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96대 미합중국 연방 상원의원 애들레이 유잉 스티븐슨 3세 Adlai Ewing Stevenson I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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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4C9><colcolor=#fff> 출생 | 1930년 10월 10일 |
미국 일리노이 주 시카고 | |
사망 | 2021년 9월 6일 (향년 90세) |
미국 일리노이 주 시카고 | |
가족 |
증조부
애들레이 E. 스티븐슨 1세 아버지 애들레이 E. 스티븐슨 2세 배우자 낸시 앤더슨 (1955년 결혼 ~ 2021년 사별) 자녀 4명 |
가문 | 스티븐슨 가문 |
학력 | 하버드 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 LL.B.) |
종교 | 기독교 ( 유니테리언) |
소속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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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 선수 | 2 (상원) |
의원 대수 | 91, 92, 93, 94, 95, 96 (상원) |
지역구 | 일리노이 클래스 3 |
약력 |
미 해병대 중위 (1952 /
한국 전선 복무) 일리노이 주 하원의원 (1963~1965) 일리노이 주 재무장관 (1965~1969) 연방 상원의원 (1970~1981 / 일리노이 클래스 3) 1982, 1986년 일리노이 주지사 후보 시카고 주 변호사 겸 사업가 중국인민대학 명예교수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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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정치가. 일리노이주의 상원의원직을 역임했다.민주당의 정치 명문가 스티븐슨 가문의 일원으로, 그로버 클리블랜드 행정부 시기 부통령을 지낸 애들레이 E. 스티븐슨 1세의 증손자이자, 1952년과 1956년 대선의 민주당 후보였던 애들레이 E. 스티븐슨의 아들이다.
2. 생애
애들레이 E. 스티븐슨의 아들로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하버드 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한 후 법조인으로 일하다가, 1964년 일리노이주 하원의원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UN대사를 지내고 있던 아버지 빽으로 당선된 것인데, 그래도 주의회에서 열심히 일해서 최우수 의원 표창장도 받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사망하자 그는 1966년 체급을 높여 일리노이 주 재무장관으로 출마, 당선된다.1969년,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를 지낸 에버렛 더크슨이 사망하면서 열린 1970년 상원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했다. 이 선거에서 스티븐슨은 공화당 후보로 출마한 랠프 타일러 스미스(Ralph Tyler Smith)를 57% 대 42%로 가볍게 제압하고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74년에는 워터게이트 사건의 여파로 공화당의 지지율이 급락하며 이전보다 더 높은 62.2%의 득표율로 압승을 거둔다. 그러나 상원의원으로서 경력은 특출나지 않았고, 1981년 의원 임기 만료와 함께 재선에 도전하지 않으며 재선 상원의원으로 중앙직 커리어를 마무리했다.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시카고의 데일리 가문의 지지를 받았지만, 경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당원들에게는 거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자신 역시 권력의지가 없었으므로 출마 요구를 거절하였다. 대신 부통령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는데, 최종적으로는 휴버트 험프리의 측근인 월터 먼데일 상원의원이 부통령 후보로 지명된다.
1982년, 일리노이 주지사 선거에 출마한다. 이 선거는 유례 없이 치열했는데, 아버지가 그랬듯 스티븐슨 3세도 유약한 엘리트라는 공격을 받았다. 그럼에도 여론조사와 초기 개표에서는 스티븐슨이 우세했기 때문에 당선이 점쳐졌는데, 막상 개표를 해보니 0.14%p차이로 패배했다. 워낙 차이가 박빙이라 스티븐슨 3세는 즉각 선거를 불복하고 법원에 재검표 소송을 걸었는데, 주지사 취임일 3일 전까지 판결이 나오지 않아 끝까지 스티븐슨 3세와 일리노이 민주당 조직을 희망고문했다. 최종 결과는 4대 3으로 재검표 소송 기각. 결국 그는 4년 뒤를 기약하고 다시 본업인 변호사일로 돌아간다.
