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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2년 6월 8일 |
평안북도 안주군 | |
사망 | 1986년 5월 31일(향년 73세) |
서울특별시 강동구 돈춘동 보훈병원 | |
서훈 | 건국훈장 독립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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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교육자.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 수여.2. 생애
안병무는 1912년 평안남도 안주군에서 태어났다. 1930년 백부인 안이식이 도산 안창호에게 보내는 밀서를 들고 중국 상해 유학을 떠났고, 푸단대학에 재학 중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이 일어나자 천도교 청우당원의 신분으로 푸단대학 학생의용군에 가담해 항일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중국 19로군에 편입해 대일전에 참전했다. 대일전에 참전하는 한편 상해 한인학우회에 가입해 재무위원에 선임되기도 했다.1937년 광저우 중산대학 법학원 정치과를 졸업하고, 난징에서 한국국민당 청년단에 가입하였다. 1938년 부터 1940년 8월 까지 장사시의 중국어 일간지 '역전', '항전일보', 반월간지 '건군반월보' 등에 일제를 비판하고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의 실정 및 독립운동 현황을 기고하였다. 1940년 9월에는 '일본 제국주의 철제 하의 조선'이라는 책자를 발간하여 한국 내의 일본의 폭정을 폭로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1940년 9월 광시성 중국중앙 군관학교 제6 분교에서 일본어를 가르쳤고, 국민혁명군 제3전구에서 대적 선전을 담당하였다. 1941년 부터 1943년 까지 장시성 상라오에서 제3전구 정치부 전선일보사 편집조사부장을 맡았고, 1943년 10월 광복군 사령부에 합류해 사령부 선전부 비서 및 선전조장으로 활동하며 일본군을 상대로 한 대적선전에 앞장섰다.
1944년 중경 임시정부에 합류해 임시의정원 비서를 역임했고, 주중 미국대사관에서 한국인 공작반을 신설하자 엄항섭, 송면수, 안우생, 박영만 등과 파견되어 OSS와 광복군의 연합작전에 공을 세웠다. 1945년에는 중한문화협회 비서로도 활동했다.
해방 후 귀국하여 천도교 정우당에서 활동하였고, 1946년 간도 내 동포들의 실정을 보고하는 한편, 전라도 및 경상도에서 발생한 소요사태의 진상조사단으로 활약했다. 1947년 좌우합작위원회와 건민회를 중심으로 통일전선결성준비위원회를 구성하자 조봉암, 김약수 등과 상임위원에 선출되었고, 천도교총본부 비서로 활동했다.
건국 후 1949년 주불공사대리 공진항의 비서로 주불공사관에서 근무하였고, 1950년 4월 윤용규 감독의 영화 마음의 고향을 한국 영화 최초로 프랑스에 수출하도록 주선하였다. 공진항 공사의 농림부 장관 입각으로 귀국 후 1950년 11월 6.25 전쟁으로 인한 천도교의 전시체제 순응을 위해 조직된 천도교 보국연맹에 기획위원에 선임되었고, 국제연합 한국재건단에서 근무하다가 1955년 경제사절단 기술보좌역, 1957년 국립체신학교 부교장을 지냈고 이후 옥천고등학교, 금곡고등학교, 의정부여자고등학교 교장을 지내는 등 교육자로 활동하였다.
퇴임 후 한중문화협회 부회장, 광복군동지회 부회장을 지내는 등 독립운동가들의 예후에 힘썼고, 독립운동을 인정받아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1986년 5월 31일 서울특별시 강동구 둔촌동 보훈병원에서 사망했다.
3. 여담
- 1982년 손자를 대동해 조선일보가 주관한 독립기념관 모금운동에 참여해 성금을 기탁했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손자에게 역사의 산교육장이 될 것 같아서 같이 참여했다고 하며, 온 국민의 합심으로 독립기념관 건립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