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5-21 18:31:18

알베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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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eric
생몰년도 미상 ~ 925년
출생지 미상
사망지 오르테
재위 기간 897년 - 922년

1. 개요2. 행적

1. 개요

스폴레토 공국 31대 공작.

2. 행적

스폴레토 공작이며 이탈리아 국왕 및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역임했던 귀도 3세의 시종이었다. 894년 귀도 3세가 이탈리아 왕위를 놓고 경쟁하던 베렝가리오 1세 동프랑크 왕국 국왕 아르눌프의 아들 수벤티발두스의 협공에 밀려 타로 요새로 후퇴하던 중 타로 강 인근에서 사망했다. 이때 그는 일부 병사들을 포섭해 페르모로 내려간 뒤 그곳의 백작이 되었다.

897년 스폴레토 공작과 카메리노 변경백을 맡고 있던 귀도 4세가 사촌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람베르토를 만나러 로마로 가자, 자객을 보내 테베레 강변에서 귀도 4세를 살해한 뒤 스폴레토 공국과 카메라노 백국을 독차지했다. 이후 899년 또는 900년에 베렝가리오 1세의 대 마자르 전쟁에 참여한 공으로 베렝가리오 1세로부터 스폴레토와 카메라노의 영유권을 정식으로 인정받았다.

904년 투스쿨룸 백작 테오필락트 1세와 함께 대립교황 크리스토포로를 폐위시키고 세르지오 3세를 교황으로 옹립했다. 909년 테오필락트 1세의 딸 마로치아와 결혼했다. 일부 학자들은 마로치아가 세르지오 3세와 성관계를 맺으면서 태어난 사생아로 알려진 요한 11세는 사실 그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를 입증하는 명백한 근거는 없다. 또한 훗날 로마의 통치자가 된 알베리크[1]와 네피 주교 세르지오, 교황 베네딕토 7세의 아버지인 다비드 또는 테오다투스가 그의 자식으로 전해진다.

917년 테오필락트의 지원에 힘입어 로마인의 집정관으로 임명되었지만, 자신의 비위에 거슬리는 자들을 숙청하다가 민심의 이반을 초래했고, 결국 922년 로마에서 추방되었다. 이즈음에 스폴레토에서 보니파초 1세라는 인물이 스폴레토 공작을 자처했다는 일부 기록이 전해지는 것을 볼 때 스폴레토에서도 권력을 상실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오르테에서 마자르 용병을 고용해 로마를 탈환하려 했으나 925년경 암살당했다.


[1] 알베리크 '2세'로도 칭해지나, 스폴레토 공작을 계승하지 않았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면 올바른 표현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