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몰년도 미상
1. 개요
통일신라 말기의 인물. 유학자이자 은자로 대야주(大耶州)[2]에 은거하고 있었다. 888년 신라의 정치를 비난하는 벽서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어 도성의 감옥에 갇혀 처형 위기에 놓였다.南無亡國 刹尼那帝 判尼判尼蘇判尼 于于三阿干 鳧伊娑婆訶
나무망국 찰니나제 판니판니소판니 우우삼아간 부이사바하
나무망국 찰니나제 판니판니소판니 우우삼아간 부이사바하
삼국유사에는 이걸 '국인'[3]들이 지은 것이라고 했지만 누가 지었는지는 모른다. 삼국유사의 말마따나 불경의 다라니를 그럴 듯하게 비틀어서
나라가 망하리라.
여왕과 두 소판
서너 명의 아간들이
부호 부인이 망치리라.
여왕과 두 소판
서너 명의 아간들이
부호 부인이 망치리라.
라는 뜻을 담은 것이었다고. 어찌 생각하면 세로드립 내지 패러디의 원조라고 할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이 다라니 형식의 벽서가 나돌자 범인으로 대야주의 은자 왕거인을 지목해 옥에 가두었다고 한다. 물론 왕거인은 이에 대해서 억울하게 옥에 갇혔다고 나오니 왕거인이 정말 진범이었는지도 알 길이 없다. 왕거인이 정말 범인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불교가 국교나 다름없는 시대에 불교의 다라니를 빌려다 왕실에 반발했다는 점에서 예사로 볼 일은 결코 아니었다. 단순한 정치적 행위를 넘어서 왕실과 결탁한 불교 세력에 대한 지방민들의 반발과 분노 또한 담겨 있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대야주 즉 합천은 해인사 즉 진성여왕과 연이 깊은 사찰이 존재하는 지역이라는 점, 그리고 그 해인사가 신라 말기 왕실과 유착한 불교의 폐단[4]의 상징이 되어 있었음을 지적한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백 번을 양보해서 왕거인이 정말 벽서 사건의 진범이라고 해도, 국정에 대해서 쓴소리했다고 잡아 가둬 버리는 처사가 결코 온당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옥에 갇힌 왕거인은 다음과 같은 글을 지었다고 한다.
우공(于公)이 통곡하자 3년간 가물었고于公慟哭三年旱[5]
추연(鄒衍)이 슬픔을 품으니 5월에 서리가 내렸는데鄒衍含悲五月霜
지금 나의 근심을 돌이켜보면 옛날과 비슷하건만今我幽愁還似古
황천은 말이 없고 단지 푸르기만 하구나皇天無語但蒼蒼.
- 삼국사기에 기록된 거인의 시
추연(鄒衍)이 슬픔을 품으니 5월에 서리가 내렸는데鄒衍含悲五月霜
지금 나의 근심을 돌이켜보면 옛날과 비슷하건만今我幽愁還似古
황천은 말이 없고 단지 푸르기만 하구나皇天無語但蒼蒼.
- 삼국사기에 기록된 거인의 시
연단(燕丹)[6]이 우니 무지개가 해를 꿰었고燕丹泣血虹穿日,
추연이 슬퍼하자 여름에 서리가 내렸네鄒衍含悲夏落霜,
지금 내가 길을 잃음이 오히려 옛 일과 같은데今我失途還似舊,
하늘은 무슨 일로 상서로운 일을 내리지 않나皇天何事不垂祥.
- 삼국유사에 기록된 왕거인의 시
추연이 슬퍼하자 여름에 서리가 내렸네鄒衍含悲夏落霜,
지금 내가 길을 잃음이 오히려 옛 일과 같은데今我失途還似舊,
하늘은 무슨 일로 상서로운 일을 내리지 않나皇天何事不垂祥.
- 삼국유사에 기록된 왕거인의 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인용된 시는 조금씩 내용이 다른데, 청나라에서 당시(唐詩)를 망라해 집대성한 《전당시》에서는 삼국사기에 실린 원문을 참조해 실었다.
