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미국 대통령 선거 공화당 후보 웬델 루이스 윌키 Wendell Lewis Wilki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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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81018><colcolor=#fff> 출생 | 1892년 2월 18일 |
미국 인디애나주 엘우드 | |
사망 | 1944년 10월 8일 (향년 52세) |
미국 뉴욕주 뉴욕시 | |
국적 | 미국 |
직업 | 정치인, 변호사, 기업인 |
가족 |
부인 에디스 윌키[1] 아들 필립 |
학력 | 인디애나 대학교 법학과 (학사 / 졸업) |
정당 |
(~1939년 이전) (1939년~1944년)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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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기업인 출신 정치가. 194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출마해 3선을 시도하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에게 패배한 인물. 양당제가 고착된 이후 나온 몇 안되는 비(非) 정치인 출신 주요 정당 대선 후보자이다.[2]2. 생애
진보적인 가정에서 자랐고 어려서부터 민주당 지지자였다고 한다. 변호사로 일하다가 전력회사 C&S에 스카웃, 사업 확대에 공을 세워서 그대로 사장까지 취임한다. 나름 입지전적인 기업가인 셈. 전술했듯 민주당 지지자였으나, 루스벨트 대통령이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국영 전력회사를 세우자(테네시강 유역 개발 공사) 사업에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1940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루스벨트가 3선을 시도하자 선거 1년 남기고 공화당에 입당해서 후보 경선에 출마해 후보로 선출된다. 공화당에 입당한지 1년밖에 안되었기 때문에 당내 경선에서 밀릴것이 뻔했지만, 윌키의 외교적인 입장이 도움이 되었다. 전당대회를 단 한달 남겨두고 히틀러가 프랑스를 침공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유력한 세 후보자이자 고립주의자였던 아서 반덴버그, 토머스 E. 듀이, 로버트 A. 태프트[3]가 한꺼번에 지지율이 폭락한 것이다. 그렇게 윌키는 예상을 꺾고 공화당의 후보로 지명된다.
공화당의 후보로서 윌키는 자신에 반대했던 찰스 맥너리 상원의원[4]을 부통령 후보로 삼고 선거 운동에 나섰다. 주요 공약은 뉴딜 정책의 일부 민영화,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대비. 국제주의자로서 공화당 전당대회의 지명을 받았지만, 당 내 고립주의자들이 찰스 린드버그를 후보로 옹립하려 하고 루스벨트도 적극적으로 외교 정책 어젠다를 내놓자 루스벨트와 차별화하고 공화당 지지자들을 규합시키기 위해 다소 고립주의적인 수사를 취했다. 선거운동 기간에 신사적인 태도로 칭찬을 받았고, 타임 등 주요 언론의 지지도 받았다. 그는 갤럽의 여론조사에서 불과 몇% 차이로 루스벨트에 뒤져 루스벨트가 위기감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는 여론조사 격차를 뛰어넘는 루스벨트의 압승.[5]
대선 패배 후 윌키는 패배를 솔직히 인정하고 루스벨트에게 적극 협력한다. 공화당 내 몇 안되는 개입주의자로서 루스벨트의 렌드리스 법을 적극 찬성했고, 진주만 공습 이후 대일전에도 협력했다. 루스벨트의 전시 특사로서 영국, 중동, 소련, 중국 등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루스벨트의 외교정책에 협력했으며 사회 분야에서도 인종 차별 철폐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러한 윌키의 행보는 공화당이 고립주의에서 국제주의로 나아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루스벨트는 윌키를 고평가해 1944년 미국 대통령 선거 부통령 후보를 제안하거나,[6] 양당의 진보파를 모아 신당(가칭 자유당)을 창당하자는 제안도 했다. #[7] 그러나 1944년 10월, 심장마비로 수술하던 중 사망한다.
3. 선거 이력
<rowcolor=#fff>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40 | 미국 대통령 선거 | 미합중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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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47,744 (44.78%, 82명) | 낙선 (2위) |
4. 기타
- 부통령 러닝메이트인 찰스 L. 맥너리도 1944년 2월 25일에 사망했다. 만약 그들이 1940년에 당선되었다면 전쟁 중에 대통령과 부통령이 모두 공석이 되는 위험천만한 상황이 발생했을 수도.
