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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역대 개막전 선발 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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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쿠치 유세이 | 타와타 신사부로 | 잭 닐 | 타카하시 코나 | 이마이 타츠야 |
이름 | 이케나가 마사아키(池永正明) |
출생 | 1946년 8월 18일 |
출신지 | 일본 야마구치현 토요우라 군[1] |
사망 | 2022년 9월 25일 |
학력 | 시모노세키 상업고등학교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소속팀 | 니시테츠 라이온즈(1965~1970.5) |
1. 개요
전직 일본프로야구 선수이자 지도자, 해설가.출중한 실력을 보유한 전도유망한 투수였으며 니시테츠 라이온즈의 선배이자 스승인 이나오 카즈히사[2]의 뒤를 이을 새로운 에이스 투수로 각광받았으나, 선배의 강요로 승부조작에 연루되는 바람에[3] 젊은 나이에 야구계에서 추방당하고 청춘을 허송세월해 버린 비운의 인물.
2. 학창 시절
시모노세키 상고 재학 시절
시모노세키 상업고등학교의 에이스 투수로 자리잡은 이케나가는 2학년 때인 1963년 춘계 코시엔 결승전에서 홋카이도 대표인 홋카이 고등학교를 물리치고 모교 사상 첫 전국대회 우승을 이끌었고, 그 해 하계 코시엔에서도 학교를 준우승으로 이끌면서 여러 프로 구단의 입단 제의를 받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이케나가는 니시테츠 라이온즈의 영입 제의를 받아들여 1965년에 프로에 데뷔했다.
3. 프로 시절
데뷔 시즌인 1965년, 시즌 20승을 거두고 동료들에게 헹가래를 받는 이케나가.
입단 첫 해인 1965년부터 곧바로 니시테츠 선발진에 입성한 이케나가는 신인 선수로써는 최고의 맹활약을 보이며 47경기(30경기 선발)에 등판해 20승 10패, 평균자책 2.27, 156탈삼진의 빼어난 성적으로 신인왕을 수상, 이나오 카즈히사 이후 니시테츠 마운드의 미래를 이끌 유망주로 떠올랐다.
당시 이케나가의 입단 동기 오자키 마사시는 그의 활약에 질렸는지 "저런 굉장한 녀석이 입단 동기라니, 난 이제 야구로 밥먹고 살긴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토로했고, 이케나가는 신인왕 수상 소감으로 "나는 야구 이외의 직업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야구는 내 천직이다."라면서 평생 야구에 뼈를 묻을 각오를 털어놓은 바 있다.[4]
이듬해인 1966년엔 15승 14패, 평균자책점 2.18의 성적으로 약간 주춤했지만 3년차인 1967년에 23승 14패, 평균자책점 2.31로 퍼시픽리그 다승왕을 손에 쥐며 최고의 한 해를 구가했고, 1968년에도 23승을 거두며 2년 연속 20승을 기록했다. 1969년엔 18승을 따내면서 5시즌 통산 99승을 수확, 그 페이스라면 300승은 떼놓은 당상으로 여길 정도로 출중한 실력을 자랑했다. 그 외 이케나가는 지명타자 도입 이전의 퍼시픽리그에서 타자로도 통산 홈런 13개를 때리는 등[5] 타격 실력도 만만치 않은 선수였으며, 데뷔 첫 해부터 5년 연속 올스타전에 출전하는 등 상당한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4. 검은 안개 사건에 휘말리다
하지만 1969년 시즌 종료 후 이른바 검은 안개 사건이라 불리는 승부조작 사건이 일본 야구계를 강타했고, 사건의 장본인 나가야스 마사유키는 승부조작의 전모를 고백하면서 조작에 연루된 6명의 동료들의 명단을 실토했는데 이 중 이케나가도 포함되어 있었다.이케나가는 당초 승부조작을 부정했지만, 니시테츠 라이온즈의 팀 선배였던 타나카 츠토무[6]가 진술한 승부조작 연루자의 금전 관계에 대한 상세 내용을 인정하면서 "난 절대로 승부조작을 하지 않았다. 타나카 선배가 나에게 현금 100만엔을 억지로 맡겼고 이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을 뿐이다."라고 주장했다. 이후 경찰 조사 끝에 이케나가는 승부조작을 저질렀다는 정황상 근거가 부족해 불기소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그러나 일본야구기구 커미셔너 위원회는 승부조작 및 오토바이 레이스 불법도박 연루자들의 조사 및 심의를 거쳐 1970년 5월 25일, 이케나가와 니시테츠 소속 선수 마스다 아키오, 요다 요리노부 3명에게 영구제명 선고를 내렸다.[7]
이케나가의 제명 선고 이유는 아래와 같다.
