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08 15:23:33

스테판 마버리

스테판 마버리의 수상 이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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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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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rd : 1999-00 · 20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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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소타 팀버울브스 등번호 3번
찰스 스미스
(1995)
스테판 마버리
(1996~1999)
데니스 스캇
(1999)
뉴저지 네츠 등번호 33번
잉카 데어
(1995~1998)
스테판 마버리
(1999~2001)
알론조 모닝
(2003~2004)
피닉스 선즈 등번호 3번
렉스 채프먼
(1996~2000)
스테판 마버리
(2001~2004)
쿠엔틴 리차드슨
(2004~2005)
보스턴 셀틱스 등번호 8번
알 제퍼슨
(2004~2005)
스테판 마버리
(2009)
마퀴스 대니얼스
(2010~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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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스테폰 제이비어 마베리[1]}}}
Stephon Xavier Marbury
출생 1977년 2월 20일 ([age(1977-02-20)]세)
뉴욕주 뉴욕시 브루클린
국적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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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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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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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학력 조지아 공과대학교 (학사)
신장 188cm (6' 2")
체중 82kg (180 lbs)
윙 스팬 193cm (6' 4")
포지션 포인트 가드
드래프트 1996 NBA 드래프트 1라운드 4순위
밀워키 벅스 지명
소속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1996~1999)
뉴저지 네츠 (1999~2001)
피닉스 선즈 (2001~2004)

뉴욕 닉스 (2004~2009)
보스턴 셀틱스 (2009)
산시 종위 브레이브 드래곤즈 (2010)
포산 드럴라이온즈 (2010~2011)
베이징 덕스 (2011~2017)
베이징 플라이 드래곤스 (2017~2018)
지도자 베이징 로얄 파이터스 (2019~ )
등번호 3번 - 미네소타 / 피닉스 / 뉴욕
8번 - 보스턴
33번 - 뉴저지

1. 개요2. 생애3. 플레이 스타일4. 농구화5. 여담

[clearfix]

1. 개요

미국 농구 선수. NBA에서 선수 생활을 할 때에는 불안정한 멘탈과 불운 때문에 능력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상대적으로 초라한 커리어만 남긴 채 리그를 떠났지만, 중국에 가서 영예를 얻게 된 선수. 별명은 '스타베리(Starbury)' 로, 그의 패션 브랜드 이름이기도 하다.

NBA 커리어 통산 846경기 평균 19.3점 3.0리바운드 7.6어시스트 1.2스틸을 기록했다. 뛰어난 운동능력을 앞세운 공격형 포인트 가드였지만 대신 야투율은 43.3%로 떨어졌고 자유투 성공률도 78.4% 가드포지션 대비 아주 좋은편은 아니었다.[2][3]

사촌동생인 세바스찬 텔페어도 NBA의 농구선수였다가 최근 장전된 총기 소유 건으로 감옥에서 투옥 중이다.

2. 생애

2.1. NBA 이전

마버리는 브루클린 출신인데 7남매 중 여섯번째 아이였다. 마버리의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고 형 셋은 한가락 하는 농구선수로 성장해 대학교까지는 잘 갔지만 다들 이런저런 이유로 NBA 진출에는 실패했다. 마버리 역시 형들을 따라 농구를 시작해 길거리 농구계의 주목받는 실력자로 성장, 아래 팀메이트가 된 케빈 가넷과 함께 1995년 고졸중 최대어 취급으로 맥도날드 올스타에 출전하기도 했다. 다만 저 가난한 집안 문제 그리고 암울한 주변 환경[4][5][6]과 빨리 돈을 벌어야한다는 일념으로 조지아 텍 진학 1년만에 NBA 진출을 선언해 팀을 혼란에 빠뜨리기도 한다.

