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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 | 엄주필(嚴周必, 嚴柱泌) |
출생 | 미상 |
함경북도 | |
사망 | 1920년 4월 7일 |
연해주 니콜리스크 | |
종교 | 개신교 ( 장로회) |
서훈 |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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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함경북도 사람이라는 것만 알려졌을 뿐 그가 연해주로 이주하기 전의 생애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1914년경 연해주로 건너간 그는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이갑, 최재형, 이동휘 등과 함께 반일운동을 전개했고, 기독교 장로회에서 집사를 맡았다. 1918년 6월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개최된 제2회 특별전로한족회대표회의에 니콜리스크 대표로 참석했고 전로한족중앙총회 검사원으로 선출되었다. 1918년 제3대 재류한인민단장에 선출되어 독립운동을 지도했으며, 1919년 1월말부터 2월 초까지 니콜리스크에서 개최된 지방대표원회의에 참석했고 최재형, 문창범, 한명세 등 다섯 명의 한인 지도자들과 함께 파리강화회의 대표를 뽑는 데 기여했다.1919년 오성묵, 한군면 등과 함께 <독립선언문>을 인쇄하고 태극기를 제작하여 1919년 3월 17일에 개최된 니콜리스크에서의 3.1 운동을 이끌었다. 이후 러시아 연해주와 간도에서 항일 빨치산 운동이 활발해지자 러시아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최재형, 김이직 등과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고 선포문을 인쇄하여 배포했다. 1920년 3월 14일 한인사회당총회에서 의사원으로 선출되었으나 1920년 4월 5~6일 일본군이 니콜르스크를 급습하면서 최재형, 김이직, 황경섭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엄주필 등은 1920년 4월 7일 오후 6시경 호송되던 중 김시인의 틈을 엿보아 탈출을 시도했지만 일본군의 추적을 받은 끝에 피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엄주필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