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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d428b>국가 | 우산국 · 세라 |
역사 | 역사 전반 · 우산국/역사 | |
전투 | 신라-우산국 전투 · 우산국 여진족 해적의 침입 | |
왕사 | 우해왕 · 풍미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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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 토두 · 백길 | |
기타 | 우산도 · 울도군 · 지증왕ㆍ 이사부 ·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
1. 개요
우산국이 여진족 해적의 공격에 의해 멸망하게 된 사건.2. 전개
512년 신라-우산국 전투 이후, 우산국은 신라에 복속되어 있다가 후삼국시대가 되며 호족들이 난립하게 되자 930년대 신라에서 고려로 복속노선을 바꾸게 된다. 이후 고려사 기록에 의하면 1018년에 여진족 해적의 공격을 몇 차례 받았고 약탈 때문에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했다고 한다.뜬끔없이 북쪽의 여진족이 나와 의아해 할 수 있으나 고려 초기에는 현재의 함경도 지역에 여진족이 거주했고, 지도를 보면 함경도에서 울릉도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침략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었다. 참고로 1010년대의 여진족 해적들은 쓰시마 섬, 일본 본토 일부까지 약탈할 정도였으니 중간에 끼인 우산국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전투 당시 상황은 알 수 없으니 수많은 여진 해적들이 여러 척의 군함을 이끈채 맹렬한 공격을 가하여 우산국 병력이 무너진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1350년 고려 말 왜구의 침입 같은 상황과 비슷한 상황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