劉基
생몰년도 미상
1. 개요
후한 말의 지방관.2. 생애
요서 태수로 공손찬의 장인 후임으로 요서에 부임한 것으로 보이며, 비리에 연좌되어 낙양에 소환되자 공손찬이 벼슬을 버리고 병사로 사칭해 유기를 수행했다. 유기는 일남으로 유배되었고 이 당시 일남으로 유배되는 것은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였는데, 공손찬이 가기 전에 북망산으로 가서 조상들의 묘에 이별을 고하면서 자신에 대한 장례식을 치르고 떠났다.유기는 유배지로 가는 도중에 사면되어 돌아갈 수 있었으며, 이 일로 그를 수행한 공손찬은 고향으로 돌아와 효렴으로 천거되었다.
공손찬의 장인인 후태수(侯太守) 또는 고태수(故太守)와는 별개의 인물이지만, 동일인물로 혼동하는 경우도 있어서 삼국지연의의 판본에 따라서 공손찬을 소개할 때 공손찬의 장인과 동일인물로 나온다.
3. 미디어 믹스
소설 삼국지 속으로에서는 공손찬과 공손월의 대화에서 공손찬이 직접 장인이 자신을 관리로 뽑았고 비리에 연좌되었다는 것을 말하며, 장인과 동일인물로 나오는 유기를 따라 일남에 가려고 했던 이유는 자신을 알아준 분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김경한 삼국지에서는 유기 때문에 공손찬이 살아있는 채로 자신의 장례식을 치르는 진풍경을 경험했다. 그러고 나서 유기와 그를 수발하는 공손찬이 일남으로 향했는데 가던 도중 죄가 풀려 다시 요동으로 되돌아갔다.
삼국지톡에서는 눈길에서 공손찬에게 업혀있는 모습으로 등장하며, 자신을 따라온 공손찬에게 미안하다면서 자기 때문에 고생한다면서 눈물을 흘린다. 그러자 공손찬이 먼 길도 아니라고 대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