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6~17세기 유럽에서 가장 급격한 변화를 거친 분야 중 하나는 식물학이었다.종래에 의학 분야에 종속되었던 식물학은 이 식물학 혁명을 거침으로써 하나의 독립적인 분과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고대 문헌에 의존했던 종래의 식물학에서 경험적 탐구방식을 추구하던 새로운 식물학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2. 진행 과정
근대 식물학의 등장에는 대학교의 역할이 상당히 컸다. 16세기에 파도바 대학과 볼로냐 대학에서 식물학 강의가 개설되었는데, 당시 대학에 널리 퍼진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아 식물학 역시 고전의 부활에 힘썼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식물학자들에게는 고대의 식물학 문헌의 복원은 가장 중요한 문제로 여겼고, 이를 통해 당시의 약초학의 오류들을 바로 잡으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그런데 고대 문헌을 복원함에 있어서 난항을 겪었는데, 당시 문헌들에 실린 삽화들이 조악하게 간략하였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에 서방 가톨릭, 동방 정교회, 이슬람 모두 종교적인 도그마 때문에 식물을 자세하게 묘사하는 것을 금하고 있었던 탓이었다. 그러니 그 식물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학자들 간에 논쟁이 일어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삽화에 실린 식물이 어떤 식물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일종의 동물 실험과 같은 새로운 경험적 탐구 방법들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들이 갖고 있었던 고대 문헌의 복원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에는 각종 오자들과 번역오류가 넘쳐나는 바람에 배는 어려웠고.[1]
대항해시대로 신대륙이나 인도 등에서 식물들이 쏟아져 들어오자 고대 문헌에서 벗어나, 약용으로 쓰이지 않는 식물, 원예식물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후 정확한 묘사를 위해 식물학 책을 내고자 하는 인물들은 좋은 화가와 판화가를 구하는 데 열성이었으며, 사실상 이 시기의 식물학 혁명은 화가, 판화가들이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특히 식물을 납작하게 말려서 표본으로 만드는 방법이 개발되자 식물학의 발전은 더욱 가속화 되었다.
결국 식물 뿐만 아니라 동물 또한 체계적으로 분류하고자 하는 경향은 카를 폰 린네와 함께 계통분류학의 탄생에 이르게 된다.
3. 관련 문서
[1]
이는
조선 시대
정약전의 저서
자산어보에 그림을 싣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만약 국책이었다면 도화서의 화원들을 쓸 수 있었겠지만, 흑산도에 귀양간 신분으로 그럴 수는 없었고 삽화를 조악하게 그려넣을 바야에 안 넣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