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엄준(嚴俊) |
생몰 | 1885년 ~ 1919년 4월 6일 |
출생지 | 경상남도 울산군 울산면 서리 |
사망지 | 경상남도 울산군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엄준은 1885년 생이며 경상남도 울산군 울산면 서리 출신이다. 그는 울산군에서 비밀 청년회에 가입해 독립운동의 방향을 모색하던 중 1919년 3월 서울에서 귀향한 한명조(韓命祚)와 이영호(李永浩)로부터 전국적으로 퍼지고 있는 3.1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고향에서도 4월 4일에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고 자신의 재산을 독립운동자금으로 기부했다. 이후 4월 3일 서리에 거주하는 박영하(朴永夏)와 권작지(權作支)의 집에서 비밀리에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이튿날의 거사에 대비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4월 4일 오전 9시경, 문성초(文星超)등 청년회 회원들로 주축을 이룬 독립만세 시위 군중은 병영국민학교에 모여 태극기를 꺼내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인근의 서리, 동리, 남외리, 산전리 등을 행진하며 시위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출동한 일본 경찰의 무력행사로 여러 사람이 검거된 후 해산하였다. 이에 그는 이문조(李文祚)·이종필(李鍾弼) 등의 동지와 함께 김세진(金世鎭)의 집으로 피신하여 이튿날 다시 거사하기로 계획하고 다른 동지들에게 연락하였다. 4월 5일 오후 3시, 다시 병영국민학교에 모인 대중은 "대한 독립 만세"라고 쓴 깃발을 앞세우고 인근지역을 행진하다가 일제 경찰주재소로 향했다.
이때 독립만세 시위군중이 1천여명에 이르러서 사태의 절박함을 느낀 일본 관헌은 급히 울산으로부터 13명의 군경을 증원 받아 시위군중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다. 결국 이문조 등 9명이 일본 군경에 의해 체포되자, 엄준은 군중의 선두에 서서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주재소에 투석했다. 이에 일본 군경은 시위군중에게 무차별 사격을 감행했고, 결국 그는 다른 동지 3명과 함께 피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엄준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