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19 04:54:12

용병 전쟁


용병 전쟁
영어: Mercenary War
시기 기원전 240년 ~ 기원전 238년
장소 튀니스 고대 카르타고의 영역
교전국 파일:attachment/mon_256_1.png 고대 카르타고 용병 반란군
지휘관 파일:attachment/mon_256_1.png 한노
파일:attachment/mon_256_1.png 하밀카르 바르카
파일:attachment/mon_256_1.png 한니발☠
스펜디오스☠
마토스☠
아우타리투스☠
자르자스☠
결과 고대 카르타고의 승리, 로마 공화국 사르데냐, 코르시카 점유.

1. 개요2. 배경3. 전개4.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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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포에니 전쟁이 종결된 직후인 기원전 240~238년, 고대 카르타고에 고용된 용병들이 급료 지급을 미룬 카르타고 정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면서 발발한 전쟁.

2. 배경

고대 카르타고는 고대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군대를 구성했다. 페니키아인으로 구성된 장교들을 제외하면, 스페인인, 리비아인, 누미디아인, 이탈리아인, 그리스인, 갈리아인 등 지중해 세계 각지에서 고용된 용병들이 다수였고, 카르타고 시민병의 비중은 높지 않았다. 이는 카르타고 시민이 상대적으로 적고 아프리카 내륙의 원주민들이 종종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 국내에 남아 있어야 했고, 전문 군인으로 구성된 군대가 모든 면에서 징집병보다 우월한 데서 비롯되었다. 또한 카르타고는 지중해에서 가장 부유한 해상 무역 국가로 손꼽혔기에 용병 고용 비용을 쉽게 지불할 수 있었다.

그러던 기원전 241년, 아이가테스 해전에서 로마 해군에 패배한 카르타고는 더이상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할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시칠리아 방면 카르타고군 사령관 하밀카르 바르카에게 로마 정부와 평화 협약을 협상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하밀카르 바르카는 아직 릴리바이움과 드레파나가 버티고 있으니 새 함대를 일으킨다면 이길 희망이 없는 것도 아닌데 전쟁을 끝내겠다는 것에 분개해 협상을 이끌기를 거부했고, 시칠리아 내 카르타고 세력의 최후 거점인 릴리바이움 수비대 지휘관 기스코가 하밀카르를 대신해 협상했다. 그 결과, 양국은 루타티우스 협약(Treaty of Lutatius)을 체결했다.
1.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에 가까운 여러 섬도 양도한다. 단, 양도해야 하는 섬은 차후에 정한다.
2. 카르타고는 3,200달란트의 배상금을 지불한다. 1,000달란트는 즉시 지불해야 하고, 나머지는 10년 안에 지불해야 한다.
3. 양국 모두 상대방의 동맹국을 방해하거나 그들과 전쟁을 벌이지 않으며, 양국의 영토에 거주하는 사람을 병사로 모집하지 않는다. 또한 상대방의 영역에서 공공 사업을 위한 자금을 조달하지 않는다.

평화 협약이 체결된 뒤, 하밀카르 바르카는 에릭스 산에 주둔하고 있던 자신의 용병대 20,000명을 릴리바이움으로 데려간 뒤 지휘권을 그에게 넘기고 홀로 귀국했다. 기스코는 이들이 한꺼번에 카르타고로 이동한다면 오랜 전쟁으로 재정이 피폐해진 정부가 급료를 지불하지 못해 소요가 일어날 거라 예상하고 조금씩 본국으로 보내서 급료를 받게 하려 했다. 그러나 카르타고 당국은 그들 전부 신속하게 데려오라고 명령했고, 그는 어쩔 수 없이 명령에 순종했다. 이후 용병대는 처음에는 카르타고 시 인근에 주둔했다가 나중에는 시카로 이송되었다.

카르타고 당국은 막상 용병 전체를 데려온 뒤에는 밀린 급료를 제대로 주지 않으려 했다. 한노는 정부의 지시에 따라 시카로 가서 카르타고의 국고가 전쟁과 로마와의 평화 조약으로 인해 고갈되었다며 급료 일부를 포기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용병들은 하밀카르 바르카가 일전에 자기들에게 전쟁이 끝나면 보너스를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며,[1] 이제와서 약속을 없던 것으로 해버리고 급료마저 깎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항의했다. 한노는 그들을 달래려 애썼지만, 용병들은 끝내 통제에 불응하고 카르타고를 향해 진격해 카트타고 인근의 튀니스 시에 진을 쳤다.