2.2. NBA 시절

2.2.1.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시절

파일:external/origin.nba.com/garnett3_627_073007.jpg
1996년 밀워키 벅스로 1라운드 4순위로 지명 되었고 바로 뒷순위의 레이 앨런 지명권과 트레이드되어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에서 데뷔한다. 작년에 케빈 가넷을 손에 넣은 미네소타는 마버리를 가넷과 함께 팀을 견인할 차세대 듀오로 만들 계획을 하고 있었다. 데뷔 시즌 15.8점 2.7리바운드 7.8도움을 기록했고 신인 시절 루키 퍼스트팀에 들었으며 팀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이 해 신인왕은 앨런 아이버슨의 몫이었지만, 팀의 첫 플레이오프 진출이라는 성과를 이룬 마버리에게 신인왕이 돌아갔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을 정도로 성공적인 루키 시즌이었다. 하지만 신인상은 팀 성적 보다는 개인성적이 더 중요하다. 아이버슨은 루키 시즌 평균 23득점, 7어시스트, 2스틸 이상을 기록했고 루키 주제에 50득점 이상 경기도 있었으며 마이클 조던앞에서 두 번의 크로스오버 이후 점프슛을 넣는 등 임팩트가 엄청났다. 마버리 문단이라 신인왕이 마버리에게 돌아갔어야 하는 말이 나오는거지 1997년 당시 분위기는 아이버슨이 받는 것이 당연했다.

사실 아이버슨의 수상이 그 정도까지 당연한 건 아니었다. 아이버슨이 뛰어난 루키시즌을 보내긴 했지만 전 시즌과 별 변화가 없는 성적 때문에 '스탯만 좋은게 아니냐'는 의구심은 당시에도 있었고, 실제로 신인왕 투표를 보면 아이버슨은 44표, 스테판 마버리는 35표, 심지어 3위인 샤리프 압둘라힘도 25표나 얻는 등 아이버슨은 그리 압도적인 신인왕이 아니었다.[7] 포인트는 아이버슨이 합당한 신인왕이긴 해도, "마버리가 신인왕을 받아야한다'는게 '마버리 문단이라 나오는 말'일 정도로 소수 의견은 절대 아니었다는 것이다. 44vs35표면 '아이버슨이 받는게 당연한 분위기'는 아니다.

다음해에는 위닝 시즌을 보내며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미네소타가 맘에 들지 않은데다[8][9] 가넷이 천문학적인 연봉을 받게 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마버리는 구단과 마찰을 빚었고, 미네소타를 떠나 뉴저지로 향하게 된다. 마버리 본인이 자존심이 강했고 빅 마켓 혹은 대도시 프랜차이즈에서 뛰기를 열망했다. 이런 결정이 가넷과 마버리의 커리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만약이란 가정은 의미 없지만 가넷이 당시 경력에 비례하여 천천히 연봉을 올리고 마버리가 미래를 보고 미네소타에 잔류 했다면 스탁턴&말론, 페이튼&켐프 같은 원투 펀치를 구성하여 서부지구에서 강팀으로 군림 했음은 당연했을 것 이다.

2.2.2. 뉴저지 네츠 시절

파일:external/www.rantsports.com/Stephon-Marbury-NBA-Brooklyn-Nets.jpg
뉴저지 네츠에서 마버리는 평균 20득점을 뛰어넘으며 스타로 떠올랐고 2001년 올스타전에서 마지막에 3점 두개를 꽂으며 동부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키스 밴 혼 정도 말고는 믿을 팀원이 없었던 뉴저지를 승리로 이끌지는 못했으며, 마지막 시즌에는 자기를 뺀 주전 4명이 전원 시즌 절반 이상을 온갖 부상으로 날리는 불운으로 독고다이에 가까운 농구를 해야 했다. 결국 2001년 오프시즌에 피닉스 선즈로 트레이드되었는데, 마버리와 트레이드된 역대급 포인트가드 제이슨 키드가 뉴저지를 전성기로 이끈다.