그날 저녁 구름과 안개가 덮이고 우박이 떨어지자 진성여왕이 두려워하면서 거인을 풀어줬다고 한다. 이를 보면 실제 범인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정말 왕거인이 범인이었다 해도 쓴소리했다고 잡아 가두는 폭압적인 신라 조정의 모습에 대한 비판이라는 주제는 변함이 없다.
2. 기타
김부식의 삼국사기 열전에서 박인범, 원걸, 김운경, 김수훈 등과 함께 묶여서 나온다. 다만 이들의 행적이 역사 기록에 남아있지 않았다면서 전기를 못세웠다고 나오고 끝. 그나마 이름만 언급되고 언제 활동했는지 알 수 없는 인물들에 비하면 나은 편이다.왕거인의 사건 이후 신라는 원종과 애노의 난( 889년) 이후 후삼국시대로 들어서게 된다.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1918년생으로 촬영 당시 81세였던 원로배우 장인한[7]이 이 인물을 맡아 출연했다. 여기서는 신선 비스무리한 존재로 나오며 감옥에 갇혀있다가 도선이 일으킨 비바람 속에 홀연히 사라진다.
[1]
삼국사기에는 거인(巨仁), 삼국유사 거타지조에서는 왕거인(王巨仁)으로 등장한다.
[2]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이다.
[3]
직역하면 '나랏사람'이지만 일반 백성이 아니라 어느 정도 세력을 가지고 정치에 참여하여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배층을 가리킨다.
[4]
해인사는 애장왕 때에 창건된 이래로 헌강왕 때에 이르면 막대한 토지를 기진받아 인근 지역을 그들의 '장원'으로 거느린 재벌 사찰이었다. 최치원의 해인사 선안주원벽기는 해인사 치군(승병)들이 초적들과 맞서다 죽은 것을 위령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해인사가 신라 말기 초적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음을 암시한다.
[5]
중국의 설원 및 수신기에 나오는 이야기로, 우공은 중국 전한 때의 동해군이라는 곳의 옥리였다. 동해군에는 주청(周靑)이라는 여자가 자기 시어머니를 10년 동안 정말 극진하게 봉양하였는데, 며느리가 자신 때문에 고생한다는 것에 미안해하던 시어머니는 결국 목을 매어 자결해 버렸고, 사정을 모르던 시누이가 주청이 시어머니를 죽였다고 관에 고발했다. 관에서는 시누이 말을 믿고 주청에게 모진 고문을 가해 끝내 주청은 거짓으로 죄를 시인했지만, 우공만큼은 주청의 결백을 믿고 태수에게 간언했고 태수는 듣지 않고 주청을 사형에 처했다. 우공은 주청에게 떨어진 사형 판결문을 끌어안고 관아에서 통곡한 뒤에 떠나버렸는데, 그뒤 동해군에는 혹심한 가뭄이 들어 3년 동안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다. 신임 태수가 부임했을 때 우공은 태수를 찾아가 지금의 가뭄은 전임 태수가 죄 없는 사람을 잘못 판결해 죽게 해서 생긴 변고라고 직소, 그 신임 태수는 우공의 말대로 주청의 무덤에 제를 올리고 생전 효행을 기리는 표지를 세웠는데, 놀랍게도 그 즉시 비가 쏟아져 그해 동해군에 대풍년이 들었다는 얘기. 수신기에는 주청이 죽임을 당하던 날 사형장에 세워져 있던 장대를 가리키며 "내가 결백하다면 내 피가 저 장대까지 치솟을 것이다"라고 절규했는데, 주청이 죽자 주청의 몸에서 나온 청황색 피가 10길이나 되는 장대를 거슬러 올라가 끝에 매달린 깃발까지 적셨다고 한다.
[6]
연나라 태자
희단을 말한다.
형가를 보내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던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7]
1996년 KBS 대하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이방원의 스승
원천석 역. 드라마 출연 목록에는 장인환이라고 오타가 나 있으며, 이후
공산 전투 당시의 승려 역할로 한 번 더 출연했다. 2007년 8월 21일에 향년 88세를 일기로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