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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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의 사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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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9년)
1. 개요
후한 말의 인물이며 자는 숙무(叔茂)로 팔준(八俊)의 한 사람. 왕공의 아들이자 왕겸의 아버지로 연주 산양군 고평현 사람.2. 생애
젊어서 청렴하고 질박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특별히 교제하는 무리는 없었으며, 처음에 효렴에 올랐다가 병으로 사양하면서 응하지 않다가 대장군 양상에게 무재로 천거되었다가 4차례 옮겨져 상서령, 제상, 사례교위 등을 지내고 어양태수를 역임하다가 업무 상의 일로 죄를 얻어 면직되었으며, 환제가 삼공에게 물어 인재를 추천할 것을 명하자 태위 진번이 왕창을 청렴하고 공정하다면서 추천했기에 상서를 지냈다.얼마 안 가서 왕창은 남양태수가 되어 그 지역의 귀척, 호족들을 싫어해 도착하자마자 범죄를 저지르면 관리를 시켜 집을 허물고 나무를 베면서 우물, 아궁이를 막는 등 가혹하게 행하다가 공조 장창이 간하자 이를 받아들여 관대한 정치를 했다.
유표에게 학문을 가르쳤고 왕창은 행실에 검소함이 지나쳐서 유표가 논어의 구절을 통해 검소함으로 아랫 사람을 핍박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자 왕창도 논어의 구절을 인용해 검약함으로 실수하는 자는 드물다고 반박했다.
후에 왕창은 장락위위가 되었고 168년에 사공이 되었다가 8월에 재난을 이유로 파면되었으며, 당시 천하 사람들에게 존경받아 천하에 빼어나게 우수한 인재는 왕숙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고 169년에 집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