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5 22:37:12

연운 16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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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한족 | 사타족
지리 연운 16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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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yeonun16.jpg
연도에 오타가 있는데 서기 1936년(...)이 아니라 서기 936년이다. 1936년 직후에 일본군이 일대를 점령하긴 한다.. 모주 역시 막주가 올바른 한자 표기법이다.
1. 개요2. 배경3. 가치4. 같이보기5. 기타

1. 개요

燕雲十六州

5대10국 시대 후진의 건국자인 석경당이 936년 요나라에 군사 원조를 요청하며 후당을 멸망시키고 그 대가로 바친 화북의 16개 주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연운 16주라는 명칭은 이 16개 주 중 대표 지역인 연주(燕州, 지금의 베이징)과 운주(雲州, 지금의 산시성 다퉁)에서 따온 것으로 16개 주의 위치는 아래 표와 같다. 유연(幽燕) 16주, 연유(燕幽) 16주라고도 한다.
유주(幽州)
연주(燕州)
베이징시 시청구
순주(順州) 베이징시 순이구
단주(檀州) 베이징시 미윈구
유주(儒州) 베이징시 옌칭구
계주(薊州) 톈진시 지저우구
영주(瀛州) 허베이성 창저우시 허젠시
막주(莫州) 허베이성 창저우시 런추시
탁주(涿州) 허베이성 바오딩시 줘저우시
신주(新州) 허베이성 장자커우시 줘루현
규주(媯州) 허베이성 장자커우시 화이라이현
무주(武州) 허베이성 장자커우시 쉬안화구
울주(蔚州) 허베이성 장자커우시 위현
운주(雲州) 산시성 다퉁시 청구
응주(應州) 산시성 숴저우시 잉현
환주(寰州) 산시성 숴저우시 동
삭주(朔州) 산시성 숴저우시 숴청구

2. 배경

후당의 황제, 이종가(李從珂)는 하동절도사였던 석경당과 사이가 매우 나빴다. 이종가가 석경당을 좌천시키고 숙청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석경당은 본거지인 진양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반란을 일으키자마자 이종가는 수만의 군대를 보내 토벌하려 들었다. 다급해진 석경당은 거란 황제에게 원군을 요청하자는 상유한(桑維翰)의 간언을 채택했다. 그런데 석경당이 너무 지나쳐서 문제였다.

"거란 황제를 어버이로 섬기고 북방의 16주를 할양할 테니 군사원조를 부탁드립니다"라는 사신을 보내려 하자 측근인 유지원마저 극구 만류했지만 석경당은 끝내 연운 16주를 바치고 거란 원군 5만의 힘으로 후당을 멸망시키고 후진을 건국했다.

3. 가치

우리나라 백제 강역보다 조금 큰 수준으로, 중국 전토에 비하면 그리 크고 아름다운 땅덩이는 아니지만, 북방 이민족 국가-중국 사이에 놓인 연산 산맥의 사이사이에 형성된 도시들이 많아, 만리장성 이남의 극도로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던 곳이다. 중국사에서 만리장성은 근대 이전까지 절대 뚫리지 않은 난공불락의 방벽이었다. 중원을 지배한 거란, 여진, 몽골 역시 만리장성을 돌아서 공략했지 정면에서 무너뜨린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 연운 16주가 모두 만리장성 남쪽에 위치했으니 알아서 요나라에 대문을 열어준 셈.[1] 연운 16주를 차지하면, 큰 산맥이나 하천 같은 지리적 장애물은 사라지고, 바로 화북 평야지대로 진입해 전쟁을 수행할 수 있게 되기 때문. 한족 입장에서 석경당은 사실상 이민족의 중원 관광을 이끌어낸 장본인이다. 당사자는 사타족인데

