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10-02 21:41:44

앗쉬흐르

파일:쉬하르 예멘 1.jpg
랜드마크인 이드루스 문 (سدة العيدروس)과 구시가지의 모습
파일:예멘 쉬흐르 2.jpg
대포르투갈 전승일 행사 시의 이드루스 문
파일:예멘 쉬흐르 4.jpg
옛 왕궁인 다르 나시르 (카스르 아부드

1. 개요2. 역사
2.1. 중세 : 마흐라 & 카티리 왕조
2.1.1. 포르투갈의 침공
2.2. 근대
2.2.1. 쿠아이티 왕조의 수도
3. 갤러리
3.1. 아야쉬 성채 3.2. 대사원3.3. 쿠아이티 궁전

1. 개요

아랍어 ٱلشِّحْرا
영어 Mukalla

예멘 동남부의 항구 도시. 무칼라에서 동쪽으로 50km 떨어진 해안에 위치한다. 인구는 5만명으로, 무칼라와 비슷하게 북쪽의 산지에서 내려온 강 (와디 미스얄)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다. 옛 지명은 알 아사로, 중세부터 유향 몰약의 수출항으로 번영하였고 이븐 칼둔의 무캇디마에서도 언급되었다. 19세기 무칼라에게 대체될 때까지 하드라마우트 지역의 중심 항구로 번영하였고, 쿠아이티 술탄국의 수도였다. 역사적으로 동아프리카 스와힐리 해안으로 이주한 예멘인들 중 상다수가 이곳을 통해 진출했기에 쉬흐리라 불린다.

특산물로 물고기 기름이 있고, 시내에는 시밤 / 정육 / 수산물 시장 등 여러 시장이 있다. 또한 예멘의 주요 석유 수출항 중 하나로, 기존 항구는 어항으로 남겨두고 서쪽 10km 지점 앗 다바 항구에 비행장과 저장 시설을 정비하여 활용한다. 서쪽으로 20km 떨어진 해안에 무칼라와 함께 사용하는 리얀 공항이 있다. 예멘 내전 초기인 2014년 가을 알 카에다가 점령했다가 2016년 4월 하디 정부군이 탈환하여 현재에 이른다. 다만 경제적으로 중요한 앗 다바 항구는 2021년 기준 무칼라와 함께 남부과도위원회가 장악하고 있다.

2. 역사

파일:예멘 구시가지 쉬흐르.jpg
구시가지의 모습

고대에는 킨다 부족이 일대를 통치하였고, 고대 이집트와 유향을 거래했다고도 한다. 그러다 서기 780년 경에 유향 수출항으로 도시가 세워졌고, 지리가 이븐 쿠르다지바는 일대를 빌라드 알 쿠두르 (향료의 땅)이라 불렀다. 유향과 몰약 외에도 10세기 들어서는 현지 야드가트에서 생산되는 도기 역시 수출하였다. 그러던 977년, 이란 서남 해안의 부셰르 반다르아바스 사이의 항구 도시 시라프가 지진으로 파괴되자 그 주민들이 오만 반도를 돌아 쉬흐르 동쪽 50km 지점의 곶에 새로운 항구 도시인 샤르마를 세웠다. (980년) 선진 문명을 지니던 페르시아계 이주민들로 인해 샤르마는 빠르게 발전하였고, 쉬흐르와 경쟁하게 되었다.985년 역사가 알 무캇다시에 의하면 두 도시 모두 지야드 왕조의 속령이었다고 한다.

11세기 무렵 일대는 바누 마안의 지배 하에 있었고, 술라이히 왕조의 붕괴 후 자치를 유지하였다. 1150년 알 이드리시는 쉬흐르와 샤르마가 아덴에서 미르바트 ( 살랄라 인근)로 향하는 항로의 정박지이며, 하루간 항해하는 거리라고 기록하였다. 다만 1180년대 아이유브 왕조의 침공으로 샤르마는 버려졌다. 한편 12세기 들어 쉬흐르는 이란계 알 파리스 알 라시드 가문의 통치를 받았으나 13세기에 그들은 축출되었다. 이어진 13-15세기 라술 왕조의 지배 하에 샤르마는 재건되었고, 1300년경 앗 디마슈키는 쉬흐르와 함께 하드라마우트의 양대 항구라 기록하였다.