- 타나카 츠토무에게 받은 현금을 반환하지 않고 그대로 갖고 있었던 점
- 승부조작 권유를 받고도 이 사실을 사무국에 보고하지 않은 점
- 실제로 1969년 시즌 최후반에 짧은 이닝만 소화하고 강판된 2시합이 의심스러움
불과 24세의 나이에 야구계에서 쫓겨나게 된 이케나가는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고, 같이 영구제명 처분을 받은 마스다와 요다가 "이케나가가 우리와 같은 처분을 받는 것은 야구계의 큰 손실이다. 그런 투수는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다."라고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기까지 했으나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8] 게다가 이케나가와 같은 혐의임에도 엄중 주의조치에 그친 니시테츠 팀 동료 모토이 미츠오[9]와 비교되면서, 당시 언론에서는 " 승부조작에 대한 응징의 본보기를 위해 희생양이 된 비운의 에이스"라며 이케나가를 동정한 바 있다.
결국 이케나가는 눈물을 머금고 데뷔 후 불과 6년 만에 그라운드를 떠나야 했다. 통산 성적은 238경기 등판, 103승 65패, 평균자책점 2.36, 793탈삼진이다.
5. 영구제명 이후, 그리고 사면복권
이후 이케나가는 친정팀의 연고지 후쿠오카시를 떠나지 못하고 하카다 구의 번화가에 바를 차려 2007년까지 운영했다.그 와중에 니시테츠 시절 선배인 이나오 카즈히사, 토요다 야스미츠, 그리고 상술한 입단 동기 점보 오자키(오자키 마사시) 등 이케나가의 영구제명을 안타깝게 여긴 인물들이 모여 그의 영구제명 철회를 요구하는 서명 활동을 하는 등의 구명운동이 시작되었고, 일본 국회에서도 이 사안이 언급될 정도로 확산되었다. 2001년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구단주이자 일본프로야구에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거물 와타나베 츠네오까지 " 일본야구기구는 이케나가를 언제까지 영구제명자로 둘 생각인가?"라고 강력히 부르짖는 등 이케나가의 복권 허용 분위기는 계속해서 무르익어갔다.
마스터즈 리그 투수로 등판한 이케나가
2001년 12월, 일본프로야구 은퇴 선수들을 주축으로 하는 프로야구 마스터즈 리그가 출범하면서 큐슈 팀인 후쿠오카 돈타쿠즈의 초대 감독으로 그의 니시테츠 선배이자 스승인 이나오 카즈히사가 취임하게 됐는데, 이때 이나오가 "다시 한번 이케나가를 마운드에 세우고 싶다. 팬들에게도 (그의 모습을 다시) 보여주고 싶다"며 이케나가에게 선수로 뛸 것을 요청했고 이케나가는 이를 받아들이며 30여년 만에 야구계의 공석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사실 마스터즈 리그 자체가 영구제명 처분 주체인 일본야구기구와 관계없는 프로야구 OB 클럽의 주도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케나가가 활동하는 데는 아무런 제약은 없었고 여기다 영구제명 처분자 중 가장 억울한 인물로 동정받고 있었는지라 이케나가에 대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뒤늦게나마 다시 야구계로 돌아온 이케나가는 즐거운 마음으로 마스터즈 리그에서 선수로 뛰었다.