2.2.3. 피닉스 선즈 시절

파일:external/cdn.bleacherreport.net/2855761_display_image.jpg
마버리는 피닉스에서 숀 매리언, 조 존슨, 아마레 스타더마이어 등과 함께 나쁘지 않은 활약을 선보였고 2003년에는 그해 우승팀인 샌안토니오 스퍼스에게 2승을 거두는 등 선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음 시즌 34경기에서 22패를 하며 추락하자 피닉스는 먹튀로 전락한 앤퍼니 하더웨이와 함께 시즌 도중 뉴욕 닉스로 트레이드시켰다. 피닉스는 이후 마버리가 떠난 뉴저지처럼 또다른 역대급 포인트가드 스티브 내시와 함께 전성기를 달린다.

2.2.4. 뉴욕 닉스 시절

파일:external/cdn.hoopshype.com/stephon_marbury_oct08.jpg
뉴욕의 새 단장 아이제아 토마스에 의해 닉스에 온 마버리는 고향에서 뛰고 싶었다며 의욕을 보였고 팀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다. 패트릭 유잉 이후 처음 맞이한 올스타급 선수에 뉴욕 팬들은 많은 기대를 걸었으나 그 이후 마버리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감독인 래리 브라운과 마찰을 일으켰고, 아이제아 밑에서는 무단 이탈을 하거나 서로 드잡이질을 하며 팀 분위기를 망치는 데 일조했다. 설상가상으로 그동안 뉴욕은 이해할 수 없는 영입을 반복하며 로스터가 완전히 망가졌다. 당시 뉴욕의 화려한 무브는 아이제아 토마스 문서에 가면 볼 수 있다. 뉴욕의 언론은 연일 마버리에게 비난을 퍼부었으며 2007년에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이듬해에 발목 수술을 받으며 시즌을 마감하는 등 불행이 겹쳤다.

08-09 시즌, 신임 감독으로 과거 피닉스 시절 마칠을 빚은 적이 있는 마이크 댄토니가 부임했다. 그는 처음부터 마버리가 자신의 플랜에 없다고 공언했으며, 프리시즌에도 벤치 멤버로만 기용하였고, 정규시즌 들어서는 아예 기용하지 않고 벤치에만 앉혀놓았다. 마버리의 포지션은 그 시즌 새로 영입된 크리스 듀혼의 몫이었고 그는 준수한 활약을 하며 팀의 상승세를 이끌었다. 그러다가 시즌 도중 닉스가 트레이드로 당장 뛸 선수가 부족한 상황이 오자 댄토니는 마버리에게 경기에 출장시킬테니 준비하라고 지시했지만, 마버리는 이에 출장지시 거부로 화답하며 닉스가 마버리에게 자체 징계를 내리는 등 마버리와 닉스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2009년 2월에 마버리는 드디어 바이아웃당하며 끔찍했던 닉스와의 5년에 종지부를 찍었다.

2.2.5. 보스턴 셀틱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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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스에서 퇴단한 마버리는 보스턴 셀틱스에서 조금 뛰더니 NBA 무대에서 쓸쓸하게 모습을 감춰버렸다. 10시즌이 지난 후 다시 가넷과 재회했으나 마버리의 기량이 급속하게 떨어졌다.

그 후 마버리는 마리화나를 피우거나 바셀린을 먹는 걸(…) 인터넷 방송으로 보여주는 등 반쯤 정신줄을 놓은 듯 했다가, 2010년 뜬금없이 중국리그에서 뛰겠다는 소식을 전한다.