카르타고 정부는 용병들이 카르타고 시를 공략하려 들 것을 우려해 마침내 급여를 전액 지불하기로 했다. 기원전 240년, 기스코는 용병대가 요구하는 급료를 담은 보물 상자들을 챙겨 튀니스로 향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용병들은 카르타고 정부가 자신들을 가만둘 리 없다고 여기고 이참에 카르타고를 정복하고 자신들의 나라를 세우기로 결의했다. 반란군은 기스코를 체포하고 그가 가지고 온 보물을 압수한 뒤 스펜디오스와 마토스를 지도자로 선출했다. 이리하여 용병 전쟁이 발발했다.

3. 전개

스펜디오스와 마토스는 카르타고에 귀속되었던 도시들에 서신을 보내 페니키아인들의 멍에에서 벗어나 자신들과 합세하라고 요청했다. 당시 로마와의 전쟁에서 패한 뒤 텅 빈 국고를 채우기 위해 과중한 세금을 물린 카르타고에 반감을 품고 있던 도시들은 용병들의 요청에 쉽게 응했고, 오직 비제르테와 우티카 시만이 카르타고를 계속 따랐다. 70,000명의 리비아인과 20,000명의 용병으로 구성된 군대를 결성한 두 지휘관은 카르타고에 전쟁을 선포했다.

카르타고 정부는 일전에 아프리카에서 누미디아와 원주민 반란군을 무찔렀던 한노에게 지휘권을 맡기고 새로운 용병군을 모집했으며, 모든 장정을 무장시켰으며, 시내에서 기병을 훈련시키고 잔존한 함대를 소집했다. 그러는 사이 마토스는 우티카와 비제르테를 포위했고, 스펜디오스는 튀니스 시 주변의 시골들을 공략하고 카르타고 시를 육지에서 봉쇄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한편, 용병 반란군은 로마에 사절을 보내 자신들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로마 정부는 카르타고와 평화 협약을 맺은 뒤 팔리스키인의 반란 진압에 분주한 상황에서 카르타고와 쓸데없이 또다른 전쟁을 벌일 이유는 없다고 여겼고, 카르타고가 전쟁 배상금으로 많은 돈을 빚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이 파괴되는 것을 원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용병 반란군의 요청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카르타고 포로를 몸값 없이 풀어주고 카르타고에 곡물을 보냈으며, 카르타고가 로마의 동맹국에서 용병을 모집하는 것을 허용했다.

로마의 협조 덕분에 반격할 군세를 확보한 한노는 100마리의 전투 코끼리를 앞세워 우티카를 포위한 반군을 격파했지만, 흩어진 적군을 쫒지 않고 우티카로 들어가서 축하 행사를 벌였다. 그 동안 반란군은 재집결한 뒤 하밀카르 바르카 휘하에서 배웠던 대로 유격전을 개시해 한노군이 식량 보급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결국 한노는 우티카에서 빠져나와야 했고, 고르자(Gorza)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반란군에 격파당했다.

한노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접한 카르타고 정부는 하밀카르 바르카를 육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70마리의 전투 코끼리, 새로 계약한 용병대, 그리고 용병 반란군 중 귀순한 이들을 제공했다. 이들은 총합해 8,000에서 10,000명에 이르렀는데, 다수는 한노를 따랐다가 반란군에게 패배했을 때 생존한 장병들이었다. 하밀카르는 이들을 철저히 훈련시키면서 카르타고를 옥죄고 있는 반란군을 격퇴할 준비에 착수했다.

당시 카르타고로 향하는 산길은 마토스가 이끄는 반란군에 의해 점령되고 요새화되었다. 대규모 군대가 행진할 수 있는 유일한 경로는 바그라다스 강을 건너는 것뿐이었는데, 스펜디오스가 바그라다스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옆에 숙영지를 세웠기 때문에 이 역시 뚫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하밀카르는 두 반란군 지휘관과는 달리 카르타고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그곳의 지리를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여름에 사막 바람이 불 때 바람에 실려온 모래가 진흙 퇴적물을 형성하여 강 어귀에서 건널 수 있는 길을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계획을 숨긴 채 한밤 중에 카르타고를 떠나 자신의 군대와 함께 사막 바람이 만든 길을 건넜다.

