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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1457E><colcolor=#FFF> 보헤미아 프르셰미슬 왕조 2대 공작 스피티흐네프 1세 Spytihněv 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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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체코어와 슬로바키아어 |
스피티네프 1세 (Spytihněv I) |
라틴어 |
스피티뉴보 (Spytignewo) |
|
출생 | 875년경 | |
사망 | 915년 (향년 40세) | |
재위 | 보헤미아 공국의 공작 | |
894년 ~ 915년 | ||
형제 | 브라티슬라프 1세 | |
아버지 | 보르지보이 1세 | |
어머니 | 루드밀라 |
[clearfix]
1. 개요
보헤미아 공국 프르셰미슬 왕조 2대 공작.2. 행적
보헤미아 공작 보르지보이 1세와 프쇼바니족 또는 밀차니족의 지도자인 슬라비보르의 딸 루드밀라 사이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브라티슬라프 1세가 있었다. 생년월일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보헤미아 전승에 따르면, 그는 40세에 사망했다고 한다. 체코 역사가 두샨 트르제스티크(Dušan Třeštík, 1933 ~ 2007)는 그가 875년에 태어났다고 추정했으며, 바츨라프 찰루페츠키(Václav Chaloupecký, 1882 ~ 1951)는 874년에 출생했다고 추정했다. 체코 인류학자 에마누엘 블체크(Emanuel Vlček, 1925 ~ 2006)는 그의 유골을 조사한 뒤 875년 이전에 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했다.883년에서 885년 사이에 아버지가 스트로미르(Strojmír)의 반란으로 일시적으로 축출되어 대 모라비아 왕국에 망명했을 때, 그 역시 어머니와 함께 따라갔다. 이후 아버지가 모라비아의 지원 덕분에 복위했지만, 그는 모라비아 궁정에 그대로 남았다. 888년에서 890년 사이에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나이가 아직 어렸기에, 모라비아 국왕 스바토플루크 1세가 890년 3월에 판노니아의 오문테스페르흐(Omuntesperch)에서 동프랑크 국왕 아르눌프와 회담을 가진 끝에 보헤미아를 다스릴 권한을 인정받고 통치를 행사했다.
894년 스바토플루크 1세가 사망한 뒤 비로소 보헤미아 공국의 권력을 장악한 그는 895년 7월 보헤미아의 유력 귀족인 비티슬라프(Vitislav)[1]와 함께 동프랑크 국왕 아르눌프가 개최한 총회가 열린 레겐스부르크에 방문해 아르눌프의 가신이 되는 대가로 동프랑크 왕국의 보호를 받기로 했다. 또한 보헤미아는 공식적으로 레겐스부르크 주교구에 포합되었다. 이로 인해 보르지보이 1세가 보헤미아로 데려왔던 슬라브 성직자들이 추방되었다.
대 모라비아 왕국의 새 국왕 모이미르 2세는 이에 반발해 보헤미아를 여러 번 공격했다. 이에 보헤미아인들은 896년에 아르눌프에게 사절단을 보내 도움을 욫어했고, 897년에 보헤미아 사절단이 재차 레겐스부르크로 찾아와서 모라비아인들이 자신들을 괴롭히고 있다고 호소했다. 이후 보헤미아인들은 아르눌프와 함게 모이미르 2세를 상대로 반기를 일으킨 스바토플루크 2세를 지원했다. 900년 여름, 스피티네프가 이끌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보헤미아 전사들이 바이에른을 침공한 모라비아인들에 대항하는 바이에른인들을 도왔다. 이후 모이미르 2세는 901년에 바이에른인들과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906년, 에르츠 산맥 북쪽에 위치한 글로마코베족은 작센 공작 오토 1세의 아들 하인리히의 공세에 직면하자 마자르족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마자르족은 이들을 돕기 위해 진군하던 중 보헤미아 영토를 지나갈 때 스피티네프 1세에게 길을 빌려달라고 요청했다. 스피티네프 1세는 강력한 전투력을 갖춘 마자르족과 싸우고 싶지 않았고, 작센을 약화시키고 싶었기에 이를 받아들였다. 마자르족은 보헤미아를 통과한 뒤 글로마코베족과 연합하여 작센군을 격파했다. 한편, 같은 해에 동생 브라티슬라프 1세가 하벨 강 중류 주변에 정착한 슬라브 부족인 스토도르 족의 공주 드라호미라와 결혼했는데, 일부 학자들은 이것이 작센에 공동으로 대응하는 동맹을 체결하기 위해 맺어진 정략결혼이라고 추정한다.
그는 보헤미아 중부에 위치한 프르셰미슬 왕조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프라하에서 26~34km 떨어진 언덕에 5개 요새를 건설하고 그 안에 교회를 세운 뒤 왕실 내 여러 구성원들을 배치했다. 이 요새들은 훗날 멜니크 시, 리부신 시, 테틴 시, 르슈테니 시, 볼레슬라프 시로 발견했다. 또한 프라하 성 요새화에도 힘을 기울여 해자 성 주변에 건설하고 프라하 주변에 여러 소형 요새를 세웠으며, 프라하 시 자체도 확장했다.
그가 언제 사망했는지는 기록상에서 전해지지 않지만, 현대 학자들은 40세에 사망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915년에 사망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그가 죽은 뒤 동생 브라티슬라프 1세가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되었다.
프라하 성모 마리아 교회 지하에 안장되었던 그의 유해를 연구한 인류학자 에마누엘 블체크는 그가 40~45세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론했다. 블체크에 따르면, 스피티네프 1세의 키는 175cm였으며, 몸매는 매우 탄탄하고 근육질이었다. 뼈 조직 검사 결과 혈액형은 B형이었으며, 관절염이 있었지만 사망이나 심각한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질병은 발견되지 않았다. 치아에 단 한 번의 충치가 있었으며, 두개골에는 상처가 치유된 흔적이 있었고, 하반신에 통풍으로 인해 몸이 다소 뒤틀린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여성의 유골도 함께 묻혀져 있었는데, 학자들은 스피티네프 1세의 아내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문헌 기록은 스피티네프 1세의 아내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
[1]
일부 학자들은 이 인물이 스피티네프 1세의 남동생인 브라티슬라프 1세라고 추정하지만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