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카 시대 관련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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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D0029> 역사 | <colcolor=#212529,#E0E0E0> 다이카 개신 · 다이호 율령 |
국가원수 | 천황 | |
행정구역 | 야마토국 ( 아스카쿄 · 후지와라쿄) · 오기칠도 | |
문화 | 시텐노지 · 아스카사 · 호류지 ( 호류지 금당벽화) | |
종교 | 신토 · 대승 불교 | |
인물 | 쇼토쿠 태자 · 오노노 이모코 · 소가노 우마코 · 소가노 에미시 | }}}}}}}}} |
백제 건축 양식과 유사점이 많은 아스카 시대의 양식으로 복원되었다. 보통 오사카에 관광을 가게 될 경우 일본 체류기간을 좀 길게 잡은 사람이면 교토에 가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교토에 있는 히가시혼간지, 니시혼간지 등을 보면 확실히 건축양식이 서로 다름을 알 수 있다. |
1. 개요
시텐노지([ruby(四天王寺, ruby=してんのうじ)])는 일본 오사카부 오사카시 덴노지구에 위치한 아스카 시대의 사찰이며, 일본 화종(和宗)의 총본산이다. 호류지와 함께 백제의 건축 양식 영향을 받은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주요 건축물들이 모두 파괴되어 복원하였다.2. 역사
서기 578년에 쇼토쿠 태자가 백제로부터 장인 세 사람을 받아들여 절인 시텐노지를 건축하게 하였고 593년에 완성되었다. 이는 호류지보다 이른 것이다. 아스카데라가 역사상 일본 최초의 사찰이지만 사라졌다면,[1] 시텐노지는 최초의 관사이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사찰이다. 그러나 1576년에 있었던 화재로 전체 가람이 완전히 소실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재건되었다. 이 때문에 건물 자체는 호류지가 더 오래되었다.에도 시대를 거치면서 시텐노지 역시 계속 증축되었으며, 금당과 탑 등의 건축 양식 역시 바뀌었다. 사실상 사진으로 볼 수 있는 시기에 이르러서는 공포의 형식이나 기둥의 배치조차 바뀌어 지붕이나 하앙 정도만 옛 흔적이 남아있던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가람의 배치만큼은 창건 그대로다. 지금도 시텐노지식이라고 함은 강당과 금당, 탑, 정문이 일직선으로 놓여져 있는 배치를 뜻하며, 백제식 가람배치라고 부른다.
에도 시대를 거친 근대의 시텐노지. 특히 지붕의 형태와 장식이 많이 변형되었다. |
이후 1934년에는 태풍 등으로 큰 피해를 입었으나 복구하였지만 결국 태평양 전쟁 때는 미군의 폭격으로 인해 탑과 정문, 금당, 남측 회랑이 완전히 불타버렸다. 이후 일본 정부에 의해 셋 다 아스카 시대의 양식으로 고증하여 철근 콘크리트로 복원을 하고 말았다. 양식을 되돌리는 것이야 종종 있는 일이지만 콘크리트라니... 콘크리트 건축물은 그 무게 때문에 기초공사를 하기 위해 땅을 다 파해쳐야 한다. 이 과정에서 과거의 흔적이 남아있는 주춧돌과 기단은 제거되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2.1. 