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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군인.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에서 활약했다.2. 일생
2.1.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요시프는 1714년 3월 4일 크로아티아의 트라코스칸 성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이반 5세 안툰이고 어머니는 브란드시 백작 부인 마리아 카타리나였다. 요시프는 1734년 20세의 나이로 오스트리아군에 입대하였지만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이전까지 구체적으로 어떤 경력을 쌓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초창기인 1741년 10월 30일, 오스트리아 정부는 이그나즈 백작 포가흐에게 헝가리 보병 연대의 증강을 승인했다. 이에 따라 헝가리 보병 연대가 소집되었는데, 요시프는 소령으로서 이 중 3대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포가흐 보병 연대는 1741년 12월에 모라비아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접수하고 이동을 개시했다. 요시프의 3대대 역시 연대를 따라 이동했으나 4주 후에야 무기를 보급받았다.1742년 3월, 요시프가 이끄는 3대대는 브룬 방위전에 참여했고 3월 14일 프로이센군과 교전을 벌이고 있던 아군 후사르 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180명의 대원들을 이끌고 달려와 프로이센군을 격파하고 트루치세스 장군을 생포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후 포가흐 보병 제1,2 대대는 그해 5월까지 바이에른에 있는 케빈휠러 백작의 군단에 합류했고, 제3 대대는 1744년까지 수비 임무를 맡았다. 이에 불만을 품은 요시프는 전쟁 평의회에 자신을 전선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1743년 7월 마침내 야전 대대에 합류하는 것을 승인받은 그는 야전에 투입된 포가흐 보병 연대와 합세하여 10월 바이에른의 잉골슈타트 포위전에서 활약해 세인들의 이목을 끌었다.
1744년, 요시프는 라인강 일대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베렌클라우 사단에 소속된 포가흐 보병연대와 함께 했다. 그해 7월 1일, 제국군이 라인강을 건널 때 선봉에 선 포가흐 보병 연대는 이후 몇차례 전투에 참가했다. 그러다가 프로이센군이 돌연 보헤미아를 침공하자,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 카를 알렉산더는 군대를 보헤미아 쪽으로 돌렸다. 이때 포가흐 연대는 프랑스군의 추격을 막기 위해 후위에 남겨진 막시밀리안 율리시즈 폰 브라운 장군의 군단에 배속되었고 8월 23일 프랑스군과의 전투에 참가했다. 요시프 소령은 이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내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 후 연대는 잉골슈타트 수비대에 배속되었고 드라슈코비치는 중령으로 진급했다.
1745년 초, 요시프는 추가 헝가리군을 모집하는 임무를 맡은 니콜라우스 요제프 에스테르하지 장군 밑에서 복무했다. 그는 5월 중순까지 동부 모라비아의 리히텐라우 수비대(민병대 800명)를 지휘했고, 이후 본국으로 후퇴하는 프로이센군을 추격해 교란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5월 22일 새벽 3시, 프로이센군 6천 명이 야게른도르프에서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때 모케른 근처에 배치되어 있던 크룰 장군 휘하의 오스트리아군이 적을 향해 대포 12문을 발사했다. 프로이센군은 300대의 보급 마차를 포기해야 했지만 간신히 돌파하여 모케른 마을에 이르렀다. 얼마 후, 정규 보병 4개 대대와 에스테르하지의 헝가리군이 이들을 습격했다. 프로이센군은 전 기병대를 투입해 오스트리아 정규 보병 4개 대대를 패주시켰지만, 작센 고타 드래곤 분대가 후사르 부대의 지원에 힘입어 반격에 나서 프로이센 기병대와 사투 끝에 격퇴시켰다.
5월 23일 새벽 3시, 프로이센군은 네우스타트로 퇴각했고 요시프의 민병대가 그들을 바짝 추격했다. 당시 에스테르하지 장군은 더이상 프로이센군을 추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오직 요시프의 민병대만이 렙슈투츠까지 진격했다. 5월 25일, 프로이센군은 네우스타트를 포기하고 프랑켄슈타인 근처로 이동해 그곳에서 자신들을 추격해온 요시프 민병대와 대치했다. 뒤늦게 본군이 함께 추격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요시프는 물러났고, 이후 보헤미아에서 겨울 숙영에 들어갔다가 12월 25일 프로이센과의 평화 협정이 체결된 후 포가흐 보병대와 함께 이탈리아로 보내졌다. 같은 해, 요시프는 주산나 말라틴스케 델 펠소 남작부인과 결혼했다.
1746년 6월 16일, 포가흐 보병대는 프랑스-사르디니아 연합군을 상대로 한 피아첸차 전투에 참가했고 제노바 공략전에서도 활약했다. 또한 1746년 11월부터 1747년 2월까지 프로방스에서 벌어진 전역에 참가했고, 이후 프란츠 레오폴트 폰 나르다시 장군의 경기병대에 배속되어 제노바군이 방어하고 있던 캄포 프레도 공방전에 참석했으나 패배를 면치 못했다. 이 전역 동안 요시프는 그렌저 1개 대대와 척탄병 2개 중대 규모의 분견대를 지휘했고 2월 17일 나르다시 군단의 퇴로를 지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 후 1748년 1월, 요시프는 요제프 에스테르하지 보병 연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대령으로 진급했다. 그러나 본래 이 연대 대리 지휘관을 맡았던 베시 중령이 자신이 아닌 이탈리아에 있던 크로아티아 출신 인사가 지휘관으로 기용된 것에 불만을 품고 사표를 제출하는 등 잡음이 일었다. 이에 요시프는 베시와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눴고, 베시는 몇 달 만에 마음을 고쳐먹고 그를 지휘관을 인정하기로 했다.