다음날 새벽, 그는 스펜디오스의 군대가 주둔한 숙영지에 접근했다. 이에 스펜디오스는 10,000명의 장병을 이끌고 하밀카르를 대적했고, 우티카를 포위하고 있던 15,000명의 다른 용병군도 아군과 합세하기 위해 이동했다. 하밀카르는 적과 잠시 대치했다가 군대를 재편성하기로 하고, 선봉에 섰던 기병과 코끼리를 물러서게 하고 팔랑크스 부대를 전진시켰다. 스펜디오스는 적 코끼리와 기병이 물러서는 것을 보고 그들이 후퇴하고 있다고 착각해 전군에 돌격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들의 무질서한 공세는 하밀카르가 내세운 팔랑크스에 가로막혔고, 뒤이어 하밀카르의 경보병이 공격해 반군을 패퇴시켰다.스펜디오스는 우티카에서 달려온 아군과 합세한 뒤 군대를 재정비하려 했으나, 하밀카르의 기병과 코끼리가 그들의 측면을 요격해 격파했다.

바그라다스 강변 전투에서 반군 6,000명을 사살하고 2,000명을 사로잡은 하밀카르는 스펜디오스가 세운 숙영지를 점령한 뒤 기세를 이어가 우티카로 진격해 그곳을 포위하고 있던 반군을 몰아냈다. 하지만 비제르테를 포위하고 있던 마토스가 누미디아인과 아프리카인으로 구성된 정예병을 보내줬고, 스펜디오스 본인은 아우타리투스가 이끄는 갈리아 용병을 포함한 8,000명을 새로 결성할 수 있었다. 그는 즉각 하밀카르에게 반격하려 했지만, 누미디아 귀족으로 반란군과 함께 했던 나라바스가 2천 명의 누미디아 기병과 함께 귀순한 뒤 유격전을 전개하면서 보급이 끊어졌다.[2]

당초 마토스의 조언에 따라 하밀카르가 보유한 강력한 전투 코끼리와 기병을 피해 시에나 산악지대에서 농성하던 스펜디오스는 식량난이 갈수록 심해져서 군영 내에서 식인 풍조까지 발생하자 도저히 버틸 수 없다고 여기고 아우타리투스, 자르자스와 함께 하밀카르와 협상했다. 그 결과 하밀카르와 함께 싸우기를 원하는 이들은 카르타고군에 귀속되고 나머지는 방면되는 조건의 협약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스펜디오스의 군대 내에 있던 리비아인들은 스펜디오스가 자신들을 페니키아인들에게 팔아넘겼다고 여기고 무기를 들어 카르타고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밀카르는 코키리병과 경보병들을 투입해 이들의 전열을 흐트러놓은 뒤 전원 포위 섬멸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40,000명에 달하는 리비아인이 사살되었다고 한다.

그 후 스펜디오스를 비롯한 살아남은 반란군을 방면한 하밀카르는 반군에 가담했던 대부분의 도시들을 카르타고 편으로 돌리는 데 성공했다. 이에 고무된 카르타고 정부는 한니발에게 두번째 분견대를 맡겨 반군의 소굴인 튀니스를 공략하게 했다. 그러나 사르데냐에 주둔하고 있던 용병들이 반란을 일으켜 카르타고 장병 및 장교들을 모조리 살해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 소식을 접한 카르타고 정부는 한노[3]에게 소규모 병력을 맡겨 사르데냐로 파견했지만, 한노가 이끌고 온 군대는 섬에 도착하자마자 반군에 가담했고, 한노는 체포된 뒤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한편, 마토스는 스펜디오스 등을 맞아들인 뒤 반란군 장병들이 하밀카르의 관용 정책에 감화되어 잇따라 귀순하는 상황에 두려움을 느꼈다. 이를 어찌 대처할 지 논의한 끝에, 하밀카르가 더이상 관용을 베풀 수 없는 상황으로 몰고가서 장병들이 자신들을 계속 따를 수밖에 없게 만들기로 했다. 그들은 우티카 외곽에 군대를 소집한 뒤, 사르데냐와 튀니스 반군의 특사로 가장한 두 배우를 내세워서 카르타고군이 전우들을 거짓 사면으로 유인한 뒤 몰살시켰다고 밝히게 했다. 이에 격분한 장병들은 보복을 요구했고, 마토스 등은 그때까지 잡혀 있던 기스코 등 700명을 끌어낸 뒤 손과 발을 절단하고 무릎을 부러뜨린 뒤 도랑에 던져 죽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카르타고 정부는 반군에 사절을 보내 기스코 등의 유해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반란군 측은 이를 거부하면서, 앞으로 카르타고에서 오는 모든 사절을 같은 방식으로 대하겠다고 위협했다. 하밀카르는 이 일에 극도로 분노해 관용 정책을 중단하고 사로잡은 반란군을 코끼리가 깔아뭉개거나 야수에게 잡아먹히게 했다. 폴리비오스는 이후로 누구도 평화를 논하지 않고 끝까지 서로를 해쳤다며, 전쟁의 명칭을 '휴전 없는 전쟁'이라고 칭했다.

