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14 08:42:13

아지자바드 공습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개요2. 배경
2.1. 혼란스러운 아프간 정세2.2. 폭격 위주의 작전 변화와 불어나는 민간인 피해2.3. 미국이 고용한 현지인들간의 분쟁
3. 전개
3.1. 물라 사데크 체포 계획3.2. 코만도 폭동 작전
4. 피해5. 결과

1. 개요

아지자바드 공습은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중이었던 2008년 8월 22일에 일어난 민간인 오인 폭격 사건이다. ## 이 사건으로 90명에 가까운 피해자가 나왔고 사상자 중 상당수가 민간인이었다는 게 밝혀졌으며, 후술할 미국의 사후 대처 때문에 아프간 전역에서 반미 여론을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낳았다.

2. 배경

USA 투데이의 탐사 보도 기사

2.1. 혼란스러운 아프간 정세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어느 지역이 그렇듯, 아프간은 미국과 탈레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회색 지대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는 일반적인 전쟁 수행보다는 비밀스러운 첩보 작전과 정보 수집이 더 중요해졌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중 스파이가 활동하기 좋은 환경임을 의미했다. 탈레반에게 매수된 정보원이 미군을 함정에 빠트려 큰 피해를 주기도 하는 한편, 미군에게 매수된 부족민들이 탈레반에 가입해 있던 자신의 부족원을 넘겨주기도 하는 첩보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던 시기였다.

이 과정에서 미군은 탈레반을 상대로 계속 공습 폭격 작전을 일으켰고 그 때문에 아프간 민간인들도 계속 폭격에 휘말려 희생자가 늘어나기 시작해 아프간 현지에서는 민심이 계속 나빠지고 있었다. 이미 아지자바드 공습 이전에도 아프간 전역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자가 늘어나고 있었고 아프간 정부나 유엔 같은 국제기구, 인권단체들도 미국의 공습작전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프간의 부족민들은 어느 누구도 믿지 않았고 스스로 무장을 하기 시작했고 어지간한 마을에서는 장정들이 자동화기로 무장하고 곳곳에 IED 부비트랩을 설치하기도 했다.

2.2. 폭격 위주의 작전 변화와 불어나는 민간인 피해

전쟁이 장기화되자 계속되는 미군 전사자 발생으로 인해 미국 내에서도 점점 반전 여론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미군은 자국군의 인명 피해를 줄이기 위해 의심되는 지역은 일단 폭격으로 날려버리거나 공병부대가 폭탄을 설치해서 날려버리는 식으로 전략을 바꾸었다. 그러나 이런 식의 강력한 화력 투사는 민간인들이 사는 지역의 인프라들을 필연적으로 박살내기 마련이었고, 금전적으로 보상을 해 봐야 산골짜기에 고립된 아프간 촌락들 입장에서는 자신의 이웃과 친족들은 물론 집이나 마을 시장과 같은 기반시설들을 싹 날려버리고서 돈 몇 푼 주고 입을 씻어버리는 행위로 인식되어 미군에 대한 불만과 적개심이 커져 가고 있었다.

2.3. 미국이 고용한 현지인들간의 분쟁

미군은 아프간 현지에서 보안, 첩보 업무를 민간 기업인 아머그룹(ArmorGroup)에 외주를 맡겼다. 아머그룹은 현지에서 티모르 샤와 나디르라는 두 부족장들을 현지 정보 수집과 군 기지 경비업무 등을 위해 고용했고 그들에게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에 나온 배역에서 이름을 딴 코드명인 미스터 화이트와 미스터 핑크를 부여했다.

처음에는 별 문제가 없었으나 아머그룹을 통해서 받는 수익이 쏠쏠하다는 것을 깨달은 둘은 곧장 자신들이 그것을 독점하고 싶어했고 분쟁과 마찰이 생기기 시작했다. 둘의 불화를 인지한 아머그룹에서도 화해를 모색했으나 화해를 모인 자리에서 미스터 핑크가 총격전을 일으켰고, 미스터 화이트는 총격전에 휘말려 사망했다. 아머그룹은 미스터 핑크인 나디르를 해고하였고 미스터 화이트의 형제를 고용해 그에게 미스터 화이트2라는 코드명을 부여했다.

3. 전개

3.1. 물라 사데크 체포 계획

한편 미스터 화이트2는 자신의 조카인 물라 사데크가 탈레반의 중요 지도자 중 하나라는 것을 제보했다. 아머그룹과 미국은 물라 사데크를 주요 제거 목표로 등록했고 그와 물라 사데크의 연결고리를 끊거나, 물라 사데크를 체포하기 위한 방향으로 활용하려고 했다.

