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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차 전국정치협상회의 부주석 | ||
정체 | 楊成武 | |
간체 | 杨成武 | |
한국식 독음 | 양성무 | |
영문 | Yang Chengwu | |
출생 | 1914년 10월 27일 중화민국 푸젠성 창팅현 장옥포 하여촌 | |
사망 | 2004년 2월 14일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 |
국적 |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png → 중화인민공화국 |
|
학력 | 장정현 제7중학교 졸업 | |
직업 | 군인, 정치가 | |
종교 | 없음( 무신론) |
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가. 1930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한 이래 홍군의 정치위원 및 군 간부로서 중일전쟁, 국공내전에 참여해 중국 공산혁명 달성에 한몫했으며, 1951년 6월 6.25 전쟁에 참전해 중국 인민지원군 제20병단 사령관으로 부임해 UN군 및 한국군과 여러 차례 교전했다. 이후 출세를 거듭하여 인민해방군 총참모장에 이르렀으나 1968년 '양여부 사건'에 연루되어 모든 직위를 박탈당하고 감옥에 갇혔다가 1974년 11월 말에 복귀했다.2. 생애
2.1. 초기 경력
양청우는 1914년 10월 27일 푸젠성 창팅현 장옥포의 어느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0년 6살 때 서당에서 공부했고 1923년 상항현 회룡장교회 소학교에 입학한 후 뒤이어 장정현 제1초등학교로 전입해 그곳을 졸업한 후 장정현 제7중학교에 입학했다. 그후 1928년, 양청우는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에 가입했다.1929년, 양청우는 민시(閩西) 농민 폭동에 참가해 중국 노농홍군에 입대하여 민시홍군 제3로군 지휘부의 비서가 되어 선전대 중대장으로서의 예우를 받았다. 또한 1930년에는 홍1군단 제4군 제3종대 간사를 맡았으며 같은 해에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상향(上杭) 전투, 지수이(吉水) 전투, 장수(樟樹) 전투, 원자스(文家市) 전투 등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1931년, 양청우는 홍4군 12사단의 비서로 부임했고 교도대 정치위원, 사정위 사무총장, 홍11사단 제32연대 정치위원 겸 중공 광창현(廣昌縣) 작전위 서기 등을 역임하며 국민혁명군의 초공작전에 맞서 싸웠다.
1933년 8월, 양청우는 중앙 홍군 편재 이후 홍2사단 제4연대 정치위원을 맡아 홍4연대를 용감하게 지휘해 녜룽전으로부터 '모범적인 정치위원'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또한 1934년 10월, 양청우는 대장정에 참여해 홍4연대를 이끌고 선두에 서서 수많은 역경을 치루며 홍군이 국민혁명군을 피해 안전한 곳으로 후퇴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35년 11월 대장정이 마무리 된 후, 양청우의 4연대는 우치진(吴起镇)에 도착해 섬북 지방의 홍군과 합류하여 현지 토벌대를 격파했다. 이후 양청우는 직라진(直罗镇) 전투에 참여한 뒤 1936년 1월 홍1사단 정치위원을 맡았으며 동정 전투에 참여했다. 같은 해 6월 홍군대학교 제1기 제1과에 편입되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공부했고 12월에 홍1사단 사단장에 부임했다.
