주장으로 활동했다. 1963년 2월에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길림성 위원회 상무위원 겸 연변 조선족 자치주 정치협상회의 부주석을 맡았으며, 1964년에는 중국 전국 인민대표 대회 제3기 대표, 길림성 인민대표 대회 제2기, 제3기 대표 등을 겸임하였다.

이호원은 부주장으로 활동하면서 문교위생사업을 주관하였으며, 연변 조선족 자치주 체육운동위원회 주임의 책임을 겸하기도 했다. 그는 "체육운동을 발전시켜 인민의 체질을 증강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연변의 체육 수준을 크게 향상시켰다. 학교에서의 체육을 기초과의 하나로 삼고 주내 여러 학교들에서 매 학기 마다 교내 운동대회를 가지게 하였으며, 사회적으로는 9.3 자치주 성립 기념 활동으로 체육운동대회를 열었다. 그리고 조선 민족의 고유한 운동인 씨름, 그네, 널뛰기 등 운동도 대대적으로 보급했다.

한편, 이호원은 한글 보존과 발전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연길시 제2중학교 교장을 맡고 있던 1946년 10월 9일 '훈민정음 반포 500주년 기념대회'를 소집하고, 회의에서 한글 연구회를 결성할 것을 결의했다. 그해 10월 13일 연길 한글 연구회 창립 대회가 거행되었을 때, 그는 주임으로 선출되었다. 1957년 12월 3일 연변 조선어문 연구회 준비위원회가 창립되었을 때, 이호원은 주임위원을 맡았다. 또한 1957년 <연변일보>에서 조선어 순결화 문제에 관한 지상 토론이 진행되었을 때, 그는 주요 인물로 활동했다.

이호원은 '중화 에스페란토 연구회'의 회원으로서 자치주 부주장을 맡았다. 그 동안 <에스페란토 - 조선어 대역 사전>을 편찬하는 일에 착수하여 10여 년 동안 수 만개의 어휘를 수집했지만, 결국 끝을 맺지 못했고 대부분의 원고는 문화대혁명 시기에 분실되었다. 이렇듯 그는 만주에서 조선민족어문을 보급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한글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 3가지에 착안점을 두고 자기 주장을 세웠다. 먼저, 그는 조선어에서 한어를 남용하거나 반대로 한어를 배척하는 경향을 극구 반대했다.
첫째, 한문을 일률로 배척하고 조선어에만 의거하여 자기 민족의 문화를 발전시키려는 생각은 역사와 현실을 떠난 주관 유심론이다.
둘째, 가령 조선어라 하지만 이미 그의 생명력을 잃은 용어는 남용하지 말아야 하며, 이와 반대로 한문이라 하지만 이미 조선어로 굳어지고 여기서 파생된 새로운 어휘는 보류해두고 억지로 고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 외래어를 일률로 배척해서는 안 되며 과학기술분야에서 오랫동안 사용했고 또 이미 조선어로 전화된 전문술어는 고치려 하지 말아야 한다.

이렇듯 그는 연변조선족자치주 부주장, 연길 한글연구회 주임, 도문중학교 교장, 연변대학교 조선언어문학과 교수 등을 역임하여 한글 보급, 발전과 함께 교민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발발 시기에 투옥되었다가 출옥 후 병을 얻어 회복 중 낙상사고를 당해 몇년 간 고생하다 1978년 5월 1일 연길에서 숨을 거두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0년 이호원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1년 그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여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3. 참고 문헌

  • 양지선, <이호원의 재중독립운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2020년.
  • 강진영, <이호원의 민족운동 연구>, 수원대학교 교육대학원, 2011년.


[1] 대표적인 인물로 박열 이범석이 있다. [2]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장명환(독립운동가)과 동명이인이다. [3]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최천과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