게다가 연운 16주는 이미 개발이 수백 년 동안 진행된 도시들로[2] 이곳을 차지하면 수백만 명의 인구와, 농업생산력 및 기타 산업기반을 새로이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요나라가 이 16주에 서경 남경[3]을 둘 정도였으니 말은 다한 셈. 그래서 결국 기존의 소규모 농업, 수렵, 목축에 기반했던 요나라 금나라는 이곳을 기반으로 국력을 키워서 중앙집권체제의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이 나비효과는 고려에도 미쳤는데 고려는 후삼국 통일 후 아직 불안정한 와중에도 여세를 몰아 발해 유민세력을 흡수하면서 요동을 되찾기 위해 북진을 시도했지만 연운 16주를 획득해 세력을 크게 키운 요나라가 정안국을 비롯한 발해 잔존세력과 여진족을 쳐부수며 고려가 압록강에 다다르기도 전에 급격하게 동진을 하는 바람에 평안북도 일대의 청천강을 양국의 국경으로 삼게 된다. 기가막힌 게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것도 936년, 요나라가 연운 16주를 획득한 것도 하필 딱 936년이다. 이후 고려는 서희의 담판 덕에 강동 6주까진 획득해서 어찌어찌 압록강을 국경으로 삼게 되긴 하지만 이어진 2, 3차 여요전쟁에서 요나라는 원래 있던 유목민족의 기병전력에다 연운 16주에서 비롯된 막강한 물량을 쏟아내는 위용을 보여 고려는 북진은커녕 항상 수세에 몰렸으며 이 때문에 고려의 북진은 크게 좌절된다.

당연하지만 연운 16주의 가치를 잘 알고 있던 한족계 중원 왕조 역시 연운 16주를 되찾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959년 요나라 원정에 나선 후주 세종이 요나라 군을 격파하고 최남단 막주와 영주, 2개 주를 되찾았고[4] 여세를 몰아 유주(연주) 공략에 나섰으나 병이 깊어져 병사했다. 후주의 뒤를 이은 북송은 중원을 통일하고 남은 14개 주 수복을 위해 요나라와 수 차례의 전쟁을 벌였지만[5] 별다른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그러다 북송이 여진족 금나라와 동맹을 맺어서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14주 중의 연주 5주를 잠시나마 돌려받아 연산부(燕山府)를 설치하기도 했지만 이것도 전적으로 금나라의 군사력에 의지한 것이었기 때문에 얼마 못 가서 다시 금나라의 침공으로 빼앗긴다. 결국 연운 16주는 ( 한족계 중원 국가 기준으로) 400년 뒤 주원장 원나라를 몰아내고 명나라를 세울 때까지 찾지 못했다.

4. 같이보기

5. 기타

요가 망해가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6], 연운 16주의 통치는 안정적이었다. 그리고 오랜 요나라의 통치로 연운 16주의 한인들은 정체성이 달라져 북송을 한족의 본거지로서 본국이라고 인식하는 것이 사라졌고 다른 사람들로 간주했다고 한다. 동관이 이끄는 북송 군대[7]가 연경에서 패하자 연운 16주의 한인들과 북요 정권은 북송 사람들을 무시했다.


[1] 훗날 청나라는 만리장성을 넘기는 넘었으되 공격하여 뚫은 것이 아니라 이자성의 난 당시 혼란 중에 오삼계 산해관을 열어줘서 들어간 것이다. 만리장성이 정말 무력으로 뚫린 사례로는 열하사변 당시 일본군이 유일하고, 이마저도 현대전, 그것도 폭격까지 동원해서야 간신히 뚫을 수 있었다. 항공대의 지원이 없었던 회봉구 전선의 경우 일본군이 역으로 털렸을 정도니 뭐(...). [2] 일례로 탁주는 삼국시대부터 이민족을 막는 거점이었으며(※ 유비의 고향이기도 하다), 수나라, 당나라 시대에는 대운하의 북방 종점인 물류도시로 중시되었다. 수양제 양광이 고구려와 전쟁하기 위해 물자를 쌓은 곳도 이 탁주였다. [3] 오늘날 베이징. 다른 화북 지방에 비해 북방민족의 지배를 훨씬 일찍부터 오래 겪어서 그런지 만리장성 이남의 소위 중원 내지(內地)임에도 불구하고 호화(胡化)가 상당히 진전되어 후대 북방 정복왕조인 , , 나아가 의 수도가 되었다. 그래서 북경을 위시한 하북 지역은 지명, 식생활, 언어 등에서 북방의 영향을 많이 받아 양자강 이남은 말할 것도 없고 양자강 이북 ~ 황하 이남(산동, 하남, 안휘, 호북 등)과도 제법 차이가 있다. [4] 이후 북송은 영주에 하간부(河間府)를 두어 대요전선의 최전방 거점으로 삼았다. [5] 앞서 설명한 전략적인 이유도 있지만 또다른 이유가 있었는데 연운 16주에 속한 탁주가 바로 창업군주인 태조 조광윤의 본관이었다. 때문에 연운 16주는 조씨 황실 입장에서도 반드시 수복해야 할 지역이었다. [6] 당시 요는 금에 밀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7] 방랍의 난을 진압하고 막 올라온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