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전국위원회 의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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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colbgcolor=#0044C9><colcolor=#fff> 출생 | 1912년 5월 31일 |
미국 워싱턴 주 에버렛 | |
사망 | 1983년 9월 1일 (향년 71세) |
미국 워싱턴 주 에버렛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가족 | 배우자 헬렌 하딘 잭슨 (1961~1983) |
학력 |
스탠퍼드 대학교 (
B.A.) 워싱턴 대학교 ( 법학 / J.D.) |
정당 |
|
의원 선수 |
6 (하원) 6 (상원) |
의원 대수 |
77, 78, 79, 80, 81, 82 (하원) 83, 84, 85, 86, 87, 88, 89, 90, 91, 92, 93, 94, 95, 96, 97, 98[2] (상원) |
경력 |
스노호미시 카운티 검사 (1938~1940) 연방 하원의원 (1941~1953 / 워싱턴 2구) 민주당 전국위원회 의장 (1960~1961) 연방 상원의원 (워싱턴 클래스 1 / 1953~19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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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정치인. 워싱턴 주의 상원의원을 지냈으며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유력 주자였다. 민주당 출신의 진보 성향 정치인이었음에도 외교 문제에서 유독 보수적인 성향을 보여, 네오콘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네오콘의 아버지"로 평가받는다.2. 생애
1912년 노르웨이 출신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때 여동생이 잭슨의 생김새가 만화 캐릭터 같다면서 캐릭터 이름을 따다가 "스쿱"이라는 별명을 붙여줬고 자기도 이를 마음에 들어해 성인이 되고 나서도 계속 사용했다. 그는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학사를, 워싱턴 대학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35년 변호사를 개업했는데 아주 성공했고 지역 정계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다.그는 1940년 민주당에 입당해 자신의 고향인 에버렛 지역을 대표하는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는데 이 때가 그의 나이 불과 38세의 일로 전국에서 가장 젊은 하원의원 중 하나였다. 이 때부터 그는 외교 강경파의 모습을 보였는데, 매우 적극적으로 백악관 행정명령 9066호에 동참했고 일본에 강경한 대응을 하자고 주장했다.
1952년, 그는 워싱턴 주의 상원의원 후보로 출마해 압도적으로 승리한다. 그는 매카시즘에는 반대했지만 동시에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잭슨은 내부의 공산주의자를 색출할 것이 아니라 외부의 적과 싸워야한다며 매카시즘의 광신성과 아이젠하워의 온건한 대외정책 모두를 비판했고 핵무기를 옹호하였으며 탄도미사일을 적극적으로 배치해야한다고 주장했다. 1960년 대선에서 존 F. 케네디는 그를 러닝메이트로 삼으려고 하였다.[3][4] 그러나 케네디의 아버지인 조지프 케네디가 린든 B. 존슨을 강력하게 추천하자 헨리 잭슨은 부통령 후보군에서 미끄러지고 대신 민주당 전국위원회(DNC) 의장을 지내게 된다. 그는 DNC 의장으로서 1960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승리를 이끌었고 존 F. 케네디의 측근으로 활약했다.
케네디가 사망한 후, 그는 의회에서 아메리카 원주민 및 흑인 민권 운동의 수호자로 거듭났고 의회에서 가장 흑인 민권 쟁취에 적극적인 의원으로 평가받았다.[5] 그 외에도 그는 1970년 국가 환경 정책법(National Environmental Policy Act)을 통과시키는 등 내치에서는 확고한 진보 성향을 보였다.
그러나, 외교적으로는 1960년대 베트남 전쟁 이후 더욱 보수적인 성향이 두드러졌다. 그는 공산주의를 증오하는 멸공주의자였으며 베트남 전쟁에 있어서도 닉슨, 키신저보다도 더더욱 강경한 입장을 내비쳤다. 리처드 닉슨은 그런 헨리 잭슨을 좋아했으며 대통령에 당선되자 그에게 국방장관 자리를 제의했는데, 대권 생각이 있었던 잭슨은 이를 거절했지만 닉슨의 재임기간 내내 민주당 의원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닉슨과 친하게 지냈다.
1974년, 그는 잭슨-배닉 수정안(Jackson–Vanik amendment)을 발의해, 거주 이전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 국가에게는[6] 최혜국 대우를 유예시킬 수 있다는 조항을 추가하면서 그의 극렬 반공주의 커리어에 정점을 찍었다.[7] 그는 동구권에 살고 있는 유대인의 권익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국방 정책에서도 강경 성향을 보여 B-1, B-2 폭격기 개발을 의욕적으로 추진했다. 워싱턴 주는 유명한 군수 기업 보잉의 공장이 많이 위치한 곳이었는데[8]이 때문에 보잉의 눈치를 보는게 아니냐며 보잉의 상원의원이라는 비아냥도 받게 된다. 소련 정부는 한발 더 나아가 그를 워싱턴의 악마라고 불렀다.