2.2. 중일전쟁 시기
중일전쟁 발발 후, 양청우는 제 8국군 115사단장에 부임하여 평형관 전투에 참여해 일본군 200명을 사살했다. 이후 115사단 독립단은 산시군벌 옌시산과 협력하여 일본군을 상대로 게릴라 전술을 벌였다. 1937년 11월에 독립단이 제8 육군 제1사단으로 확장되어 1700여 명에서 7000여 명으로 증가했고, 양청우는 사령관 및 정치위원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진차지 군사지역이 설립되면서 그가 진차지 군사지역의 지휘관이 되었으며 이후 진차지 공산당 정치위원으로서 진차지 지역의 행정 업무를 맡았다.이후 그는 1937년 12월과 1938년 가을에 일본군의 진차지 군사지역에 대한 포위 공격에 맞서 싸웠으며 라이위안(涞源), 광링(广灵), 위현(蔚县) 등 7개 성을 수복했다.1939년 5월, 양청우는 용화(龍華) 전투에서 일본군의 기밀 문서를 대량으로 노획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그해 11월, 양청우는 황두링(黄土岭) 전투에 참전해 녜룽전의 지휘를 받으며 일본군 독립홍성여단 제2여단을 공격해 900명 이상의 적을 사상시키고 여단장 아베 노리히데 (阿部規秀) 중장을 사살했다. 또한 1940년엔 백단대전에 참여해 둥퇀보(東團堡) 공략을 달성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중일전쟁이 끝난 후, 양청우는 쑤이중(领冀中) 7, 8, 9 사단의 주력 부대를 이끌고 총 11개 연대를 조직해 기동종대로 삼고 이 군대의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2.3. 국공내전 시기
1946년 3월, 진차지 군구에서 부대를 재평성한 양청우는 7월 녜룽전의 지휘하에 다퉁(大同)-지닝(集寧) 전투에 참가했으나 푸쭤이(傅作義) 장군의 국민혁명군에게 패했다. 그후 그는 장자커우(張家口) 방어전, 이만(易滿) 전투, 정태(正太) 전투에 참가했으며 뒤이어 녜룽전이 지휘하는 청창(青滄) 전역에 참전했다.1947년 5월, 양청우는 진차지 군구 제1야전군 기동종대 사령관 겸 제2정치위원을 맡아 뤄루이칭(罗瑞卿)과 함께 진차지 야전군을 이끌었다. 그의 군대는 청품점(清风店) 전투에서 국민혁명군 주력병력 1만 4천여 명을 섬멸하고 25일간 지속된 장가구(张家口) 전역에서 6만 5천여명을 섬멸하고 장교급 국민혁명군 간부 13명을 생포했다. 또한 스자좡(石家庄) 전투에서 국민혁명군 32사단, 제3군 포병 대대, 보안대 9연대 및10연대, 귀향단, 보경대 등 총 2만 4천여 명과 맞붙어 거의 섬멸시켰다. 총사령관 주더는 이 전투를 "인민해방군이 대도시를 점령한 최초의 사례'라고 호평했다.
1948년 11월, 허베이의 인민해방군 주력부대는 3개 사단으로 개편되었고, 양청우는 제3병단 사령관을 맡았으며 뒤이어 제20병단 사령관에 부임했다. 허비에 공략전에서, 양청우는 부대를 이끌고 지닝(集宁), 바오터우(包头)를 공략하고 인민해방군 100만여 명이 국민혁명군 60만여 명과 격돌하여 대승을 거둔 핑진(平津) 전역에 참가했다.또한 산시성의 수도 타이위안에 제일 먼저 입성해 옌시산을 타이완으로 도주하게 만들었다.
1949년 2월, 양청우는 중국 인민해방군 제20병단 사령관을 맡아 태원전투을 지휘했고 화북에 주둔하며 천진 경비구의 사령관을 맡고, 경진위수구의 부사령관, 중국 공산당 중앙 화북국 위원을 역임하였다.1949년 9월, 양청우는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 제1차 전체회의에 참석했고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식에 참가했다.
2.4.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양청우는 제20병단 사령관을 맡았다. 1951년 6월 6.25 전쟁에 참전한 그는 중국 인민지원군 제20병단 사령관을 맡아 유엔군 및 한국군과 수차례 교전을 치렀다. 1952년 귀국한 후 1955년 부총참모장, 방공군사령관, 베이징 군구 사령원을 역임하였고, 같은 해에 장군 계급과 1급 81훈장, 1급 독립자유훈장, 1급 해방훈장을 받았다.1958년부터 인민해방군 부총참모장, 제1부총참모장 겸 군위 사무청 주임을 역임했다.양청우는 1959년 티베트 반란 진압을 책임졌고 1960~61년 중미 연합탐계 경비작전을 수행했고 중인전쟁에도 참여했으며 또한 미국에 맞서 전쟁을 벌이는 북베트남 지원 작전을 지휘했다.