카르타고 정부는 하밀카르에게 총사령관 자리를 넘겨주고 물러났던 한노를 재기용해 하밀카르와 협력하여 반란군을 섬멸하게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우티카 인근에 각자 따로 주둔한 뒤 사사건건 마찰을 벌였고 서로를 도우려 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 상황은 극적으로 악화되었다. 엠포이아에서 보급품을 가져오던 수송 함대가 폭풍으로 인해 침몰했고, 우티카와 히포 아크라 시에서 반란이 일어나 페니키아 수비대가 몰살당하고 반란군에 넘어갔다. 카르타고 정부는 이대로 가면 답이 없다고 판단하고 군대에 하밀카르와 한노 중 누구를 총사령관으로 삼을 지를 정하게 했다. 그 결과 하밀카르 바르카가 단독 사령관으로 선출되었고, 정부는 또다른 하밀카르의 아들이자 1차 포에니 전쟁에서 참전했던 한니발을 하밀카르의 부관으로 선임했다.

그 사이, 스펜디오스와 마토스는 대규모 반군을 이끌고 카르타고를 육상에서 봉쇄했다. 그들은 해군이 없었기 때문에 카르타고가 해상에서 보급품을 받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러나 성벽 앞에서 반군이 자리잡은 상황은 카르타고 시민들에게 공포심을 안겨줬다. 이에 하밀카르는 유격부대를 출격시켜 반란군의 보급로를 급습했고, 반군은 곧 식량난에 시달렸다. 이에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한 끝에, 스펜디오스가 하밀카르의 군대를 상대하는 사이에 마토스는 카르타고를 계속 포위하기로 했다.

스펜디오스는 아우타리투스, 자르자스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출진해 하밀카르의 유격대를 몰아내는 데 성공하여 보급품이 그들 자신과 튀니스에 있는 동지들에게 도달할 수 있는 경로를 확보했다. 이후 스펜디오스의 군대가 진군하자, 하밀카르는 그들을 추격했다. 스펜디오스는 일부러 적 코끼리병과 기병대가 효과적으로 활약할 수 없는 험준한 고지대로 나아갔고, 자신들을 쫓는 하밀카르를 상대로 소규모 접전을 잇따라 벌였다. 그러면서 하밀카르를 협곡으로 유인한 뒤 포위섬멸하고자 했다. 그러나 하밀카르는 여기에 넘어가지 않고 나라바스의 누미디아 기병대를 활용해 반군의 진군 속도를 효과적으로 저지했고, 나중에는 그들을 앞질러 가서 진군로를 차단했다.

스펜디오스는 어쩔 수 없이 인근의 고개로 올라갔다. 이 고개 주변의 지형 윤곽선이 과 유사했기에, 폴리비오스는 "톱 전투"라는 명칭을 붙였다. 하밀카르는 반군을 효과적으로 포위해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반란군은 몇 주 동안 버텼고, 식량이 고갈되자 말을 잡아먹었고, 말이 없어지자 포로, 노예를 잡아먹었다. 그들은 마토스가 자신들을 구출하기 위해 오기를 희망하며 계속 버텼지만, 마토스는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어째서 그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하밀카르가 구원 요청하려는 반군 전령을 잡았거나 한노 휘하의 카르타고군 10,000명과 대치하느라 움직이지 못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상황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자, 반란군 장병들은 스펜디오스 등에게 하밀카르와 재협상하라고 위협했다. 스펜디오스는 어쩔 수 없이 아우타리투스, 자르자스 및 부관들과 함께 고개 아래로 내려가 협상을 시도했지만, 하밀카르는 이들을 전원 체포한 뒤 코끼리를 선두에 내세운 전 병력을 동원해 지도자도 없고 굶주린 반군을 공격했다. 반란군은 대부분 살해되었고, 항복한 이들은 모두 코끼리 발 아래에 던져졌다. 마토스는 아군이 궤멸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즉시 튀니스로 퇴각했다.

