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劉猛생몰년도 미상
후한 말의 인물.
2. 상세
서주 낭야국 사람으로 상서령을 지내다가 풍방이 환빈이 자신과 교제하지 않는 것에 앙심을 품고 주당이라 비난했는데, 유맹은 이 일이 넘어왔어도 환빈과 가까워 그 일을 정식으로 문제 삼지 않았다.조절이 대노해 유맹을 환빈과 같은 무리하면서 탄핵해 상주했으며, 유맹은 평소와 같이 태연했고 10일이 지나 감옥에 나가자 면직되어 금고형을 받았다.
환제 때 종정이었고 강직한 정도를 지켜 다른 사람들이 배제하여 스스로 사임하고 귀향했으며, 영제가 즉위하자 진번, 두무가 정사를 보필하면서 다시 등용되었다. 169년에 상서를 지내 장환, 왕창과 함께 이응을 천거해 삼공의 선발에 참여하게 했는데, 조절 등이 그 말을 질투해 말하자 조서를 통해 책망받았다. 스스로 정위에게 가서 옥에 갇혀 며칠을 지내다가 옥에서 나가자 3개월 동안 봉록을 받지 않는 것으로 속죄를 받았다.
172년에는 사례교위를 지내다가 어떤 사람이 주작궐에 천하가 크게 곤란해 조절과 왕보가 태후를 유폐하여 살해했으나, 공경들은 모두 시체로 녹봉을 받는 시록하면서 충언하는 자가 없다는 글을 올렸다. 이 때 조정에서 유맹에게 조서를 내려 추적해 체포하게 하고 10일에 한 번씩 모여서 회의하게 했는데, 유맹은 비방하는 글이 곧은 말이라 여겨 서둘러 체포하려고 하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나도록 주범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자 유맹은 이 일로 인해 간의대부로 좌천되었으며, 단경이 대신해 사례교위가 되자 단경은 사방으로 나아가 추적하고 체포해 태학의 유학생 등이 1천여 명에 이를 정도로 연루되었다. 유맹은 조절 등으로 인해 단경에게 다른 사건으로 탄핵되어 좌교에 보내져 노역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