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 세오(世吳) / 마성(蟆城) |
본관 | 해남 윤씨[1] |
출생 | 1916년 4월 21일[2] |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창리 용두마을 625번지[3] | |
사망 | 2010년 9월 6일 (향년 94세) |
서울특별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285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정치인, 기업인.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서훈되었다.어부사시사로 유명한 고산(孤山) 윤선도의 9대손이다.[4]
2. 생애
1916년 4월 21일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창리 용두마을 625번지에서 아버지 윤부호(尹富浩, 1890. 5. 13 ~ 1968. 8. 18)와 어머니 연안 이씨(1887. 1. 21 ~ ?) 사이의 4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해남군 삼산면 창리 상금마을 62번지[5]로 이주해 본적을 옮겼고, 상경한 뒤에는 경기도 경성부 사직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에 거주했다. 1981년에는 경기도 성남시 수진동[6] 456번지에 거주했다.연희전문학교 상경과 재학 중이던 1939년 12월, 경기도 경성부 사직동 자택에서 같은 학교에 재학 중이던 김상흠· 서영원(徐泳源)· 김영하(金永河)· 김재황(金在璜)· 김상협·김용운(金龍雲)· 백재호(白在鎬)· 고영완· 이동원(李東元)· 민영로(閔泳魯) 등 50여 명의 학우와 함께 항일비밀결사 조선학생동지회(朝鮮學生同志會)를 조직했다. 이들은 1942년 3월 1일에 3.1 운동과 같은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의하고, 전국 13도 중요 도시에 세포조직을 설치하는 등 조직을 확대하고자 했다. 또한 남산공원에서 새로 쓴 독립선언서를 선포하고 도쿄 등지에서 유학 중인 해외 유학생들과도 연락을 맺는 등 전국적인 거사를 계획했다. 이때 윤주연은 주로 외부 인사들과의 연락을 도맡았다.
이후 1940년 2월부터 1941년 7월까지 회원들과 함께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現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남한산성과 경성부 냉천정(現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냉천동) 약수터, 연희전문학교 뒷산, 고양군 벽제면 고양리(現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 읍내마을 벽제관 등 경성부 근교 각지에서 모임을 갖고 회원들의 독립의식을 고취하기도 했다. 그런데 1941년 7월 원산상업학교에 두었던 동지회의 하부조직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면서 조선학생동지회의 실체가 드러났다. 윤주연은 1941년 9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이어 연희전문학교에서도 퇴학 처분을 받았다.
체포된 뒤에는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43년 3월 함흥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후 옥중에서 8.15 광복을 맞았고, 곧 출옥했다.
출옥 후에는 연희전문학교로부터 추가졸업장을 수여받았고, 목포동광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또한 경기도 성남시에 사립 중·고등학교를 설립하고[7] 성남시 호남향우회장을 2차례에 걸쳐 연임했고, 한주건설사 대표로서 건재 제조업을 경영했다.
1977년에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에 서훈되었고, 1981년에는 통일민족당에 입당해 같은 해 실시된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민족당 후보로 경기도 성남시· 광주군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민주정의당 오세응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이후 동국대학교에 출강했으며, 광복회 경기도지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에 서훈되었다,
2010년 9월 6일 서울특별시에서 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2010년 9월 8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안장되었다.
3. 선거 이력
연도 | 선거종류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1981 |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성남시· 광주군) |
|
4,547표 (2.28%) | 낙선 (8위) |
[1]
어초은공파(漁樵隱公派) 25세 주(柱) 항렬.
[2]
해남윤씨대동보 권4 162쪽에는 4월 22일생으로 오기되어 있다.
[3]
1915년 작성된 지적원도에 따르면, 이 지번의 필지는 1915년 당시 윤주연의 아버지 윤부호(尹富浩, 1890. 5. 13 ~ 1968. 8. 18)의 소유였다. 1968년 1월 31일 625-1번지와 625-2번지로 분리되었고, 625-1번지는 1995년 6월 1일 윤주연의 장조카 윤신하(尹新夏, 1936. 7. 22 ~ )에게로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625-2번지는 1981년 8월 31일 윤주연의 7촌 재종질(再從姪) 윤순하(尹淳夏, 1960. 1. 25 ~ )에게로 소유권이 이전되어 현재에 이른다.
[4]
윤선도의 다섯째 아들 윤직미(尹直美, 1643. 10. 5 ~ 1724. 3. 23)의 후손이다.
[5]
현재 이 지번의 필지는 62-6번지와 62-7번지로 분리되어 남아 있다. 62-6번지는 1966년 4월 26일 해남토지개량조합으로 소유권이 이전되었고, 62-7번지 또한 1966년 5월 7일 해남토지개량조합으로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토지개량조합은 1970년 농지개량조합으로 개칭되었다가 2000년 폐지되고 그 업무는 농업기반공사가 인수했다. 농업기반공사는 2005년 한국농촌공사로 바뀌었다가 2008년
한국농어촌공사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른다.
[6]
1989년
수정구
수진동이 되었다.
[7]
이후 인접한 다른 학교에 통폐합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