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2395><colcolor=#fff> 제38대 파리 군사령관
앙리 구로 Henri Gourau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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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Henri Joseph Eugène Gouraud 앙리 조제프 외젠 구로 |
출생 | 1867년 11월 17일 |
프랑스 파리 | |
사망 | 1946년 9월 16일 (향년 78세) |
프랑스 파리 | |
군사 경력 | |
복무 | 프랑스군 |
(1888~1937) | |
최종계급 | 대장(Général d'armée) |
주요직책 |
프랑스 레반트 고등판무관 파리 군사령관 |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
주요 훈장 | |
레지옹 도뇌르 훈장 대십자 1914-1918 전쟁십자훈장 식민지 훈장 1914-1918 전승훈장 백사자 훈장 비르투티 밀리타리 훈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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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앙리 조제프 외젠 구로(Henri Joseph Eugène Gouraud)는 프랑스의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그는 1919년에서 1922년 사이에 레반트 고등판무관으로 재직했으며, 프랑스 식민지 정책의 핵심 인물이었다. 또한 1923년부터 1937년까지 파리 군사령관을 역임했다.2. 생애
2.1. 초기 생활
앙리 구로는 1867년 11월 17일 파리 7구에서 의사인 뱅상 구로(Vincent Gouraud, 1834-1906)와 마리 포르탈(Marie Portal, 1844-1918)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6남매 중 장남이었던 그는 가톨릭 전통이 강한 집안에서 자랐으며, 명문 사립학교인 스타니스라스 학교에서 수학했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패배를 겪은 세대로서 일찍부터 식민지 군인으로서의 꿈을 키웠다. 1888년 프랑스 생시르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대승리(Grand Triomphe)' 기수로 졸업했다.2.2. 아프리카 식민지에서의 활동
1890년 소위로 임관한 후, 1894년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지지를 받아 수단으로 파견되었다. 1898년 트렌티니안 장군의 지휘 아래에서 서아프리카의 저항 지도자 사모리 투레를 생포하는 데 성공하면서 군 내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니제르, 차드, 모리타니아 등지에서 15년간 식민지 통치 경험을 쌓았다. 특히 1907년 대령으로 승진한 후 모리타니아에서 아드라르 원정대를 지휘하여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했다.2.3. 모로코에서의 활동
1911년 모로코로 발령받은 구로는 리오테 장군 밑에서 복무하며 모로코 식민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12년 페스에서 발생한 반란을 진압하는 공로로 45세의 나이에 준장으로 승진했으며, 1914년 타자 지역 평정에도 성공했다.2.4.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모로코군 제4여단을 지휘하여 프랑스 본토로 귀환했다. 1915년 5월 오스만 제국과의 다르다넬스 전투에서 우완을 잃는 중상을 입었으며, 군함 차드호에서 치료를 받던 중 괴저가 발생해 팔을 절단해야 했다. 이 공로로 레몽 푸앵카레 대통령으로부터 군사 훈장을 수여받았다. 회복 후 1915년 말 이탈리아 특사로 파견되었고, 이어 제4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샹파뉴 전선을 지휘했다. 1916년 12월에 국무총리 아리스티드 브리앙이 리오테에게 국방장관 자리를 주어서 리오테가 파리로 복귀하자, 구로가 그를 이어 모로코의 총독이 되었다. 1918년 7월 14일 샹파뉴 전투에서 독일군의 대공세를 성공적으로 저지했으며, 이 공로로 레지옹 도뇌르 대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2.5. 레반트 고등판무관 시기
1919년 10월 레반트 고등판무관으로 임명된 구로는 1920년 시리아와 레바논에서 프랑스의 위임통치를 확립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는 시리아를 다마스쿠스국, 알레포국, 알라위파 영토 등으로 분할하는 정책을 실행했고, 1920년 9월 1일 레지던스 데 팡에서 대레바논국의 수립을 선포했다. 1921년 6월 23일 다마스쿠스와 쿠네이트라 사이에서 아담 한자르가 주도한 암살 시도를 겪었으나, 비서관만 사망하고 구로는 무사했다.2.6. 말년
1923년부터 1937년까지 파리 군사령관을 역임하며 주로 의전과 외교 업무를 수행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1925년 폴란드[1], 1929년 인도와 미국, 1930년 터키, 1933년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등을 방문하며 외교 활동을 펼쳤다. 1937년 70세의 나이로 은퇴한 후 클레르몽페랑 근처 루아야로 은거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독일의 점령과 비시 정권에 반대하며 종교와 집필 활동에 전념했다. 1945년 5월 파리로 돌아온 그는 1946년 9월 16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유해는 자신이 지휘했던 제4군 전사자들이 묻힌 나바린 전몰자 기념관 지하묘지에 안장되었으며, 프랑스 임시정부는 국장으로 장례를 치렀다.구로는 생전에 다수의 훈장을 받았다. 1915년 7월 다르다넬스 전투에서의 공로로 군사 훈장을 받았고, 1918년 전쟁 영웅으로서 레지옹 도뇌르 대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또한 1914-1918 전쟁십자훈장(4회 종려상), 식민지 훈장(세네갈·수단, 모로코, 모리타니아·아드라르 부문), 1914-1918 전승훈장 등 프랑스의 주요 훈장들을 받았다. 해외 훈장으로는 이탈리아의 성 마우리치오 성 라자로 훈장 대십자, 폴란드의 비르투티 밀리타리 은십자훈장, 체코슬로바키아의 백사자 훈장 등을 수여받았다.
[1]
이때 前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참모총장이었던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의 부고 소식을 접하고 그를 추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