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 성숙(性叔) / 후은(後隱) |
본관 | 벽진 이씨[1] |
출생 | 1867년[2] 10월 8일 |
경상도
영천군
자양면 토동 (현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959번지)[3] |
|
사망 | 1933년[4] 10월 10일 |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가야산 | |
묘소 |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산44번지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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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67년 10월 8일 경상도 영천군 자양면 토동(현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959번지)에서 아버지 이정봉(李楨鳳, 1828. 9. 29 ~ 1899. 1. 11)[5]과 어머니 경주 김씨(1845. 8. 7 ~ 1909. 2. 15)[6] 사이의 3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7]1907년 한일신협약이 체결되고 이때 조선·일본 양국간에 교환된 비밀각서에 의하여 그해 8월 1일부터 한국군이 해산되자 경상남도 진주군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1908년 8월 8일에는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사동 송하마을(現 산청군 시천면 천평리 송하마을)에 거주하던 박동의(朴東義) 의병부대의 부장(副將)이 되어 경상도 전역에 걸쳐서 의병운동을 하였다. 그리고 8월 18일에는 그의 향도관(響導官, 길잡이)인 서병희(徐炳熙)와 함께 의병 18명을 거느리고 산청군 두량곡(斗量谷)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여 적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전과를 올렸다. 그해 9월에는 대장이 되어 경상남도 곳곳을 전전하며 일본군과 수차례 교전했다.
1909년 1월에는 산청군 시천면에서 서병희와 함께 부하 11명을 거느리고 함안군 산외면 방목동(현 함안군 가야읍 말산리)으로 이동해 그곳에 살던 일본인 가옥을 습격하여 소각했고, 그곳에 주둔하던 일본군을 격퇴했다. 그후 그의 부하로 활약하였던 서병희는 그해 2월 독립해 자신의 의병부대를 이끄는 의병장이 되었다. 2월 22일에는 합천군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격퇴했고, 4월 14일에는 함안군 군북면 장터에서 일본인을 응징하고 일본군 및 함안경찰서에 격문을 발송했다. 6월 13일에는 부하 수십명을 거느리고 칠원면에 주둔하던 일본군을 습격해 총과 일본 군도를 노획했으며, 일본인 상인 우치다 젠스케(內田善助)를 습격해 다치게 했다.
같은 해 9월에는 진주군 정촌면 가좌동(現 진주시 가좌동)에서 일본군과 교전해 재무주사를 처단하고 권총과 다수의 서류를 압수했다. 11월 1일에는 의령군 부림면 신반리 장터에서 일본인을 사살했고 12월 10일에는 고성군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지리산 어느 곳에 무기를 숨겨 묻어 두고, 가야산에 은거하면서 망한대(望漢臺)를 세우고 시를 읊으며 망국에 대한 슬픔을 노래했다. 1919년 고종황제가 승하하자 이후 흰 갓과 소복을 입으며 생활했다.
이후 1933년 10월 10일 별세하였다.
사후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에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1]
판서공파(判書公派)-토동백파(土洞伯派) 32세 로(魯) 원(元) 운(雲) 우(愚) 항렬.
[2]
벽진이씨판서공파보 상권 6-27쪽에는 1859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3]
인근의 용산리와 함께
벽진 이씨 집성촌이다.
[4]
벽진이씨판서공파보 상권 6-27쪽에는 1934년에 별세한 으로 기재되어 있다.
[5]
디지털영천문화대전에는 李禎鳳으로 표기되어 있다.
[6]
생원 김병섭(金秉燮, 1790 ~ ?)의 딸이다.
[7]
벽진이씨판서공파보 상권 6-27쪽에는 이학로가 1859년생으로 기재되어 있고, 아버지의 첫째 부인
문화 류씨(1831. 10. 21 ~ 1864. 6. 4) 류동영(柳東英)의 딸 소생으로 기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