커리어를 보면 알겠지만 뉴저지, 피닉스 등 마버리가 떠난 이후 각 각 제이슨 키드, 스티브 내시 라는 초 엘리트 PG가 들어오고 팀 성적 역시 대폭 상승하는 등 안타까운 커리어를 가지고 있다. 늘 본인이 에이스가 되고 싶어했고 코비, 아이버슨 만큼 욕심이 많은 선수였지만 그 과한 욕심으로 선수 커리어를 본인 기량만큼 완성하지 못한 선수이다. 현재 리그 트랜드에 맞는 공격형 PG이나 변명에 불과하다. 2000년대 중반 길버트 아레나스가 보여준 퍼포먼스는 그가 마버리 보다 더 강한 클러치 능력과 스타성을 보인것이며 무엇보다 당시도 지금과 같은 공격형 PG의 시대도 아니었다. 또한 데릭 로즈 역시 데뷔 3년차 시즌에 MVP를 수상할 정도로 압도적인 활약을 펼쳤고 무엇보다 이 두선수 모두 본인이 에이스로 팀 성적 상승에 큰 기여와 임팩트있는 기량을 보였다. 하지만 마버리는 뉴지지, 피닉스 시절 그토록 원하는 1옵션과 본인 중심을 구성해주었어도 늘 하위권을 맴돌았고 베테랑인 된 닉스 시절에도 전혀 성숙하지 못하고 불만만 표출하는 일반 NBA팬 입장에서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한 선수로 남게 되었다. 물론 아레나스는 훗날 급격하게 무너졌지만 당시 선보인 플레이만큼은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선수였다.

다만 밑에 언급된대로 마버리의 커리어 당시 그를 제대로 활용하는 방법을 몰랐던 건 명백한 사실이다. 위에서 아레나스 얘기가 나왔는데 아레나스는 포지션 출장만 포인트가드에서 한 사실상의 슈팅가드였으며 그는 앨런 아이버슨이나 초창기 마이클 조던처럼 자유로운 공격을 했으며 리딩부담을 크게 지지 않았다. 반면 마버리의 네츠 시절 감독이었던 바이론 스콧, 피닉스 시절 프랭크 존슨 둘 다 그를 득점 많이 하는 포인트가드로 봤지, 공격에서 프리롤을 주진 않았다. 피닉스 시절엔 팀 내에 어린 선수들만 가득했고 (노장인 페니는 별 도움이 안 되는 시절이었다), 네츠 시절에도 새가슴 키스 밴 혼 정도를 제외하면 별 옵션이 없어서 슛을 많이 던질 수 밖에 없었던 거지, 아레나스랑 아이버슨처럼 자유롭게 공격할 기회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그냥 슛만 많이 던진다고 장땡이 아니다. 아레나스나 아이버슨처럼 팀 전술 자체가 이 선수가 득점하는 상황을 최우선시하도록 짜여지는게 중요하지, 팀 공격이 망해가는 상황에서 슛 던질 선수가 없어 리딩하도록 되어있는 선수가 1대1 하다 슛 던지는게 이상적인건 아니다. 당시 마버리는 명백히 리딩가드 롤이었으며, 위에 언급한 두 선수와 같은 상황이 결코 아니었다.

물론 아레나스와 아이버슨은 놀라운 재능의 소유자들이다. 또한 마버리가 이들과 같은 상황이어도 이들만큼 성공하리라고 장담할수도 없다. 그러나 포인트는 마버리는 이들만큼 본인 기질에 딱 맞는 역할이 주어진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마버리가 활용하기 까다로운 선수였던 건 맞지만, 그의 전성기 당시 듀얼가드 활용법이 거의 없었고, 그의 감독들은 당시 듀얼가드를 크게 활용하지 않았다.

2.3. CBA 시절

산시 종위 브레이브에서 15경기 22.9점 5.9리바운드 9.5도음 2.6스틸을 기록했지만 팀은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게 되고 포산 드럴라이온즈로 이적하게 된다. 포산에서는 32경기 25.2점 4.2리바운드 5.7도움 1.6스틸을 기록했지만 역시나 팀은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게 되고 베이징 덕스로 2011년에 이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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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덕스에서 24.3점 5.3리바운드 6.4도움 2.2스틸을 기록하며 팀을 플레이오프로 올리는데 일조하였고 플레이오프에서는 13경기 33.6점 4.6리바운드 6.0도움 3.1스틸을 기록했고 결국 11-12 시즌 베이징 덕스에서 처음으로 챔피언 반지를 꼈다. 당시 외국인 선수는 파이널 MVP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MVP는 대만 출신 리쉐린에게 돌아갔다) 팬들은 대신 동상을 세워주며 마버리에게 감사를 표했다.

