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가버트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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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前 축구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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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
윌리엄 가버트 William Garbut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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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3년
1월 9일 / 잉글랜드 그레이터맨체스터주 스톡포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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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4년
2월 24일 (향년 81세) / 잉글랜드 워릭셔주 워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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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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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미상 | |
직업 |
축구선수(
윙어 / 은퇴) 축구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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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
레딩 FC (1903~1906) 아스날 FC (1906~1908) 블랙번 로버스 FC (1908~1911) 아스날 FC (1911~1912) |
감독 |
제노아 CFC (1912~1927) AS 로마 (1927~1929) SSC 나폴리 (1929~1935) 아틀레틱 빌바오 (1935~1937) AC 밀란 (1937) 제노아 CFC (1937~1940) 제노아 CFC (1946~19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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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잉글랜드인이지만 감독으로서 이탈리아 축구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2. 경력
레딩과 아스널 등지에서 활약하던 축구선수였던 가버트는 부상으로 인해 29세의 젊은 나이에 현역에서 은퇴하게 되고, 생계를 위해 고국을 떠나 이탈리아의 제노바로 이주한다. 제노바에서 부두 노동자로 일하던 그는 최초의 이탈리아 국가대표팀 감독인 비토리오 포초의 추천으로 제노아의 감독직을 맡게 된다. 제노아 취임 이후 가버트는 이전까지 생소했던 개념인 체력 단련과 전술에 중점을 두며 훈련 체계를 재편성했고, 이는 이탈리아 축구사에 일대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왔다. 또한 가버트는 이탈리아에서는 최초로 돈을 주고 선수를 데려오는 현대적 형태의 선수 이적 개념을 도입했으며, 제노아를 이탈리아 국외로 원정을 떠난 첫번째 구단으로 만들기도 했다. 1912년 그가 부임한 이후 1927년까지 제노아는 1915, 1923, 1924년 세번의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이는 지금까지도 그들이 들어올린 마지막 리그 트로피로 기록되어 있다.제노아를 떠난 가버트는 새롭게 출범한 구단인 AS 로마의 초대 감독으로 취임한다. 비록 큰 족적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가버트는 로마가 빠르게 안정을 찾고 리그를 대표하는 강호로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주었다. 로마를 떠나 나폴리에 둥지를 튼 뒤에는 안토니오 보야크, 아날도 센티멘티, 카를로 부스칼리아 등의 선수들과 함께 팀을 훌륭히 조직하여 두차례나 3위를 차지하도록 이끌었으며, 이후 나폴리는 30여년 뒤 오마르 시보리가 등장하기 전까지 이때만큼의 성적을 기록하지 못한다.
1935년, 가버트는 정든 이탈리아 무대를 떠나 스페인 라리가에 도전장을 내밀고, 아틀레틱 빌바오를 맡아 레알 마드리드를 승점 2점차로 따돌리며 리그 우승을 차지한다. 이내 이탈리아로 돌아와 밀란과 제노아의 지휘봉을 잡기도 했으나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즘 정책에 의해 본국으로 추방되고, 종전 이후인 1946년 잠시 제노아에 복귀했던 것을 끝으로 다시는 감독을 맡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