2.5. 문화대혁명 시기
1965년 8월 2일, 양청우는 예젠잉, 뤄루이칭의 추천으로 총참모장 대리를 맡았고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상무위원과 부비서장, 군사위 사무팀장을 겸했다. 이후 펑더화이, 뤄루이칭, 허룽, 녜룽전, 쉬샹첸 등 여러 고위 장성들이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고초를 겪는 와중에도 그는 중앙군사위 상무위원 겸 부비서장을 도맡으며 마오쩌둥이 순행할 때마다 함께 따라가며 비서 역할을 수행했다.그런데 1968년 3월, 양청우는 공군 정치위원 위리진(余立金), 베이징시 혁명위원회 부주임이자 위수구 사령관 푸충비(傅崇碧)와 함께 대권을 탈취할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를 뒤집어 쓰고 긴급 체포되었다. 1968년 3월 22일, 중국 공산당 중앙 국무원 및 중앙군사위는 3인의 직위를 취소했고 중앙문혁소조는 '양,위,부 사건'을 제2의 2월 역류라고 규탄했으며 이 음모의 배후엔 녜룽전이 있다고 몰아세웠다. 3월 25일, 마오쩌둥은 상무위원 회의를 열지 않기로 결정하고 군사위 실무팀이 이를 대체하기로 결정했다.
그후 베이징 친청 교도소에 수감되어 고초를 겪던 양청우는 9.13 사건 이후 마오쩌둥이 "당시 린뱌오 일당의 모함을 듣고 '양,위,부 사건'을 잘못 처리했던 것일 수도 있다."라고 말하면서 복귀할 길이 열렸다. 1974년 11월 28일, 양청우는 군대에 복귀해 부총참모장을 지냈다. 장칭은 양청우를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참모장으로 승진시키려고 했지만 이를 허용하면 자신의 입지가 흔들릴 거라고 판단한 덩샤오핑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2.6. 말년
1979년 봄, 중공 중앙위원회는 '양, 위, 부 사건'을 '무고'로 규정하여 세 사람을 복권시키기로 결정했다. 이후 양청우는 1980년 1월과 10월에 부총참모장과 푸저우군구 사령관을 차례로 맡았다. 또한 1983년 6월부터 1988년 3월까지 전국정치협상회의 부주석을 맡았으며 1988년 1급 홍성공로훈장을 수여받았다.2004년 2월 14일, 양청우는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향년 89세.
3. 가족 관계
1938년 11월 28일, 양청우와 자오쯔진(赵志珍)은 우위안현 베이정쯔촌에서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8명의 자식이 있다.- 첫째 딸 양이(楊毅)는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공군보(空軍報)>에서 일하다가 '양,위,부 사건'으로 인해 쓰촨의 한 항공학교 간사로 좌천되고 아버지의 죄상을 폭로하라는 협박에 시달리다가 결국 자살했다.
- 둘째 딸 양준성(楊俊生)은 무장 경찰의 전문 지휘관으로 승격되어 중국 최초의 여성 무장경찰이 되었다. 현재는 전역했다.
- 둘째 아들 양동명(楊東明)은 친지웨이(秦基偉)의 딸을 아내로 삼았다. 2005년 12월 중국 인민해방군 공군 부사령관을 맡아 장군 계급을 수여받았다.
4. 저서
- <양청우 군사문선(杨成武军事文选)>
- <장정을 생각하다(忆长征)>
- <적의 후방에서 항전하다(敌后抗战)>
- <기중평원의 땅굴투쟁(冀中平原的地道斗争)>
- <반격-진격곡(反攻进攻曲)>
- <화북전쟁(战华北)>
- <새로운 사명(新的使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