준결승전 승리 이후 감정이 북받쳐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12-13 시즌에는 비록 챔피언이 되는데에는 실패 했지만 정규시즌 29.5점 4.6리바운드 5.3어시스트 2.2스틸을 기록했고 플레이오프에서는 22.0점 3.2리바운드 8.2어시스트 2.3스틸을 기록했다. 13-14시즌에는 정규리그에서 16.9점 4.7리바운드 5.3어시스트 1.0스틸에 출전시간도 많이 줄었지만 플레이오프에서는 25.7점 4.8리바운드 4.1어시스트 2.5스틸을 기록해 CBA 두번째 우승, 이어서 14-15시즌 정규리그 16.3점 3.2리바운드 5.7어시스트 1.2스틸 플레이오프 24.6점 4.2리바운드 6.6어시스트 2.1스틸을 기록하면서 CBA 세번째 우승을 거머쥐는데 성공한다. 베이징 덕스는 마버리의 활약으로 2011년부터 2015년까지 4년동안 3번의 우승을 달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2017년 4월 25일, ESPN 보도에 따르면 베이징 덕스와의 계약이 1년 남은 시점에 지도자로 팀에 남아달라는 구단의 제안을 거절하고 CBA 다른 구단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나가겠다고 선언하였다. #

이후 베이징 플라이 드래곤스로 이적했으며 2018년 2월 12일, 시즌 최종전을 끝으로 은퇴했다.

마버리의 중국생활을 그린 영화가 작년에 개봉되었는데 소녀시대 출신 제시카가 출연했으며 같이 찍은 사진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영화는 유투브에서 볼 수 있다.

3. 플레이 스타일



10년 늦게 태어났어야할 테크니션. 듀얼 가드라는 말이 정립되기도 전, 그나마 있어도 트위너라는 말로 포인트 가드, 슈팅 가드 둘중 하나도 제 몫을 못하는 반쪽짜리 어중간하게 낀 선수를 뜻하던 시기에 듀얼 가드로써 활약했던 선수다. 이미지와는 달리 다양한 스킬을 갖춘 다재다능했던 선수였고, 드리블은 물론 꽤 넓은 슈팅 레인지와 나쁘지 않은 성공률, 팀원을 이용할 줄 아는 패싱능력까지 갖춘 엘리트 듀얼가드였다. 지금 NBA에 나타났다면 데릭 로즈 러셀 웨스트브룩, 카이리 어빙 등과 같이 듀얼 가드의 활용방법이 정립되어있기에 더욱 더 좋은 효율을 보일 수 있었을 선수.[10]

다만, 성장환경이나 플레이 스타일 상 이기적인 플레이어라는 문제점이 심각했던 선수다. 빅맨을 활용하는 픽앤롤 공격을 능수능란하게 할 줄은 알지만 근본적으로 자신의 드리블과 풀업 점퍼같은 스킬에 자신감을 가지고 밀어붙이는 개인주의 스타일을 주체할 수 없어서 어느 정도는 에이스 놀음에 맞게 팀원들이 수동적으로 되어야할 필요가 있었다. 마버리와 팀이 같이 잘나가던 시기인 02~03 피닉스,03~04 뉴욕이 대표적인데, 이때 마버리의 빅맨 파트너는 파릇파릇한 신인시절 아마레 스타더마이어, 뉴욕에선 리그에서 가장 픽앤팝에 능한 이타적인 센터 커트 토마스였고, 마버리의 옆에는 선즈시절엔 말년이었지만 BQ가 뛰어나고 이타적인 앤퍼니 하더웨이가 옆에 있었고, 닉스 시절엔 캐치앤슛의 달인인 앨런 휴스턴이 있었다. 그만큼 마버리가 에이스 놀이하기 좋은 이타적이고 공 소유욕이 적은 선수들이 주변에 있었기에 마버리의 활약이 빛날 수 있었던 것.

