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1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그는
송기면,
유성렬,
임학규와 함께 마산면 신장리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1919년 3월 29일 신장리 장터에서 동지들과 함께 군중을 선동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다가 주동자가 검거되자 이에 항의하여
김인두,
박재엽,
고시상,
양재흥과 함께 주재소를 습격하였다. 이때 그는 돌아가는 장꾼들에게 합세할 것을 역설하여 검거자 구출운동을 격렬하게 벌이다가 일본 순사에 붙잡혀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고향에서 조용히 살다 1956년 2월 7일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