그런 와중에 아머그룹이 로미오, 줄리엣이란 코드네임을 부여한 정보원이 물라 사데크가 고향인 아지자바드의 미스터 화이트2의 집에 방문한다는 첩보를 제공했다. 이 첩보는 곧바로 조작 의혹이 제기되었는데, 그들이 이전에 여러 검증된 정보를 제공했던 적이 있으나, 미스터 화이트의 부족원들과 원한 관계였다가 해고된 미스터 핑크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정보원들이라, 미스터 핑크가 원한으로 차도살인을 위해 거짓 정보를 제공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점들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공군 기지 인근에 있는 물라 사데크를 제거할 기회가 왔다고 판단, 코만도 폭동 작전이라는 물라 사데크 제거 계획을 발동하였다.

3.2. 코만도 폭동 작전

한편 아지자바드에서는 죽은 미스터 화이트를 위한 기념 행사를 위해 여러 부족민들이 초대를 받아 모이고 있었다. 곧 이어 미군은 아지자바드에 물라 사데크가 왔다는 제보 전화를 받았고, 올리버 노스[1] 폭스 뉴스의 카메라맨들을 전공 홍보를 위해 작전에 대동한 미군-아프간 특수작전군 혼성 연합군으로 이뤄진 타격대를 아지자바드로 출동시켰다. 아지자바드 입구에서 갑자기 나타난 타격대를 본 부족의 무장 병사들은 경고 사격을 시작했고 연합군은 인근 민가를 확보한 후 대응 사격을 하면서 AC-130을 호출해 공중 폭격을 유도했다.

잠시 후 AC-130의 화력에 아지자바드 마을 전체가 불바다가 되기 시작했고 폭격이 끝난 후 연합군은 남아있는 시설들에 추가 공격을 퍼부은 뒤 생존자 일부를 붙잡아 체포해 공군 기지로 끌고 갔다. 미국은 물라 사데크와 그가 이끌고 온 탈레반 무장병사들을 사살했고, 그 과정에서 민간인들 일부가 휘말려 목숨을 잃었다고 발표하였다.

4. 피해

그러나 아프간 정부의 조사가 시작되고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의 조사가 시작되면서 실상이 드러났다. 작전지역에 있던 피해자들은 90명 이상이었으며 그 중 상당수가 민간인이었다. 게다가 출생률이 높은 아프간 특성 상 사망자 상당수가 어린아이들이었는데, 아지자바드 주민들은 사건 현장을 수습하면서 60명에 육박하는 사망자들이 어린이들인 것을 증언하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미국은 자신들의 작전 실패를 부정하고 사상자 대다수는 탈레반이었으며 민간인 피해는 없었고 물라 사데크를 제거하였다는 주장을 고수하려 하였다. 그러나 9월 8일 아지자바드 공습 현장 잔해에서 40구가 넘는 시신이 수습되는 핸드폰 촬영 영상이 발견되면서 결국 미군은 사건을 재조사해야 했다.

미군은 자체 조사 결과 12명의 어린이를 포함한 민간인 33명, 아머그룹에도 고용된 것으로 추정된 이들까지 포함해 무장 반군 22명을 합쳐 총 55명이 사망한 것으로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 주장은 유엔과 아프간 정부의 조사와는 일치하지 않는 것이었고, 해당 사건을 조사한 미군 중부 통합사령부는 유엔 등에 자신들이 조사한 자료를 공유하거나 조사과정을 공유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게다가 해당 작전에 참여했던 이들은 대부분 솜방망이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5. 결과

아프간 정부는 이 작전에 협조한 아프간군 장성들을 해임하였고 작전에 잘못된 정보를 준 '미스터 핑크' 나디르에게 사형을 선고해 구금하였다. 2021년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공세 이후 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미국은 이 사건에서 자신들의 잘못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려 하였으며 원래 목표였던 물라 사데크 제거조차 실패했다는 사실도 한동안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물라 사데크는 이 작전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이 밝혀졌고, 미국의 뻔뻔한 태도에 분노한 아프가니스탄 전역에서 대규모 반미 시위와 봉기가 일어났다. 게다가 이 사건에서 피해를 당한 집단이 아머그룹에서 고용한 부족원들이었기 때문에 현지인들로서는 미국이 배신했다고밖에 받아들일 수 없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미국이 아프간인들의 민간인 피해를 신경 쓰지 않고 마구 죽이고 다니는 살인마 집단이라는 인상을 아프가니스탄인들에게 남겼고, 이 사건이 벌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칸다하르 학살 사건까지 터지면서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에 대한 민심은 사실상 증오로 변해버렸다. 뒤늦게 상황이 심각해진 것을 인지한 미국이 민심 수습을 하려 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는 없었다.

결과적으로 2021년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도망치듯이 철수해야 했고, 현지 민심을 무시하는 군대는 승리할 수 없다는 또다른 피의 교훈을 쓰게 되었다.


[1] 이란-콘트라 스캔들로 유명한 그 올리버 노스가 맞으며, 전역 이후 폭스 뉴스와 같은 극우 언론에서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