그런 점에서 NBA 커리어 후반에 저니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네츠 시즌 막판에는 자기를 제외하면 주전이 아무도 안남아서 억지로 혼자 뛰었고, 선즈에서는 03~04시즌 초반 부진으로 감독이 짤리자마자 자신을 대놓고 싫어한 마이크 댄토니가 헤드코치로 부임해서 쫓겨났고, 닉스에 와서는 자신과는 정반대 성향의 정통파 올드스쿨 농구를 지향하는 래리 브라운과 만나는 바람에 커리어가 꼬이게 되었다.

브라운 감독은 올드스쿨을 지향하는 사람이지만 아이버슨을 전격적으로 슈팅 가드로 옮기고 수비 시에는 포인트 가드를 맡는 파격적인 포지션 이동을 실시했다. 따라서 적절한 리딩과 사이즈를 갖춘 에릭 스노우를 영입했고 꼴찌였던 식서스는 플레이오프를 넘어 파이널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즉 브라운은 당시에는 희귀한 유형의 선수인 아이버슨의 재능을 제대로 살린 위대한 코치이다. 또한 브라운 감독은 아이버슨을 포함해서 레지 밀러, 천시 빌럽스 등 선수 뿐만 아니라 소속팀(스퍼스, 페이서스, 식서스, 피스톤즈)도 우승권팀으로 성장시킨 역대급 감독인데 유독 마버리와는 영 좋지 못한 호흡을 보여주었다.[11]

사실 마버리의 비극은 당시 농구판이 그와 같은 선수를 어떻게 기용할 줄 몰랐다는 것에 있다. 실제로 아이버슨조차도 브라운과 호흡을 맞춰 MVP를 수상했으나, 그 브라운조차도 계속되는 마찰에 결국 팀을 떠났고, 제대로 활용되지 못할때는 MVP시절의 위력을 다시 찾지 못했다. 마버리 이전에도 매직 존슨, 아이제아 토마스, 케빈 존슨, 팀 하더웨이, 페니 하더웨이 등 득점력 좋은 포인트 가드들은 많았으나, 이들은 어디까지나 득점 잘하는 선수들이었고 자신의 주 임무가 게임리딩이란 걸 이해하는 선수들이었다. 예를 들어 페니 하더웨이는 언제든 고득점을 퍼부을 수 있는 선수였으나 샤킬 오닐을 활용하는 걸 우선시했다.

그러나 마버리는 패스와 리딩도 잘했지만 어디까지나 본인의 득점이 첫 번째 선택지였다. 능력을 떠나 이런 태도 자체가 당시 감독들에겐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졌고, 아이버슨을 다루며 스트레스를 받을대로 받은 브라운 역시 더 이상 그런 PG를 용납하지 않았다. 실제로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공격형 PG란 득점력으로 리딩력을 보조하는 선수지, 길버트 아레나스나 전성기 당시 데릭 로즈처럼 득점하는 선수인데 리딩 하는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마버리가 77년생이란 걸 생각하면 10년이 아니라 5년만 늦게 태어났어도 듀얼가드들의 전성기를 활짝 열 수도 있었다.

4. 농구화

대학에서 정식으로 농구를 하고 왔긴 하지만 스트릿 볼러 출신답게, 당시 믹스테잎으로 큰 인기를 끌던 And1과 계약했다. 초창기 And1이 NBA에서 확고하게 존재감을 발휘할 수 있게 해 준 일등공신. And1의 Quest를 정말 오래 신었고, 심지어 자기 시그니처인 Starbury가 출시된 후에도 Quest를 더 자주 신었다.