이후 평화 협정이 체결되어 전쟁이 끝나자, 요시프는 크로아티아에 있는 그의 소유지로 돌아갔다가 1750년 12월 부다에 있는 스트룸 장군의 참모진에 합류하라는 지시를 맡고 그곳에서 헝가리 민병대를 모집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에 그는 그곳으로 가면서 요세프 에스테르하지 보병대 사령관직을 칼노키 백작에게 양도했고 1753년 5월 8일 소장으로 진급했다.
2.2. 7년 전쟁
7년 전쟁이 시작된 1756년 9월, 요시프는 뷰단의 진영에서 여단을 지휘했다. 이 여단은 국경 수비 보병대 2개 대대, 칼스테트터-뤼카너 그렌저 1개 대대로 총 3,916명으로 구성되었다. 10월 1일 로보지츠 전투에서, 요시프의 그렌저 대대는 훨씬 많은 프로이센군에 맞서 몇 시간 동안 로보지츠의 고지를 방어했다. 이때 당시 무명이었던 에른스트 기데온은 요시프의 밑에서 싸웠다. 이후 1757년 5월 6일, 요시프는 4개의 그렌저 대대르 이끌고 프라하 전투에 참가했다. 그는 최선을 다해 적과 맞섰으나 브라운 원수가 불의의 부상을 입은 뒤 오스트리아군이 격분하여 적을 무질서하게 추격하는 것에 휩쓸리다가 프로이센군에게 측면을 요격당하는 바람에 막심한 피해를 입고 프라하로 피신했다. 그 후 프라하 수비에 임하던 요시프는 6월 18일 콜린 전투에서 패한 프로이센군이 보헤미아에서 철수하자 그 뒤를 추격했다.1757년 7월, 요시프는 그렌저 500명과 후사르 200명을 이끌고 슈레켄슈타인 성을 점거한 프로이센군을 공격해 7월 27일 장교 7명과 병사 260명을 포로로 생포하는 전공을 거두었다. 곧이어 9월 7일에는 국경 수비 보병연대를 이끌고 모이 전투에 참가해 오스트리아군의 승리에 일조했다. 1758년 2월 10일, 요시프는 그동안의 전공을 인정받아 중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그는 올로모우츠 요새에 배치된 제1 보병여단 2,800명을 지휘했다. 그러다가 프로이센군이 5월 4일 올로모우츠 요새를 포위하자, 그는 수비대를 이끌고 7월 2일까지 적군에 맞섰다. 특히 6월 12일 밤에 야음을 틈타 550명의 병사들과 100명의 공병들을 이끌고 적진을 기습해 대포와 곡사포 18문을 못으로 박고 수많은 나무 다발과 참호 일부를 파괴하는 데 성공했다. 그 후 프로이센군이 올로모우츠 요새 포위를 풀고 철수하자, 요시프는 빈으로 가서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승리를 보고하는 임무를 맡았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의 공로에 보답하기 위해 12월 4일 마리아 테레지아 기사 십자 훈장을 수여했다.
1760년, 요시프는 슐레지엔을 침공할 오스트리아군에 배속된 8,000명의 군단을 지휘했다. 1760년 7월 프로이센군이 드레스덴을 포위하자,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 휘하 오스트리아 주력군이 이를 격퇴하기 위해 진군했다. 한편 라우돈 남작 에른스트 기데온은 요시프에게 글라츠 요새를 함락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때 이 포위 작전의 책임은 아마데우스 백작 하르쉬에게 있었는데, 하르쉬는 포위전 도중 여러 차례 갈등을 빚었다. 결국 견디지 못한 요시프는 7월 23일 지휘권을 하르쉬에게 넘겨주고 일선에서 물러났고, 글라츠 요새는 7월 26일에 함락되었다. 이후 1761년 요시프는 자신의 군단을 이끌고 상부 슐레지엔과 북부 모라비아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그의 주요 상대는 프로이센 기병대 지휘관 한스 요아힘 폰 치텐이었다. 두 군대는 야겐도르프를 중심으로 수차례 소규모 접전을 치렀다.
1762년 6월 말, 프로이센군이 시비드니차 요새를 포위하자, 요시프는 이를 구원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나 불행히도 하이더스도르프 근처에서 적에게 붙들려 포로로 전락했다. 이후 1763년 2월 후베르투스부르크 평화 협약이 체결되면서 7년 전쟁은 종식되었고 요시프는 풀려나 오스트리아로 돌아가 2월 28일 육군 대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요시프는 트란실바니아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나 2년 만인 1765년 11월 9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51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