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가몬 왕국 왕위 요구자 Ἀριστόνικος | 아리스토니코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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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한국어 | 에우메네스 3세 |
그리스어 | Εὐμένης Γʹ | |
영어 | Eumenes III | |
존호 | 바실레프스 | |
생몰 년도 | 미상 ~ 기원전 129년 | |
재위 기간 | 기원전 133년 ~ 기원전 12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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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르가몬 왕국의 왕위 요구자. 로마 공화국에 나라를 기증하겠다는 아탈로스 3세의 유언에 반발한 민심을 등에 업고 에우메네스 3세를 자칭하며 반란을 일으켰지만 끝내 로마군에게 패하여 생포된 후 처형당했다.2. 생애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에우메네스 2세와 에페소스 출신의 첩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라고 한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불분명하다. 기원전 133년, 아탈로스 3세가 무더운 날씨에도 어머니의 조각상 앞에 오랫동안 서 있다가 일사병에 걸려 사망했다. 그 후 왕의 측근인 에우데모스가 로마에 방문하여 원로원 의원들 앞에서 아탈로스가 왕국 전체를 로마인에게 기증한다고 알렸다. 로마는 즉시 페르가몬을 속주로 삼고, 관료들을 파견했다.이 사실을 전해들은 페르가몬 주민들은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당시 페르가몬 왕국은 아탈로스 1세- 에우메네스 2세- 아탈로스 2세 3대의 선정으로 소아시아에서 상당히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고, 왕성한 상업과 무역을 통해 막대한 재원을 벌어들이고 문화예술을 꽃피웠다. 비록 아탈로스 3세가 통치엔 관심을 두지 않고 취미 생활에 열중하긴 했지만, 국가 운영에 큰 장애는 없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로마를 주인으로 섬겨야 한다니, 반발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로마인들이 유언장을 위조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고, 반로마 정서가 증폭되었다.
그는 이러한 민심을 이용하기로 마음먹고, 해안가 마을인 레프키에서 추종자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자신을 에우메네스 3세로 자칭하고, 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도시들과 전쟁을 벌였다. 우선 함대를 구성하여 여러 해안 도시를 들러 지지를 확보했다. 그러나 키메에서 에페소스 해군과의 해전에서 참패해 함대를 잃어버렸다. 이에 내륙 지역으로 이동하여 노예들에게 해방을 약속하여 끌어들이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부를 나눠주겠다고 하며 역시 포섭했다. 그는 이들을 헬리오폴리탄스(heliopolitans), 즉 태양의 시민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티아티라, 아폴로니스 및 여러 요새를 점령했고, 미시아의 산악 주민들과 헬레스폰트 해협 건너편의 트라키아인들과 동맹을 맺고 페르가몬에 파견된 로마군과 맞서 싸웠다.
그와 동맹자들은 로마군과 주변의 국가들을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했다. 심지어 카파도키아 왕 아리아라테스 5세는 트라키아인들과의 전투 도중 전사했고, 집정관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무키아누스는 기원전 131년 폰토스 왕 미트리다테스 5세, 비티니아 왕 니코메데스 2세, 파플라고니아 왕 필레몬 2세의 지원을 받고 아리스토니코스와 맞붙었다가 크게 패하여 전사했고, 그의 수급은 아리스토니코스에게 전달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130년 새 집정관 마르쿠스 페르페르나가 스트라토니케 시 인근에서 반란군을 크게 격파했다. 그는 스트라토니케 시에 숨어서 한동안 농성했지만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항복했다. 이후 로마로 끌려간 그는 129년 개선식에서 전리품 취급받은 뒤 옥중에서 목이 졸려 죽었다. 페르페르나의 뒤를 이어 소아시아에 부임한 마니우스 아퀼리우스는 페르가몬 왕국 대부분을 로마가 갖고, 반란 토벌에 협조한 폰토스와 카파도키아에게 일부 영토를 나눠줬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사회주의 계열 역사가들은 그가 노예 해방을 부르짖으며 그들을 "태양의 시민"이라 지칭한 것에 주목해, 고대 세계의 계급혁명가라고 주장했다. 로버트 폰 펠만은 <고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역사>에서 아리스토니코스가 더 완벽한 사회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주장했으며, 프랑스 사회학자 제러드 고티에는 <공산주의의 역사>에서 시칠리아에서 벌어진 노예 전쟁과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델로스와 아티카의 노예 폭동, 그리고 아리스토니코스의 봉기를 "노동자들의 최초의 국제혁명"이라고 지칭했다.
하지만 현재 학계는 그를 계급혁명가로 볼 수 없다고 본다. 노예를 해방시켜 자기 편에 끌어들이는 것은 고대 세계에서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로마는 칸나이 전투 이후 노예들을 해방시킨 뒤 2개 군단을 구성해 카르타고군과 맞서게 하기도 했다. 학자들은 아리스토니코스가 노예들을 "태양의 시민"이라고 지칭한 것도 특별한 게 아니라고 본다. 그들은 도시를 재건하고 그곳에 사람들을 정착시켜 시민으로 삼는 것은 페르가몬 역대 왕들의 전통적인 정책과 유사하다고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