뉴욕으로 이적 후에는 And1과 결별하고 아예 자기 별명을 딴 Starbury 브랜드를 직접 론칭하고 멋들어진 로고도 새로 만들어 신발을 발매했다. 이 때 새로 발매한 Starbury 농구화의 가격은 정가 15달러 정도. 스트릿 볼러 출신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잊지 않고, 길거리의 가난한 사람들도 신을 수 있도록 저렴한 가격에 계속 시리즈를 발매했다. 이기적이고 에고가 강한 플레이스타일과 다르게, 성품은 인간미 넘치고 고향사랑에 자기 정체성을 프로선수가 돼서도 잊지않아 사회에 환원한 훌륭한 선수. 계약문제나 플레이 스타일에서 상당히 이슈가 많았음에도, 커리어 내내 선수들 사이에서는 트러블이 없고 좋은 말만 나왔던 선수였다.

5. 여담



[1] 실제 발음이나 표기는 마리가 맞다. 동일한 음가인 bury를 생각하면 편하다.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bilingual인 전태풍도 한국식으로 읽을때는 분명하게 마리라고 발음한다. [2] 10년 이상 커리어 평균이고 선수 말년은 기록이 하락하니 사실 준수한 편이다. PG포지션에서 가장 슛이 좋았던 선수들이 존 스탁턴, 스티브 내시, 마크 프라이스인데 이 선수들과 비교하면 떨어지는 것이지 마버리는 이 선수들 보다 더 공격적이고 슛을 많이 던진 선수였다. [3] 현역인 웨스트브룩의 야투 성공률과 비슷하다. [4] 고교 졸업반때 자기 농구팀 팀메이트가 갱단에게 총맞아 죽는걸 지근에서 목격했다고 한다. [5] 구체적으로 브루클린의 코니 아일랜드 (Connie Island)란 지역 출신인데 여기가 얼마나 막장인지는 덴젤 워싱턴, 레이 앨런 주연의 영화 "He Got Game"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이 지역에서 나름 거물 갱스터격인 인물이 주인공인 농구유망주 Jesus (레이 앨런이 맡았다)에게 내 도움이 없으면 안된다며 코니 아일랜드 출신 흑인 유망주가 성공한 역사가 없다고 하는데(주인공 아빠도 꽤나 유망주였지만 가난에서 벗어나는데 실패했다) 그 이유가 빈번한 폭력과 범죄, 마약, 여자들의 유혹, 그리고 사랑한다는 핑계로 사돈에 팔촌까지 돈 뜯어내려는 가족들 등 다양했다. 이때 지저스가 "스테판 마버리는요? 그는 성공했잖아요"라고 하곤 뿌듯한 미소를 짓자, 이 갱스터가 "그래, 그는 예외지"라고 한다. 여하튼 이 지역에서 성공하는 건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극히 드문 케이스인 것. [6] 사실 코니 아일랜드는 현재는 범죄율이 뉴욕시 내에서 중간 정도 수준까지 떨어졌지만 마베리가 자라던 80년대~90년대 초반만 해도 악명높은 우범지역이었다. 물론 위에 언급된대로 현재는 훨씬 나아졌으며, 브루클린은 자체가 과거와 비교도 안되게 경제수준이나 치안이 좋아졌다. 브루클린은 극심한 젠트리피케이션이 이뤄진 도시라, 과거와 현재 모습이 매우 다르다. 현재는 부촌에 속하는 포트그린에서 태어난 마이클 조던(63년생)의 경우도, 부모가 애들 키우기에 환경이 안 좋다며 고향 노스캐롤라이나로 이사가기도 했다. [7] 전 시즌과 비교해보면 96년 신인왕 데이먼 스타더마이어는 76표를 얻어 2위 아비다스 사보니스(17표)를 여유있게 제쳤다. 98년 신인왕은 팀 던컨이었으니 설명은 생략한다. " 카멜로 앤서니가 받는게 맞는게 아니냐"는 의견이 나왔던 04시즌 신인왕만 하더라도 르브론 제임스78표에 카멜로 40표로 아이버슨vs마버리보다 표 차이가 적다. [8] 마베리 본인 말에 따르면 계약문제보다도 미네소타란 연고지 자체가 컸던 듯 보인다. 