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양명(梁明) |
이명 |
양건록(梁健錄)·양철악(梁鐵岳) 양광우(梁光宇)·일기자(一記者) |
생몰 | 1902년 3월 20일 ~ ? |
출생지 | 경상남도 거제군 사등면 사등리 |
사망지 | 미상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양명은 1902년 3월 20일 경상남도 거제군(현 거제시) 사등면 사등리의 천석군 집안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거제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부산공립상업학교에 입학하여 1919년 3월 졸업하였으며[1], 같은 해 베이징으로 가서 베이징대학 문과에 입학하여 수학했다. #1924년 베이징에서 결성된 혁명사(革命社)에 가입하고 잡지 <혁명> 발행에 참여했으며, 1925년 8월 귀국하여 조선공산당에 입당하고 12월 조선공산당 상해부 상해야체이카 위원이 되었다. 1926년 3월 공산주의운동의 통일을 표방하는 레닌주의동맹 결성에 참여하였으며, 12월 조선공산당 제2차 대회에 참여했다. 1928년 2월 일제 당국이 제3차 공산당 사건과 관련하여 조선공산당원들을 대거 체포했을 때 가까스로 빠져나와 상하이로 망명했고, 3월 무렵 조선공산당 정치부 위원이 되었다.
1928년 6월, 양명은 코민테른 제6차 대회 파견 대표로 선정되어 9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조공 지부 승인 취소 결정을 번복해 줄 것을 촉구하는 글을 작성하였고 1929년 북경에서 ML파 rlrhkswl <계급투쟁>을 발행했다. 1929년 5월 길림에서 개최된 조공 재조직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중국 관내에서 한위건과 함께 조선공산당의 선전활동을 전담했다. 또한 1930년 3월 톈진에서 고경흠(高景欽)과 일본 도쿄에 조선공산당 선전활동의 기지를 건립하는 문제를 협의했다.
1930년 6, 7월경 이후 소련으로 망명한 양명은 그해 12월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연구원이 되었다. 1933년 1월경에는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로 잠입하여 지하운동을 벌였고, 1934년경 외국문 출판사 조선어 담당으로 근무했다. 그러나 1935년 9월 19일 조선공산당 내 반당그룹의 공범활동을 벌였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체포되어 8년의 유형을 선고받았다.
8.15 광복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72인 중 한 사람으로 추대되었으며, 그해 거제군 동부면 학동리에서 연설한 이후로는 자료가 미비하여 행적을 알 수 없다. #
소련 최고재판소는 1956년 9월 22일 양명을 복권시켰고,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