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陣法. 우리나라에는 총 두 종류의 진법이라 이름붙은 병서가 있다.2. 정도전의 진법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진법(정도전)조선 건국 초기 정도전(鄭道傳)이 저술한 병서. 현재 원본은 전하지 않지만 대신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집(三峯集) 권13에 책의 내용들은 전해져오고 있다.
구성은 크게 총술(總述), 정진(正陣), 결진십오지도(結陣什伍之圖), 오행출진가(五行出陣歌), 기휘가(旗麾歌), 각경가(角警歌), 기정총찬(奇正總讚), 금고기휘총찬(金鼓旗麾總讚), 논장수(論將帥), 무사졸오혜(撫士卒五惠), 용군팔수(用軍八數) 등 각 1편, 삼암(三闇), 삼명(三明) 등 16편이 있다.
끝에 첨가된 진형도(陣形圖)는 문종 때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명편한 아래의 진법에 그대로 옮겨져서 전하여 오고 있으나, 도본이나 결진방법이 일부 손실되어 전하지 않고 있는 부분도 있다.
3. 문종과 수양대군의 진법
조선 초기 오위진법의 기본 진(陣)의 모습인 곡(曲-구부러진형)․예(銳-뾰족한형)․직(直-직선형)․방(方-사각형)․원(圓-원형)진. 보통은 일위 독진이라 해서 한 개의 위가 이러한 진을 형성한다. 이중 기주(騎駐)와 보주(步駐)는 진에 머무르고, 기전(騎戰)과 보전(步戰)이 전투를 하게 된다.
오위진법 일위방진 세부모습
오위진법에서 오위가 함께 방진(方陣)을 구축하는 오위연방진(五衛連方陣). 가장 안정적인 진법으로 외각에 있는 여덟 개의 문으로 군사들이 이동하게 된다. 사진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진법(수양대군)
두산백과 진법
정도전이 저술한 위의 진법과의 구분을 위해 오위진법이라고도 한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문종 1년(1451), 당시 수양대군(首陽大君)이던 세조가 육전의 진형을 모은 병서. 책의 첫머리에 수양대군이 직접 지은 서문이 있고 권말에는 한계희와 홍귀달(洪貴達)의 발문이 있다. 당시 왕이었던 문종을 존중하기 위해 문종 편(編)이라 적혀 있으나 실제 책의 저술과 편찬은 서문까지 지은 아우 수양대군이 대부분 주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일단 공식적으로는 문종과 수양대군의 공동저작물이다.
문종 1년(1451)에 초간본이 간행되었으나 그 내용이 충분하지 못하여 세조 즉위 후 두 차례 내용이 증보된다.
원문은 크게 분수(分數), 형명(形名), 결진식(結陣式), 일위독진(一衛獨陣), 합진(合陣), 오위연진, 용병(用兵), 군령(軍令), 장표(章標), 대열의법(大閱儀法)과 용겁지세(勇怯之勢) 3편, 승패지형(勝敗之形) 3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형명도(形名圖)로 교룡기(交龍旗), 초요기(招搖旗), 위장기(衛將旗), 부장기(部將旗), 대각(大角), 금(金), 고(鼓) 등 32종의 그림과, 진도인 하도(河圖), 낙서(洛書), 곡진도(曲陣圖), 총진도(銃陣圖) 등 그림 7개, 오위도인 오위연방진(五衛連方陣), 오위연직진(五衛連直陣) 등 그림 5개가 있다.
문종 때 5사(司)가 성립되고 세조 3년(1457) 5사가 5위(衛)로 개편, 최고 군령기관으로 오위도총부가 마련된다. 따라서 오위진법의 탄생은 조선 전기 중앙군사조직의 골격을 만드는 과정에서 나왔으며 이후 새롭게 탄생한 오위의 부대편성과 군사훈련을 체계적으로 진행하는데 중요한 병서였다.
3.1. 1차 간행본
문종 1년(1451) 간행본. 수양대군의 서문에 따르면 태조, 태종, 세종대에 수집된 진설의 내용들을 수정 보완해 만든 진법서이고, 한계희의 발문에서는 문종과 수양대군이 함께 연구, 편찬한 책이라고 밝히고 있다.3.2. 2차 개정본
세조 원년(1455) 7월에 세조가 내용을 개정하고 각종 진법도와 그림을 삽입한 본. 작은 활자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소자진서라 부른다. 집현전 직제학 이개, 한계희가 음과 주석을 덧붙이고 한종손, 김교가 기존에 없던 형명도(形名圖)와 진도 등 각종 그림을 그려넣었다.3.3. 3차 개정본
세조 5년(1459)에 세조가 다시 한번 보완, 교정한 본. 큰 활자로 인쇄되어서 대자진서라 부른다.3.4. 최종 완성본
성종 23년(1492)에 대자진서와 소자진서를 하나의 책으로 통합해 편찬한 본. 우리가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오위진법이 바로 이것이다.3.5. 의의
이전의 진법과 다른 면모를 보이는 오위진법은 조선 초기 진법의 완성이자 조선 고유 진법의 확립을 의미했다. 그러나 5위 조직이 15세기 후반부터 균열의 조짐을 보이면서 이후 유용한 교범이 되지 못했다. 2류 병서 취급을 받았으며 특히 임진왜란 이후로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적극 수용하면서 오위진법은 사장됐다.그러다가 조선이 청나라에 크게 패배한 병자호란 이후에 다시 오위 복귀론이 제기된다. 북방의 기병부대에 맞설 방어 전략이 강력히 대두되면서 보병부대의 진법에 대한 중요성이 다시금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오위진법은 다시금 조선 고유의 진법 체계로서 주목받았고, 연병지남, 단구첩록과 같은 여러 병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영조 18년(1742)에 병장도설이라는 이름으로 복각되었다. 이후 영조 25년(1749) 다시 영조의 명으로 병장도설의 체제를 본떠 중앙군의 진법, 조련, 편성, 기구를 종합해서 후편격인 속병장도설이 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