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 헤인체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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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
덴마크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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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 슈마이켈 (1998~2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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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헤인체 (2001~2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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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헨릭센 (2002~2004) |
덴마크의 前 축구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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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 이름 |
얀 헤인체 Jan Heintz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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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얀 헤인체 라르센 Jan Heintze Lars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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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63년
8월 17일 ([age(1963-08-17)]세) 덴마크 토른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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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덴마크|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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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170cmㅣ63kg | |
직업 | 축구선수 ( 레프트백 / 은퇴) | |
소속 | 선수 |
토른뷔 볼클럽 (1970-1980 / 유스) 키외벤하운스 볼클럽[1] (1980 / 유스) 카스트룹 볼클럽 (1981~1982) PSV 에인트호번 (1982-1994) 바이어 위어딩겐 (1994-1996) 바이어 04 레버쿠젠 (1996~1999) PSV 에인트호번 (1999~2003) |
국가대표 | 86경기 4골 ( 덴마크 / 1987~2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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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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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PSV 아인트호벤의 '트레블'을 이룩했던 레프트백으로 PSV에서만 15년을 헌신했던 명실상부한 팀의 레전드이다.
2. 클럽 경력
덴마크 지역 토른뷔 시의 토른비에서 태어난 그는 로컬 클럽인 토른뷔 볼클럽에서 축구선수의 첫 길을 걸었다. 그는 키외벤하운스 볼클럽의 유스팀으로 자리를 옮겨 훗날 자국의 스타이자 대표팀 동료가 될 미카엘 라우드루프와 함께 한솥밥을 먹기도 했으나, 1981년 1월, 카스트룹 볼클럽의 성인팀으로 이적하여 덴마크 1부 리그 무대를 밟았다. 그러나 팀은 강등되었고 외국 클럽의 제안이 있었지만, 아직 17세의 어린 나이였던 그는 어머니의 권유로 카스트룹에 잔류했다.1982년, 그는 네덜란드의 에레디비시의 PSV 에인트호번으로 이적했고, 첫 시즌에는 카스트룹에서 성공적인 활약을 보여주었던 레프트윙으로 뛰었다. 이후 풀백으로 전향한 그는 특유의 공격력을 마음껏 뽐내며 사이드라인에서의 과감한 오버래핑으로 인상적인 모습을 여러차례 보여주었다. 두 번째 시즌부터는 팀의 주전 레프트백으로 완전히 정착했고, 그는 12년동안 6번의 에레디비시 우승과 역사적인 유러피언컵[2] 우승을 이룩하며 팀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1994-95 시즌을 앞두고 하인체는 독일 분데스리가 강등권팀인 바이어 위어딩겐으로 이적하며 새로운 도전을 택했다. 1996년에 팀이 강등되자 크리스토프 다움 감독의 지휘하는 바이어 레버쿠젠으로 이적하여 3년 동안 활약했다.
5년간의 독일 생활을 마친 1999년, 그는 커리어를 마무리하기 위해 옛 팀 동료인 에릭 헤러츠가 감독으로 있던 친정팀 PSV로 돌아온다. 30대 후반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히 강철체력을 과시하며 팀의 레귤러멤버로 뛰었다. 불혹을 앞둔 그는 경기출전 뿐만 아니라 빌프레트 바우마 같은 후배들에게 수비 노하우를 전수하며 경기 외적으로도 많은 노력을 했고, 2003년에 은퇴하기 전까지 3번의 리그 타이틀을 추가로 획득하고 물러났다.
3. 국가대표 경력
1987년 4월 29일, 핀란드와의 유로 1988 최종예선에서 성인 대표팀 데뷔전을 치렀다. 이후 본선무대에 참가하며 조별리그 3경기를 모두 출전했으나 팀은 토너먼트 진출에 실패했다.1991년 5월 1일, PSV는 중요한 소속팀 경기를 앞두고 그가 대표팀에 소집되지 않기를 원했지만 그는 유고슬라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와의 유로 1992 최종예선에 참가할 대표팀에 소집된다. 대표팀 캠프에서 그는 당시 대표팀 감독이었던 리하트 묄러 닐센에게 소속팀에서의 경기를 위해 유고슬라비아전을 출전할 수 없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닐센 감독은 핵심선수였던 그의 이탈을 허락할 수 없었고 거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소속팀으로 가버렸고, 정작 돌아와서는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한편 화가 난 닐센 감독은 그에게 무단이탈을 했다는 이유로 대표팀 1년 출전 정지의 징계 처분을 내렸다. 이후 팀은 유고슬라비아에 밀려 본선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1992년, UEFA 유로 1992를 앞두고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이 자국 내전으로 인해 본선 출전을 금지 당하면서 예선 2위를 기록했던 덴마크 대표팀이 극적으로 본선에 합류하게 된다. 징계가 끝난 그는 본선에 참가할 대표팀 소집에 응했지만 불의의 부상으로 결국 눈앞에서 대회 참가가 좌절되고 만다. 심지어 이후 대표팀은 역사에 길이남을 만한 유로컵 우승을 차지하면서 돈주고는 살 수 없는 영광스러운 순간을 부상으로 아깝게 놓치고 말았다.
UEFA 유로 1996 이후 덴마크가 보 요한손을 새 감독으로 선임하고 난 뒤 그는 다시 한 번 대표팀에 소집되어 1998 FIFA 월드컵과 UEFA 유로 2000에 출전했다. 2001년 4월 피터 슈마이켈의 대표팀 은퇴 이후, 그는 대표팀 감독인 모르텐 올센의 지휘하에 2002 FIFA 월드컵에서 대표팀 주장으로 선임되었다. A조 1차전 우루과이전과 2차전 세네갈전에 모두 선발로 출전했으나, 한국의 고질적인 더위는 불혹을 앞둔 노장을 힘들게 했고[3]2차전 이후에는 벤치를 지키게 된다. 그리고 팀은 16강에서 잉글랜드에게 3:0으로 패한뒤 16강 10위로 탈락하며 대회를 마쳤고 그는 39살의 나이에 대표팀 경력을 마감했다.
4. 여담
- 은근 한국과 인연이 깊다. 처음 PSV에 입단한 1982년에는 20대 후반의 베테랑이었던 허정무가 팀의 수비형 미드필더로 맹활약하던 시기였고 그는 프로 데뷔한지 1년이 갓 넘은 19살의 햇병아리였다. 이후 세월이 흘러 은퇴를 앞둔 2003년에는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맹활약하고 해외무대에 진출한 박지성과 이영표가 팀에 합류했다. 2002-03 시즌을 마치고 하인체가 은퇴를 선언하게 되면서 반년 살짝 넘게 같이 뛴 적이 있다. 참고로 그의 마지막 월드컵은 한국에서 치러졌으며 2경기를 출전했다.
-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최고령 참가자다.
5. 수상
5.1. 클럽
- PSV 에인트호번
- 네덜란드 에레디비시 : 1985–86, 1986–87, 1987–88, 1988–89, 1990–91, 1991–92, 1999–2000, 2000–01, 2002–03
- KNVB 베이커 : 1987–88, 1988–89, 1989–90
- 요한 크루이프 스할 : 1992, 2000, 2001
- 유러피언컵 : 1987–88
[1]
이후 1903년에 설립된 볼클러벤 1903과 합병하여
FC 코펜하겐을 창단하게 된다.
[2]
現
UEFA 챔피언스리그
[3]
설상가상으로
대프리카로 악명높은 대구에서 그것도 오후 3시 반에 치러진 경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