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00:06:07

아이거 산 참사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파일:아이거 산 북벽.jpg
참사가 일어난 북벽

1. 개요2. 사고 내용3. 사고 이후4. 미디어 믹스

1. 개요

1936년 7월 스위스 베른에 위치한 아이거 산에서 일어난 사고.

2. 사고 내용

해발고도 3,970m인 아이거 산의 북벽은 경사가 굉장히 높다. 이 곳은 두 코스로 나뉘는데, 이중 한쪽 코스는 1932년 8월 스위스 출신 한스 라우퍼(Hans Lauper) 일행이 처음으로 정복했다. 다른 코스는 난이도가 높아 등반가들 사이에서 엄두도 못내는 구간으로 악명이 매우 높았다. 마터호른산, 그랑드조라스의 북벽과 함께 알프스 산맥의 3대 북벽으로 불리는 곳이다.

1935년, 독일 팀이 한번 원정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후, 이듬해 독일 나치당의 지원을 받은 등산대원 10명이 다시 도전했다. 이들은 독일인 4명, 오스트리아인 6명으로 이뤄진 팀이었다. 나치 측에선, 이들이 아이거산을 정복하면 프로파간다 목적으로 쓸 예정이었다. 하지만 훈련 도중 1명이 사망하는 일이 일어났고, 악천후가 계속되자 더 이탈하는 사람이 나와 최종적으로 4명만 도전하게 됐다.

4명은 바이에른주 출신 2명, 안드레아스 힌터스토이서(Andreas Hinterstoisser)와 토니 쿠르츠(Toni Kurz), 그리고 오스트리아인 2명 빌리 앙거러(Willy Angerer)와 에디 라이너(Edi Rainer)였다.

날씨가 다시 좋아지자 4명은 등산을 시작했다. 도중 힌터스토이서가 37m 아래로 추락하는 사고가 있었으나 부상은 입지 않았다. 이들은 속도를 더 내 빠르게 올라갔다. 하지만 며칠 뒤, 날씨가 다시 나빠졌다. 구름이 낮게 깔려 시야가 간헐적으로 차단됐다. 다음 날엔 절벽에서 돌덩이가 연달아 떨어지기까지 했다. 앙거러가 돌덩이에 맞아 견갑골에 부상을 입었고, 등산은 잠시 취소됐다. 이들은 밤새 휴식을 취했다.

이들은 구름이 어느 정도 걷히자 다시 등산을 시작했다. 하지만 앙거러의 견갑골 부상이 예상과 달리 심각해 등산이 불가능한 지경이었다. 거기다 이들이 지나려는 암벽은 앞서 말했듯이 난이도가 굉장한 데다, 악천후로 박빙까지 생겨나 난도가 더 높아졌다. 하루 넘게 같은 구간에서 머물다가 힌터스토이서는 고정된 줄을 잡고, 몸을 진자처럼 움직여 이동하는 텐션 트래버스 #를 써서 이동했다.
날씨는 더더욱 나빠졌고, 눈에 비, 심지어 산에서 돌덩이들이 또 굴러 떨어졌다. 팀원은 암벽에서 내려가 재정비하기로 했다. 아직 빌레이가 발명되기 전인 시기라 팀원은 듈퍼지츠 방식 #을 써서 내려갔다. 그런데 내려가던 도중 갑자기 눈사태가 일어났다. 눈사태는 내려가던 4명을 그대로 덮쳤다. 힌터스토이서는 그대로 눈사태에 휩쓸려 실종됐고, 앙거러는 떨어지면서 바위에 몸을 부딪혀 사망, 라이너는 밧줄이 횡경막 주변을 조이는 바람에 그대로 질식사했다. 쿠르츠 혼자만 살아남았다.

다음 날, 스위스 구조대가 인근 아이거반드 역(Eigerwand Station)에서 출동해 이들을 구조하러 나섰다. 구조대은 쿠르츠 혼자 살아남은 채, 남은 두 대원은 줄에 매달려 사망한 걸 발견했다. 남은 쿠르츠라도 구조해야 했지만 눈사태가 언제 또 일어날지 모르는지라 바로 구조할 수도 없었다. 구조대가 하산 후 어떻게 쿠르츠를 구조해야 할지 의논하는 사이 시간이 더 흘렀다. 쿠르츠는 그 사이에 손에 동상을 입었고, 피부가 말 그대로 꽁꽁 얼어붙었다. 위에는 라이너의 시신이, 아래에는 앙거러의 시신이 있는 상황에서, 쿠르츠는 칼로 줄을 잘라 앙거러의 시신을 떨어뜨렸다. 하지만 상공에 계속 매달린 상태에서 쿠르츠의 상태마저 악화됐다.

구조대는 쿠르츠가 있는 지점에 도달하고, 그를 묶어서 내려보낼 정도의 줄을 준비해 쿠르즈에게 다가갔으나, 쿠르츠는 "더는 못 버티겠습니다(Ich kann nicht mehr)." 라는 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사망했다.

힌터스토이서는 이후 시신으로 발견됐다. 결국 아이거 산 정복을 꿈꾸며 떠난 4명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3. 사고 이후

사망한 이들의 시신은 이후 독일팀에서 수습했다. 수습하는 동안 라이너와 쿠르츠의 시신은 몇주간 절벽에 매달려 있었다.

이들이 사망한 지역은 힌터스토이서의 이름을 따 힌터스토이서 트래버스(Hinterstoisser traverse)라 부르게 됐다.

1938년 7월 24일, 안데르 헤크마이어와 루트비히 뵈르크, 프리츠 카스파레크, 하인리히 하러로 이뤄진 팀이 다시 도전해 마침내 등정에 성공했다.

4. 미디어 믹스

영화 "내 사랑 아이거 (Nordwand / Northface, 2008)"가 이 사건을 영상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