2.1. 중세 : 마흐라 & 카티리 왕조

14세기 중반 샤르마가 재차 버려지자 쉬흐르는 하드라마우트의 중심 항구로 번영하였다. 예멘 주요부를 다스리는 라술 왕조에 복속해 있던 도시는 1432년 바 두자나 가문에게 점령되어 하드라마우트 해안의 첫 전근대 국가인 마흐라 술탄국의 수도가 되었다. 마흐라 술탄국은 라술 조의 수복 시도를 격퇴하였고, 1445년에는 북쪽 하드라마우트 협곡의 세이윤을 중심으로 한 카티리 술탄국 역시 격퇴하였다. 1454년 타히르 조가 라술 조를 대체하자, 후자의 유민들이 쉬흐르에 당도하여 아덴 정복을 권하였다. 이에 마흐라 술탄 무함마드 빈 사드는 9척의 함대와 아덴 원정에 나섰지만, 폭풍으로 함대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술탄 본인 역시 사로잡혔다. 그후 타히르 조는 보복으로 자인 앗 순불리 휘하의 병력을 파견해 쉬흐르를 점령하게 하였다.

현지인들의 저항이 이어지자 술탄 말리크 아미르 빈 타히르는 직접 대군과 함께 사막을 횡단하여 진군하였고, 바 두자나 가문은 중과부적이라 여겨 도주하였다. 타히르 군대는 쉬흐르를 약탈하였고 총독을 선임한 후 돌아갔다. 그러던 1462년, 자이디 이맘국과 타히르 왕조의 전쟁을 틈타 카티리 술탄국이 도시를 점령하였다. 다만 1478년 마흐라 술탄 사드 빈 파리스가 쉬흐르를 수복하였고, 2년 후에는 소코트라 섬을 점령하였다. 하지만 카티리 조와의 전쟁은 계속되었고, 1488년 술탄 바드르가 재차 쉬흐르를 점령하자 소코트라 인들의 도움으로 수복하기도 하였다. 마침내 1495년 마흐라 술탄국은 내전에 돌입하였고, 카티리 술탄 자파르 빈 아므르가 개입하여 쉬흐르 외곽의 타발라 전투에서 바 두자나 가문을 격파하고 도시를 정복하였다. 이후 마흐라 술탄국은 동쪽으로 200km 떨어진 키쉰으로 천도하였고, 쉬흐르는 카티리 술탄국의 주요 항구로 중시되었다.

2.1.1. 포르투갈의 침공

파일:쉬흐르 예멘 9.jpg
일곱 순교자들의 무덤 (앗 슈하다 앗 사바아)

대항해시대에 이르러 쉬흐르는 포르투갈 인들에게 셰르 혹은 셰엘이라 표기되었다. 1516년 포르투갈 함대가 아덴을 공격할 때에 카티리 술탄 압둘라 빈 알리는 쉬흐르에서 알 하뭄과 알 마흐라 부족으로 구성된 1천의 원군을 파견하였는데, 아덴 점령 실패를 그 탓으로 돌린 포르투갈 당국은 보복을 결심한다. 1523년, 포르투갈 상인이 쉬흐르에서 사망하고 카티리 술탄이 기름과 목재 등의 재산을 가로챘다는 구실로 포르투갈 함대가 도시를 공격하였다. 포르투갈 군은 우선 목재 창고를 비롯한 항구 건물들을 불태운 후 도시로 진격하였다.

카티리 왕자 마트룬 빈 만수르 등 귀족, 상인, 학자들로 구성된 전쟁 위원회의 지휘 하에 주민들은 시가지를 네 구역으로 나눠 결사 저항하였다. 3일 간의 시가전 끝에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고, 포르투갈 군은 철수하였다. 지금도 해안의 대사원 근처에는 전투 중 사망한 7명의 지도자들이 묻힌 곳에 현지인들의 경의를 표한다. 현지인들은 전승일을 정하여 매년 축하하였고, 1977년 마침내 국가적으로 공인되어 축제와 각종 행사가 벌어진다. 18세기에는 독일인 학자 케렌스틴 니부르가 방문하였다. 포르투갈을 무찌른 카티리 왕조는 1540년 도파르까지 정복하며 전성기를 맞는다.