곤고구미와 시텐노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이라는 별명이 있던 건축 업체 곤고구미의 상징이 바로 이 시텐노지다. 시텐노지를 건축한 세 명의 목수 중 한 명인 금강중광(金剛重光: 곤고 시게미츠)이 일본에 남아 대대손손 시텐노지의 증축과 유지보수를 하게 되었고, 이 것이 곤고구미의 시작이다. 에도 시대까지 곤고구미는 시텐노지의 유지보수를 전담해 왔기 때문에 시텐노지로부터 매년 정해진 돈을 받아 회사를 유지해왔다. 시텐노지의 완성 이후로도 계속 보수와 증축을 하였으며, 1576년에는 시텐노지 전체가 불에 탄 것을 재건한 기업도 곤고구미다. 그러나 1868년에 메이지 유신 직후에 내려진 "신불 분리령"에 의해 시텐노지는 소유한 사원의 토지를 모두 잃고, 곤고구미도 고정수입을 잃게 되었다. 그래도 1934년에는 태풍으로 무너진 시텐노지의 탑을 재건하는 등의 일을 하였다. 곤고구미에 대해서는 해당 항목 참고.1934년 태풍으로 무너진 오층 탑과 정문 |
3. 가람
시텐노지를 묘사한 그림 |
3.1. 중심 가람
백제의 영향을 받아 한 개의 5층 목탑과 금당을 가지고 있는 1탑 1금당식 가람 배치를 하고 있다. 호류지와 달리 모든 건물이 일직선으로 놓여있는 이러한 배치를 시텐노지식이라고 부르며, 전형적인 백제 사찰의 가람배치로 추정한다.현재 있는 금당과 탑 등 중심가람의 건축물들은 모두 철근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것이라서 세월의 흔적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는 안타까운 점이 있다. 내부는 현대식으로 복원되었으며, 내부에 있던 벽화와 장식 등도 완전히 소실되어서 현대적으로 새로 그려놓았다.
콘크리트로 복원하면서 에도 시대의 양식이 아닌 창건 당시였던 아스카 시대의 양식으로 복원을 했다. 고증은 한국과 일본의 고건축을 연구했던 저명한 학자인 후지시마 가이지로가 했다. 고증에는 호류지나 7세기경에 건물 모양으로 만들어진 가구인 다마무시노즈시(옥충주자: 玉蟲廚子), 한국 삼국시대 건물들의 흔적 등을 참고 하였다고 한다.
복원된 시텐노지는 호류지와 비슷하게 하앙 구조, 배흘림기둥 등 백제의 영향을 받은 아스카 시대 요소로 추측되는 것들을 많이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에도 시대까지 이어진 고식으로 파악되는 독특한 지붕의 형식, 가람 배치와 서까래의 종류와 배열 방법, 人자형 대공 등에서 호류지와는 좀 차이가 있다. 가람배치는 창건 당시부터 달랐고, 호류지는 난간을 제외하면 人자형 대공이 없는데 반해 시텐노지에서는 직접 가구에 쓰고 있다. 그리고 서까래가 호류지나 일반적인 일본 건물들처럼 평연(모든 서까래가 평행)이 아닌 선자연(부채꼴)으로 배치한 근거는 발굴 조사 때문이다. 화재로 인해 건물이 다 없어진 상태에서 1950년대에 발굴조사를 진행하였고, 이 과정에서 여러 흔적들을 발견했는데, 그 중에는 나라 시대 즈음 주저앉아버린 서까래의 흔적이 나왔다. 그 모양이 둥근 긴 서까래와 선자연의 형태였던 것. 이러한 발견점을 반영하여 호류지와 다르게 복원하였다.
다만 현존하는 사진 등은 모두 에도 시대의 자료고, 옛 그림들도 시대도 다르고 간략화되어 파악하는데 한계가 있어 복원이 완벽하다고 확신할 수는 없으며, 시텐노지의 양식은 어디까지나 백제 건축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아스카 양식이지 백제 양식과 동일하다는 근거가 없음은 주의해야 한다.