- 중일전쟁 시기 장제스의 영부인 쑹메이링과 스캔들이 있었다. 대선에서 루스벨트에게 패배한 이후 순방에 나섰을 때 중국을 방문해 쑹메이링과 만남을 가졌고, 그대로 관계를 맺었다는 기록이 있다. 심지어 같이 미국으로 가자는 제안까지 했다고 한다. 이에 장제스가 노발대발하며 기관단총(!)을 들고 그를 찾았으나, 자리를 비운 상태라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윌키는 당시 중국에 동행했던 가드너 콜스라는 정치인에게 쑹메이링이 “내가 아는 한 매력적이고 가장 섹시한 여인 중 하나”라고 밝혔다고 한다.[8]
5. 대중매체
Hearts of Iron IV에서는 1940년 대통령 후보로 등장하며 루즈벨트에 반대하면서도 비슷한 정치적 지향점, 그리고 이후 루즈벨트와 같이 일한 점 덕분인지 대통령에 당선되면 뉴딜 정책[9]이 사라지는게 아닌 윌키의 뉴딜 이라는 특성으로 변경된다.Hearts of Iron IV/카이저라이히에서는 대통령 후보 중 하나로 등장하며 정치적으로 기반 없던것을 반영하여 정치적 문외한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나온다.
대체역사 소설 내 독일에 나치는 필요없다에서는 가너의 트롤짓으로 루즈벨트의 3선을 저지하고, 미국의 33대 대통령이 된다. 루즈벨트처럼 복지와 뉴딜의 필요성, 일본을 견제 해야한다는 식견을 가지고 있지만 현실 역사의 루즈벨트의 뉴딜 동맹 처럼 정치적 기반이 없어 공회당에게 휘둘리다가 진주만 공습으로 겨우 실권을 잡는다. 생전에는 혼란스런 정국과 연이은 실패로 저평가 받았지만 시간이 흐른 후 당시 공화당 정권에서 현실적 시각을 가지고 최선을 다한 비운의 대통령으로 평가받는다고 한다.
비명을 찾아서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늦춰지는 덕에 당선되었다고 나온다.
[1]
Edith Wilke, 1918년 결혼
[2]
20세기 이후로는 기업인 출신으로서 상무장관을 역임한
허버트 후버, 웬델 윌키, 군인 출신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부동산 사업가 겸 셀럽 출신
도널드 트럼프 이렇게 단 네 번밖에 사례가 없다. 네 명 모두 대통령 선거가 자신의 첫번째 공직 선거 출마였다.
[3]
이중 반덴버그와 듀이는 2차대전과 냉전 등을 계기로 국제주의로 전향하며 태프트만이 2차 대전 이후에도 꾸준히 고립주의를 옹호했다.
[4]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로, 공화당 내 진보파에 속했다. 윌키 지명 거부 운동을 주도했지만, 공화당 당 내에서 기반이 없었던 윌키는 중진 정치가 맥너리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고 맥너리도 이를 받아들였다.
[5]
그래도 격차를 10%p내로 내며
알프 랜던보다는 훨씬 선전했다. 또 랜던은 패배 위로 편지를 6,000 통만 받았지만 윌키는 10만 통이나 받았다고 한다.
[6]
윌키는 44년에도 공화당 경선에 출마하지만
토마스 듀이에게 밀려 낙선한다.
[7]
남부민주당+보수공화당을 보수당으로, 북부민주당+진보공화당을 자유당으로 합쳐 정당제를 개편하려는 시도는 1960년대까지 꾸준히 제기되었는데 공화당 후보로서는 처음으로 딥 사우스에서 승리를 거둔
배리 골드워터가 이 개편안의 대표적인 지지자였다. 그러나
헨리 캐벗 로지 등 북동부 공화당원들에게 엄청난 반발을 사 이런 개편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8]
출처: 조너선 펜비, <장제스 평전>
[9]
루즈벨트말고 다른 대통령이 집권하면 뉴딜은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