2.2. 근대

1858년, 어린 시절 인도로 이주하여 하이데라바드에서 예멘계 용병대를 지휘한 장교 오마르 빈 아와드 빈 압둘라 알 쿠아이티 알 하드라미의 아들 압둘라가 영국의 도움으로 시밤에 거점을 세웠다. 그는 이내 인접한 세이윤의 카티리 술탄과 대립하였다.한편 17세기 이후 쉬흐르는 다시 자치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1866년 카티리 술탄 갈립 빈 무흐신인 현지 지도자 알리 빈 나지를 축출하고 도시를 점령하였다. 이에 곧 카티리 측이 무칼라마저 점령한다면 내륙에 고립될 것을 우려한 시밤의 압둘라는 여전히 인도에서 복무하는 동생 아와드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후자는 쉬흐르에 대한 해상 봉쇄를 가한 끝에 1867년 4월 상륙하였다. 아와드는 카티리 군을 격파, 갈립을 축출하고 도시를 점령하였다.

2.2.1. 쿠아이티 왕조의 수도

파일:쉬흐르 예멘 6.jpg
20세기 초엽 시가지 모습

그해 12월 갈립은 쉬흐르 수복을 노렸으나 격퇴되었고, 아덴의 영국 총독에게 군사 원조를 청했으나 역시 거절되었다. 이로써 쉬흐르는 확실히 쿠아이티 령이 되었고, 압둘라는 시밤에서 이곳으로 천도하였다. 그러자 위협을 느낀 무칼라의 나키브 우마르 빈 살리흐는 아덴의 영국 총독과 동맹하여 쿠아이티 측에 맞섰으나, 위협이 사라지자 영국과의 협정을 어겼다. 이에 1881년 11월, 영국 해군이 무칼라를 항복시킨 후 압둘라에게 주었다.이로써 하드라마우트 해안을 전부 장악한 압둘라는 1882년, 기존의 '장교'라는 의미인 제마다르 대신 술탄 나와즈 장을 칭하였다. 다만 그는 1888년 영국에 복속한 직후 사망하였고, 1902년 계승 분쟁에 개입한 영국 당국은 쉬흐르에 파병하여 압둘라의 동생 아와드를 술탄으로 추대하였다.

아와드는 쉬흐르와 무칼라의 제마다르 대신 술탄을 칭하였고, 1910년 사망하며 두 아들 갈립과 오마르 및 그 자손들이 번갈아가며 제위에 오르는 계승법을 정하였다. 비록 갈립과 오마르가 번갈아 즉위한 후 1936년 오마르가 사망한 이래로 갈립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즉위했지만, 계승 분쟁 없이 안정이 유지되었다. 한편 1915년 술탄국의 수도는 쉬흐르보다 번영하게 된 무칼라로 옮겨졌다. 그리고 1966년에 즉위한 갈립의 증손자 갈립 2세는 영국인 제안한 남아라비아 연방 가입을 거부하고 남아라비아 보호령으로 남고자 하였다. 이에 유엔은 일대의 미래에 대한 논의에 나섰지만 그 전에 공산 계열 남예멘 군의 공격으로 술탄국은 해체되었다. (1967년 11월 30일) 이후 쉬흐르는 예멘의 석유 수출항 중 하나로 남아있다.

3. 갤러리

파일:예멘 쉬흐르 5.jpg

파일:예멘 쉬흐르 문.png
알 쿠르 문

파일:예멘 쉬흐르.jpg
이드루스 문

3.1. 아야쉬 성채

파일:예멘 쉬흐르 성채.png

파일:쉬흐르 예멘 2.jpg

파일:예멘 쉬흐르 아야쉬.png

파일:예멘 쉬흐르 요새.png
아야쉬 성채와 내부 정원

3.2. 대사원

파일:모스크 예멘 쉬흐르.png

파일:쉬흐르 예멘 사원.png
대사원

3.3. 쿠아이티 궁전

파일:쉬흐르 예멘 5.jpg

파일:예멘 쉬흐르 3.jpg

파일:쉬흐르 예멘 4.jpg

파일:예멘 쉬흐르 7.jpg
다르 나세르 궁전. 보수가 안되어 허름한 상태로 남아있다

파일:예멘 쉬흐르 8.jpg

파일:예멘 쉬흐르 6.jpg
다르 나세르의 조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