3.2. 외부 가람
비록 시텐노지의 중심 가람은 현대에 재건되었지만, 그 밖에 오래된 다른 건축물들은 아직 남아있다. 주로 에도 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아름다운 조경을 가진 혼보(本坊) 정원이나 유서깊은 춤 무대인 이시부타이(石舞台, 돌무대)[2]와 뒷편의 건물인 로쿠지도[3], 쇼토쿠 타이시덴( 쇼토쿠 태자전), 박물관인 보물전 등이 있다.이시부타이와 로쿠지도 |
4. 행사
4.1. 시텐노지 성령회 무악
해마다 이시부타이에서는 쇼토쿠 태자를 위령하는 행사를 한다. 4월 22일이 쇼토쿠 태자의 기일이며 이 때 대법회인 성령회(聖靈會)와 이때 추는 춤에 쓰이는 음악인 무악(舞樂)를 연주한다.성령회와 성령회 무악은 1400년이나 이어진 오래된 행사로, 많은 기원을 가진 춤과 음악을 펼친다. 무악은 좌무(左舞)[4]와 우무(右舞)[5]라는 2가지 기본형식으로 이루어진다. 각 형식에 따라 음악과 옷색깔이 다른데, 좌무는 중국에서 유래한 음악인 당악(唐樂)에 따라 추며, 우무는 고구려에서 전래한 음악인 고려악(高麗樂)에 따라 춤을 춘다.
그 중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한반도에서 전래된 춤인 소리코(蘇利古)로, 612년에 백제에서 건너온 무용가인 미마지(未麻之)[6]에 의해 전수된 고구려 사자춤과 탈춤이다.
4.2. 시텐노지 왓소 마츠리(축제)
어디서 많이 봤던것 같은 복장들이? |
한국의 웹상에는 백제인들이 오사카 해안에 도착할 때면 일본인들이 반가워서 그들을 가마에 태우고는 "왔소~, 왔소~"를 외치며 시가를 행진했다는 설이 꽤 널리 퍼져 있다. 일본에서는 축제에서 왓쇼이(ワッショイ)라고 구령을 부르는 것이 널리 퍼져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 구령이 시텐노지의 왓소 축제에서 나왔다고 추측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이게 전라도 사투리의 "왓쇼~잉"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확실한 학문적 근거는 없으며, 개중에는 유태인의 문화가 영향이었다는 좀 억지스러운 설도 있는 모양.여담으로 쿠니미츠의 정치가 한국에 번역되어 나왔을 때 축제 장면의 "왓쇼이"란 대사가 "왔소"로 번역되었다.
사실 이 당시 한국어는 현대의 한국어와는 전혀 달랐기 때문에 왓쇼이 = 왓소(왓쇼잉)는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다. '왔소'가 되려면 선어말어미 '-았/었-'이 완전하게 문법화되어 있어야 하는데, 이건 조선 중기 이후의 근대 한국어에 와서야 이루어졌다. 즉, '왔어/왔소' 설은 민간어원에 의한 현대적 재해석일 뿐이다.
실상 사천왕사 축제는 1980년대 말, 재일교포들이 자신들의 축제를 가지고 싶어하여 만든 축제이다. 한국의 우수한 문화와 한일교류의 현장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90년대 말 후원하던 재일교포계열 기업이 파산하면서 잠시 중단되었다가 일본기업의 후원을 얻어 다시 재개했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즉 백제와 연관이 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고 재일교포들이 자신들의 뿌리를 기억하고 기리기 위해 현대에 만든 축제이다. 관련 내용은 EBS의 특집다큐에서 2019년 3월 13일자에 다루었다.
5. 외부 링크
- 시텐노지 홈페이지 (일본어)
- 과거 시텐노지 사진들
- 현재 시텐노지 사진들
[1]
지금 남아있는 것은 후대에 다시 창건된 것
[2]
무대강(舞臺講)이라고도 한다.
[3]
로쿠지는 여섯개의 시간을 말하는데 하루 여섯 차례의 염불과 독경을 뜻한다.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비는 곳이다.
[4]
사호노마이라고도 한다. 중국·인도의 음악 양식에 근거한 춤
[5]
우호노마이라고도 한다. 한반도와 시베리아 계통의 음악 양식에 근거한 춤
[6]
미마지의 춤과 관련 음악은 일본 왕실 아악의 기초가 되었으며, 미마지는 아악의 아버지라고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