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6 12:20:05

신범철(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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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범철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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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前 축구선수
파일:coach5.pn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신범철
申凡喆 / Shin Bum-Chul
출생 1970년 9월 27일 ([age(1970-09-27)]세)
부산광역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직업 축구선수 ( 골키퍼 / 은퇴)
축구코치
신체 185cm
학력 덕천중학교
동래고등학교
아주대학교 (1989~1993)
등번호 부산 대우 로얄즈 - 31번
부산 아이콘스, 수원 삼성 블루윙즈 - 1번
인천 유나이티드 - 51번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부산 대우 로얄즈/ 부산 아이콘스 (1993~2000)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00~2003)
인천 유나이티드 FC (2004)
지도자 인천 유나이티드 FC (2005~2010 / 골키퍼 코치)
FC 서울 (2011 / 골키퍼 코치)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14~2016 / 골키퍼 코치)
장쑤 쑤닝 (2017 / 골키퍼 코치)
전남 드래곤즈 (2019 / 골키퍼 코치)
FC 서울 (2020 / 골키퍼 코치)
국가대표 17경기 / 11실점 ( 대한민국 / 1992~1994)


[clearfix]

1. 개요

부산광역시 출신의 축구지도자, 1990년대 후반 부산 대우 로얄즈의 황금기를 지낸 선수.

2. 선수 경력

2.1. 프로 입단 이전

부산 덕천중 1학년부터 축구를 시작하였다. 이전에는 전혀 운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축구부 훈련을 소화하는데 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특히 골키퍼 코치의 개념이 없던 시절이어서 선배 골키퍼를 보고 따라 연습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니.. 울면서까지의 노력을 통해, 축구 명문인 동래고에 진학, 고등학교 3학년 때 KBS 춘계 고교대회에서 우승 및 MVP를 경험하였다. 이후 아주대에 진학, 4학년 시절에 처음으로 국제대회 출전을 하게 된다.

파일:external/www.kfa.or.kr/20089249459.jpg

이 때 스쿼드의 면모가 화려했다. 신태용, 강철, 이임생, 정광석, 서정원...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표로 출전, 3경기 2실점(3무)(...)의 준수한 실력을 보여주었다. 동년 10월에는 아랍에미리트 전에 국가대표팀 첫 출전을 하게 된다.

2.2. 부산 대우 로얄즈/ 부산 아이콘스

국제대회에서의 활약을 통해, 고향팀이자 대학 재단의 모기업인 부산 대우 로얄즈에 입단하게 된다. 당시 대우에는 김풍주라는 대형 골키퍼가 있었으나, 선수 말년의 시점으로 인해 세대 교체가 필요했기 때문에 입단 원년에 주전 예약을 받으며 훈련에 임했다. 그런데 개막 일주일 전에 무릎 인대 부상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개막전 출전을 강행, 부상이 악화되어 개막 첫 경기 출전 이후 시즌아웃(...)되는 불상사를 겪는다. 이후 부상과 회복을 반복하면서,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4강의 주역이 되었으나, 앞서 언급한 부상의 여파가 큰지라 3시즌동안 20게임도 뛰지 못하였다.

이쯤 되었으면 연봉 삭감도 무리가 아니었을텐데, 당시 대우 안종복 단장[1]은 신범철의 가능성을 보고 연봉 삭감을 하지 않는 대인배스러운 결정을 한다. 이후, 1997년에 정규리그, 아디다스컵, 프로스펙스컵의 3관왕을 달성하는데 기여하였고 베스트 일레븐에도 당당하게 선정되는 등, 재기에 성공함과 동시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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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 K리그 아디다스컵에 우승할 당시~중앙에 31번 선수가 신범철

이후 98년 필립모리스 코리아컵 우승, 99년 대한화재컵 준우승, 정규리그에는 수원 삼성 블루윙즈와의 챔피언 결정전 원정에서 아쉽게 결승골을 헌납[2], 준우승 및 팀의 리즈 시절을 마무리한다.

팀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모기업의 경영난으로 팀이 다른 기업으로 인수되고, 연패를 거듭하면서 팀 분위기도 가라앉는 상황[3]을 맞이한 신범철은 다른 팀에서 온 제의를 받고 이적을 하게 된다.

2.3. 수원 삼성 블루윙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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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2001 아시안클럽 챔피언십 우승기념사진. 왼쪽 상단이 신범철.

99년 전관왕의 주역이었던 이운재 상무 입대로 골키퍼 전력에 누수가 생긴 수원의 제의를 받은 신범철은 본인과 마찬가지로 부산의 프랜차이즈 스타인 류웅렬과 함께 2:1 트레이드[4]되었다. 2001년 아디다스컵, 2000-2001 아시안클럽 챔피언십[5]우승에 기여했다. 특히 아시안클럽 챔피언십 2라운드 스리랑카 사운더스 SC와의 경기에서는 후반 29분, 생애 처음으로 페널트킥 득점을 하기도 했다.[6] 이렇게 이운재의 공백을 어느 정도 잘 메워 주었으나 2002년 이운재의 제대 및 복귀로 벤치 멤버로 전락해 2002년에는 3경기, 2003년에는 단 1경기 출전에 그쳤다.

2.4. 인천 유나이티드 FC

축구 인생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안종복 단장이 취임한 신생팀 인천 유나이티드에서 제의를 받고 선수 생활 말년을 이 곳에서 보낸다.

3. 지도자 경력

은퇴 이후 2005년부터 2010년까지 인천 유나이티드 골키퍼 코치로 코치 생활을 시작하였고, 2011년 FC 서울,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골키퍼 코치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2017년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레전드 골키퍼였던 이운재가 새로운 골키퍼 코치로 합류하며 팀을 나왔고, 선수 시절에 이어서 또... 이후 최용수 감독의 부름을 받고 중국 슈퍼 리그 소속 장쑤 쑤닝의 코치로 부임하며 해외 진출을 하게 되었다. #

2019년 전남 드래곤즈 코치로 부임하였다.

2020년 초 FC 서울의 포르투갈 전지훈련 연습 경기에서 서울의 다른 코치들과 함께 있는 모습이 포착됐다. 아무래도 팀을 옮긴 듯하다.

4. 여담



[1] 부산 대우 로얄즈의 중흥기를 이끌어 냈으며 시민구단 인천 유나이티드 단장 시절에는 한국 프로스포츠에서는 드물게 흑자 경영을 이루어냈다. 그 경력을 바탕으로 대한축구협회 회장 선거에 출마하기도 하였다. 2012년 하반기 재보궐선거에서 경남도지사에 당선된 홍준표의 간곡한 요청으로 경남 FC 사장으로 취임했다. K리그 최고의 프런트를 뽑을 때 단연 첫 손에 꼽히는 인물...이었으나 경남에서 팀 주축 선수들에 대한 홀대 및 코칭스태프 월권 등으로 중위권을 다투던 팀을 반시즌만에 강등권 바로 위까지 추락시키며 명성을 깎아먹었다. [2] 그 유명한 샤샤의 신의 손 사건(...) [3] 지금도 그렇지만 대우 로얄즈의 전성기와 부산 아이콘스로 변경 후의 응원 열기는 현저하게 대비되었다. [4] 상대는 콜롬비아 출신의 하리. [5] AFC 챔피언스리그. [6] 이 경기에서 수원은 무려 18-0으로 승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