2014년 10월, 모교 시모노세키 상고 개교 130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한 이케나가
이후 2005년 3월 16일 개최된 12개 구단주 회의에서 야구협약이 개정되며 '영구제명된 야구인은 15년이 경과하면[10] 심의를 통해 제명 조치를 해제받을 기회를 준다'는 조항이 들어가게 됐고, 이케나가는 바로 심의를 신청하여 1개월 후인 4월 25일에 일본야구기구 커미셔너 위원회가 영구제명 처분을 해제하기로 결정하면서 마침내 35년 만에 억울한 오명을 벗게 되었다. 정식으로 야구계에 복귀한 이케나가는 이후 고향 야마구치현의 사회인야구팀, 마스터즈 리그 팀 감독 등을 역임했으며 큐슈 지역 방송국의 야구 해설가로도 활동했다.
2022년 9월 25일,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6세. #
[1]
2005년에
시모노세키시에 합병되었다.
[2]
1969년 시즌 후
나가야스 마사유키가
승부조작 주모자로 니시테츠에서 퇴출당하자 당시 니시테츠의
선수 겸 감독
나카니시 후토시는 승부조작에 책임을 지고 현역 은퇴와 동시에 감독직에서도 사퇴했고, 후임으로 이나오가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이듬해 5월 이케나가가 시즌 도중
영구제명을 당할 때까지 이나오는 이케야마를 제자로써 지도했다.
[3]
후술하겠지만 이케나가는 실제로는 승부조작에 관여하지 않았고, 단지 선배가 억지로 쥐어주다시피 한 현금을 그대로 보관한 데다 승부조작 제의를 받았다는 사실을 보고하지 않은 것이 영구제명이란 결과로 돌아오고 말았다.
[4]
실제로 오자키는 니시테츠에서 투수, 외야수로 플레이했지만 별다른 활약 없이 프로야구
데뷔 3년 만인 1967년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이후 오자키 마사시는
골프 선수로 전향해 '
점보 오자키'라는 예명으로 활동하였으며, 일본은 물론이고 세계 무대에서 전설적인 골퍼로 유명해지면서 남부러울 바 없는 성공을 거두었다.
[5]
5년 남짓한 기간동안 때린 기록으로 연간 2~3개는 담장을 넘긴 것이다. 웬만한 똑딱이 타자보다 나았던 셈. 참고로 일본 프로야구 통산 최다홈런 투수인
카네다 마사이치는 20시즌 동안 38개, 연평균 1.9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당시 니시테츠 감독
나카니시 후토시가 "매년 20승은 확실하니까 투수로 전념시키고 있지, 15승 정도의 투수였다면 진작에 타자로 전향시켰을 것이다."라고 평가할 정도로 야구 센스가 뛰어난 선수였고, 게다가 발도 빨라서
도루도 심심찮게 기록했다.
[6]
1967년까지 니시테츠 소속이었고 1968~1969년엔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뛰었다. 사건 이후 다나카는 경찰에 승부조작 혐의로 체포되었고, 사건이 일어난 1969년에 이미 구단의 방출 통보를 받고 그대로 은퇴했기 때문에 이케나가와는 달리 공식적인 징계는 받지 않았으나 사실상
영구제명 신세가 되었다.
[7]
주모자
나가야스 마사유키는 1969년 11월 28일 부로 이미 영구제명 당한 상태였고, 이후 다른 연루자들인
오가와 켄타로는 1970년 6월 3일, 모리야스 토시아키는 7월 30일에 각각 영구제명 선고를 받았다.
[8]
당시 상황을 언급한
주간 베이스볼의 기사에 의하면 이케나가를 영구제명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인 타나카도 이케나가는 승부조작을 하지 않았다며 변호했다고 한다. 다만 사건을 다룬 다른 기사들에선 해당 내용이 보이지 않아 교차검증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9]
다만 모토이는 돈을 돌려주지 않은 이케나가와는 달리 승부조작을 거절한 것은 물론 자신에게 승부조작 의뢰금을 준 요다 요리노부에게 돈을 돌려준 것이 인정되어 승부조작 권유를 보고하지 않은 것만 반영해 경고 처분에 그쳤다.
[10]
영구제명과는 다른 무기실격 처분된 야구인도 5년이 경과할 시 해당 조항의 대상에 포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