1986년에는 당연히 재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92%의 득표율로 경선을 뚫고 본선에 진출했는데, 러닝메이트 부지사 후보가 문제가 되었다. 당시 일리노이주 민주당 조직은 린든 라로슈(Lyndon LaRouche)라는 괴상한 음모론자[1]에 의해 테라포밍이 된 상태였고 일리노이 주 민주당은 라로슈의 추종자인 마크 페어차일드(Mark J. Fairchild)를 전폭적으로 밀어줬다. 그 결과, 페어차일드는 당내 경선에서 당초 유력했던 조지 상마이스터(George E. Sangmeister) 주의원을 51.8% 대 48.2%로 꺾고 부지사 후보로 결정된다.
애들레이 E. 스티븐슨 3세는 음모론자와는 같이 출마할 수 없다며 경선 결과를 불복하고 제3지대 정당인 "일리노이 단결당"(Illinois Solidarity)[2]을 창당해 독자 출마를 감행하고 부지사 러닝메이트로는 마이크 홀렛(Mike Howlett)을 지명한다.
그러나 이런 촌극 속에서 유권자들은 민주당에 등을 돌렸고, 그 결과 스티븐슨은 39.97%를 득표하는데 그치며, 52.67%를 얻은 현직 주지사 제임스 톰슨(James R. Thompson)에게 크게 밀려 낙선한다. 이후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그나마 6.64%를 얻은 민주당보다는 상황이 나았지만, 스티븐슨 가문이 이렇게 처참하게 일리노이에서 패배한건 1956년 대선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는 여생을 사업이나 비공식 외교 업무 등으로 보내며 민주당의 원로 대우를 받았으며, 말년에는 치매 증상을 보이다가 2021년 사망했다.
3.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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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6 | 정계 입문 |
일리노이 단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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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 당 지도부와 불화로 탈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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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 2021 | 복당 |
4.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64 | 일리노이 주 하원의원 선거 | 일리노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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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7,978 (0.46%) | 당선 (1위) | 초선[3] |
1966 | 일리노이 주 재무장관 선거 | 1,889,595 (50.53%) | 초선 | |||
1970 | 연방 상원의원 보궐선거 | 2,065,054 (57.37%) | 초선[4] | |||
1974 | 연방 상원의원 선거 | 1,811,496 (62.15%) | 재선 | |||
1982 | 일리노이 주지사 선거 | 1,811,027 (49.30%) | 낙선 (2위) | |||
1986 | 일리노이 주지사 선거 |
일리노이 단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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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6,626 (39.97%) |
5. 여담
- 집안 내력은 피할 수 없어서, 증조부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대머리였다.
[1]
초기에는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했는데, 얼마 안가
트로츠키주의(말이 그렇다는거고 사실상 사이비 공산주의)에 경도되어 68혁명 당시 학생운동 조직을 테라포밍하려고 시도했고, 실패하자 1970년대에는 극우 음모론자로 돌변했다.
헨리 키신저와
월터 먼데일이 공산주의 간첩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IMF가 에이즈를 퍼트려 자신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대학살했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1998년 지지자에게서 돈을 강제로 뜯어내고 갚지 않았다는 혐의로 감옥에 갇혔으며 죽기 직전에는 뜬금 없이 2016년 민주당 경선에서
마틴 오말리를 지지 선언하기도 했다.
[2]
일리노이 주에는 민주당 핵심 지지 세력인 폴란드계 미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이들이 주축이 되어 창당했다. 정당 명도
레흐 바웬사의
솔리다르노시치에서 따온거라고.
[3]
0.5%를 받고 1위로 당선되는 막장 결과가 어떻게 나올 수 있었는지는
영문 위키백과 문서 참조. 선거구 조정 실패로 일리노이 주 전체를 한 선거구로 묶고 복수투표제를 시행해 많이 얻은 순서대로 의원직을 줬다(...).
[4]
전임 에버렛 더크슨 사망으로 인한 보궐선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