기원전 238년 후반, 하밀카르는 튀니스로 진군해 포위했다. 이 도시는 동쪽과 서쪽에서 접근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하밀카르는 군대의 절반을 이끌고 남쪽에 주둔했고 부관 한니발은 나머지 절반을 이끌고 북쪽에 주둔했다. '톱 전투' 당시 사로잡힌 스펜디오스, 아우타리투스, 자르자스 등 반란군 지도자들은 튀니스에 잔존한 반란군이 보이는 곳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이에 마토스는 한니발의 진영을 향해 대규모 야간 기습을 감행했고, 이를 예상하지 못한 한니발은 숙영지를 잃고 30명의 유명 인사들과 함께 생포되었다. 그들은 심한 고문을 받은 뒤 스펜디오스 등이 박혔던 십자가에 못박혔다. 결국 하밀카르는 포위 공격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마토스는 토벌군을 격퇴한 뒤 식량이 고갈된 튀니스를 떠나 남쪽으로 160km 떨어진 부유한 항구 도시인 렙티스 파르바로 향했다. 카르타고 정부는 튀니스에서 참패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하밀카르에게 한노와 지휘권을 공유하라고 강요했고, 하밀카르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그 후 하밀카르와 한노는 25,000명 이상의 병력과 많은 전쟁 코끼리를 이끌고 반군을 추격했다. 이어진 전투에서 반군은 궤멸되었고, 마토스는 체포된 후 카르타고로 보내진 뒤 가혹한 고문을 받은 후 처형되었다. 이후 대다수 도시들은 카르타고의 지배를 받아들였지만, 우티카와 히포 아크라는 계속 저항했다. 한노와 하밀카르는 이들을 포위 공격한 끝에 항복을 받아낸 뒤 막대한 배상금을 매겼다. 그 후 두 장군은 반란군 편에 섰던 누미디아 부족에 대한 보복 공세를 가해 수많은 이들을 학살했다.

4. 이후

아프리카의 용병 전쟁을 종결지은 뒤, 카르타고 정부는 사르데냐의 반군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사르데냐의 용병 반란군은 곧 토벌대가 들이닥칠 것을 직감하고 로마 정부에 사르데냐를 점령하고 자신들을 보호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던 기원전 237년, 용병들의 압제에 분노한 사르데냐 주민들이 봉기를 일으켜 용병들을 모조리 쫓아냈다. 용병들은 이탈리아로 피신한 뒤 로마에 사르데냐를 점령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로마 내에서 이참에 사르데냐와 코르시카를 자국의 영역으로 삼자는 의견이 대두되었고, 이들의 의견이 관철되면서 로마군이 사르데냐에 진주했다.

카르타고 정부는 자국의 영역에 군대를 진주시킨 로마의 행위에 항의했지만, 로마 정부는 사르데냐인들의 보호 요청을 받아들였을 뿐이며 조약에 적시된 "추가로 양도해야 하는 섬"에 사르데냐가 들어갔을 뿐이라고 답했다. 기원전 235년, 카르타고는 해군을 파견해 사르데냐를 탈환하려 했다. 이에 당해 집정관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가 카르타고 해군의 접근을 막고 사르데냐 주민들의 반란을 진압했다. 이후 로마는 카르타고가 자국의 정당한 영역을 침범하려 했다는 이유로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위협했다. 용병 전쟁으로 인해 국력이 쇠진해지면서 로마에 대적할 여력이 없었던 카르타고 정부는 결국 로마가 사르데냐, 코르시카를 가지는 것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1200달란트의 배상금을 추가로 지불해야 했다.

제1차 포에니 전쟁으로 시칠리아를 상실한 데 이어 사르데냐와 코르시카마저 상실한 카르타고는 지중해 해상권을 거진반 박탈당해 막대한 무역 손실을 입었고, 카르타고 시민들의 로마에 대한 증오심은 증폭되었다. 제1차 포에니 전쟁 당시 로마와의 전쟁을 끝까지 지속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애초부터 로마에게 적대적이었던 하밀카르 역시 로마에 대한 증오심을 불태웠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 등 대부분의 로마 작가들에 따르면, 하밀카르는 카르타고의 활로를 열기 위해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하기로 마음먹고 출진하기 전에 9살된 장남 한니발 바르카를 신전으로 데려가 평생 동안 로마를 적대할 것을 맹세하게 했다고 한다. 그 후 하밀카르 바르카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세력을 급속도로 확장하며 자신을 비롯한 바르카 가문에 충성하는 사병대를 육성했고, 한니발 바르카는 아버지가 일궈놓은 군대를 이끌고 제2차 포에니 전쟁을 감행했다.
[1] 하밀카르는 에릭스 산 전투 당시 적지에서 고립된 것에 불안감과 불만을 품은 용병들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자 이들을 달래기 위해 전쟁이 끝나면 상당한 보상을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2] 나라바스는 훗날 하밀카르의 딸과 결혼했다. [3] 하밀카르 바르카 이전에 반란군 토벌을 맡았던 한노와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