마베리는 은퇴 후 한참 지난 2020년에 팟캐스트에서 이적에 대해 언급했는데, 다양한 인종이 있는 뉴욕에서 자란 그는 주민의 절대다수가 백인인 미네소타에서 문화 충격을 겪었다고 한다. 또한 미네소타의 악명 높은 추위가 영향이 컸다고 하는데, "정말 죽을 수도 있다(you could die)"고 느꼈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그는 "케빈과 뛰는 건 즐거웠지만, 미네소타에서 뛰느라 7년을 바칠 순 없었다(loved playing with Kev, he “couldn’t give seven years of my life living in Minnesota")고 말했다. 사실 마베리가 자란 뉴욕시도 미국 내에서 상당히 추운 지역이긴 하지만, 미네소타는 그보다도 훨씬 추운데다가 사계절이 있는 뉴욕과 대비되게 겨울이 길기까지 하다. "추워서 이적했다"는 말이 단순한 변명 수준이 아니란 것. 또한 미국은 워낙 땅덩이가 넓고 지역마다 특색이 강하기 때문에 동부와 중서부, 남부, 서부 등의 문화가 판이하게 다른데, 미네소타는 특히나 중서부 지방의 특색이 강한 곳이다. 실제로 마베리가 울브스 이후 몸담은 팀들은 세시즌을 뛴 피닉스를 제외하면 뉴져지, 뉴욕, 보스턴으로, 전부 그에게 친숙한 동부의 대도시들이다. [9] 인구 비율로 보면 미국 전체의 인구 비율이 2021년 기준으로 백인 59.3%, 히스패닉 18.9%, 흑인 12.6%이다. 뉴욕은 2022년 기준 백인이 37.5%, 히스패닉계열이 29%, 흑인이 23.1%에 달하는 다인종 지역이었고, 보스턴은 백인 44.2%, 흑인 21%, 아시안이 9.56%, 히스패닉이 7.4%이었다. 뉴져지는 백인 55%, 히스패닉 21.6% 흑인 13.1%이었다. 피닉스의 경우 히스패닉 계열이 유독 강세인 지역이라 2020년 기준 백인 42.2%, 히스패닉이나 라틴계가 42.6%, 흑인 7.1%였다. 보다시피 뉴욕과 보스턴은 흑인 비율이 미국 평균의 두배에 달하고, 뉴져지는 미국 평균보다 약간 높고, 피닉스는 흑인 비율은 낮지만 다인종 지역이지 백인 위주 지역은 아니다. 그런데 미네소타는 백인 비율이 2020년 기준 76.3%에 달하고 그 다음으로 높은 흑인 배중이 7%에 불과한 완연한 백인 위주 지역이다. 단순 인종 비율의 문제를 떠나 이민자들의 유입이 활발한 피닉스나 동부 주들과 달리 중서부 주들은 이 지역에서 수세대 동안 생활한 토착 백인들의 문화가 강한 지역이다. [10] 물론 마버리는 10년 넘게 NBA에서 뛰면서 통산 Win Share 63.32로 NBA 통산 74위에 오른 선수이다. 팀 성적이 못받쳐주고 스캔들이 잦아 이기적인 볼호그로 남았을 뿐이지 결코 먹튀나 실망스러운 선수생활은 아니었다. [11] 사실 두 사람이 좋지 못한 호흡을 보이지 못한 것은 마버리의 욕심이 너무 지나쳤기 때문이다. 마버리는 자신이 아이버슨 못지 않은 선수라는걸 보여주고 싶었고 래리 브라운 감독에게 아이버슨 역할을 요구했지만 브라운은 "너는 아이버슨처럼 할 수 없다."라고 전해지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브라운은 마버리의 득점력 혹은 폭발력을 리그 최상급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갈등이 결국 팀 케미스트리 까지 깨지는 대참사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