이러한 잭슨의 행보는 민주당 지지층에게 미움을 샀고, 외교적으로 더욱 평화주의 성향으로 기울어가던 민주당의 성향과도 맞지 않아 조지 맥거번 등 당내 진보파와 자주 갈등을 빚게 된다. 조지 맥거번은 1972년 대선 경선 도중 그를 인종차별주의자이자 핵무기광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민주당 경선에 출마한 그는 베트남 전쟁 반대 여론에 타격을 입어 최종 5위로 경선을 통과하지 못했다. 이때 지미 카터가 헨리 잭슨을 지지했다고 한다. 그러나 헨리 잭슨과 지미 카터는 베트남 전쟁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관계가 틀어져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따로 출마하게 된다. 1976년 대선의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헨리 잭슨은 가장 유력한 후보자였다. 휴버트 험프리가 불출마하며 노동조합의 표가 잭슨으로 갈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바뀐 경선 방식에 잭슨이 적응하지 못한데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비주류적인 입장, 노조의 지지 부족[9] 등등으로 인하여 지미 카터가 대선 후보로 결정되었다.
헨리 잭슨은 지미 카터를 지지했지만, 그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도중에는 내내 지미 카터의 외교 정책이 너무 유약하다며 카터를 몰아새우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그는 SALT-II(핵 확산 방지조약)을 반대하는 가장 대표적인 상원의원이었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추방 문제 등 소련 문제에 있어서는 심지어 로널드 레이건과도 협력했다. 잭슨은 분명히 민주당 내 비주류였지만, 계속 상원의원으로는 당선되었는데, 지역구 예산을 엄청나게 잘 타와서 워싱턴 지역 주민들에게 신망이 높았기 때문이다.[10]그와 마찬가지로 워싱턴에서 6선 상원의원을 지낸 워런 매그너슨(Warren Magnuson)과 헨리 잭슨은 사적인 친구 사이였으며 함께 힘을 합쳐 예산을 엄청나게 끌어 모아서 미국 전체 공공 사업 예산의 1/6을 독차지했다.
로널드 레이건이 당선되면서 그는 더욱 공화당에 친화적인 성향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죽는 날까지 민주당을 탈당하지는 않았다. 1983년,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열불을 내며 소련 정부를 비난하는 성명을 냈는데, 너무 흥분한 나머지 심장에 무리가 와 심혈관 파열로 사망한다. 그가 죽자, 미국 국방부는 이례적으로 잭슨기념사업재단에 거액을 후원했고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그를 가장 위대했던 상원의원이라고 칭송했다.
3. 평가
3.1. 네오콘의 아버지
관련 문서: 네오콘헨리 M. 잭슨이 오늘날 미국 정치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그가 민주당 내에서 독특할정도로 강력한 개입주의자(interventionist)였고 이에 따라 네오콘의 아버지라고까지 불리기 때문이다. 그는 국내적으로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했지만 그랬기 때문에 공산주의나 독재가 시민의 자유, 인권, 평등을 막을 이유가 없고 만약 그런다면 미국이 적극적으로 나서 이를 교정해야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헨리 키신저의 데탕트를 "악의 세력과의 협력"이라고 생각해 명확히 반대했으며, 영국, 프랑스, 일본 등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이 가치 외교를 통해 동맹 관계를 구축하여 악의 공산주의와 맞서 싸워야한다고 보았다. 이를 넘어 헨리 M. 잭슨은 이를 위해서라면 강력한 국방이 필수적이며 핵무기와 대륙간 탄도 미사일, 폭격 시스템에 대한 개발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하였다.
로널드 레이건을 비롯한 공화당의 강경 보수 지도자들은 그러한 잭슨의 의견에 큰 공감을 표했으며, 잭슨 사후 잭슨의 의견에 동조하던 많은 사람들이 레이건의 공화당으로 당을 옮겨 공화당의 당권을 쟁취하게 된다. 잭슨이 네오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것은, 이러한 성향의 특수성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헨리 M. 잭슨 밑에서 일하던 많은 보좌진들이 네오콘의 1세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폴 울포위츠(Paul Wolfowitz), 리처드 펄(Richard Perle), 더글러스 페이스(Douglas Feith), 빌 크리스톨(Bill Kristol)[11] 등 무시무시한 라인업이다.[12]
특히 헨리 잭슨의 밑에서 일하던 보좌진 다수가 딕 체니 밑으로 들어가 일했다는 분석이 있다. 잭슨의 전기 작가인 로버트 카우프만은 이런 이유 때문에 잭슨이 살아 돌아온다면 가장 강경하게 이라크 전쟁을 지지했을 것이며, 이라크 전쟁은 철저히 잭슨의 이데올로기를 따르는 사람들의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민주당 내에서도 "스쿱 잭슨 민주당원"(Scoop Jackson Democrat)이라는 자유주의적 매파 파벌이 한동안 존재했다. 조 리버만이 대표적인 스쿱 잭슨 민주당원 출신 인사이다. 다만 이라크 전쟁의 실패가 명확하게 두드러지는 현재 스쿱 잭슨 민주당원 파벌은 현재로서는 사실상 해체되었다고 평가받는다.
아무튼 네오콘의 형성에 미친 지대한 영향 때문에 현대 민주당 지지층에게서 평가는 아주 나쁜 편이다. 헨리 M. 잭슨의 제자와 지지자들이 조지 W. 부시 행정부에 그대로 들어가서 온갖 삽질을 했기 때문에 사실상 민주당 지지층은 그를 흑역사 취급한다. 도리어 공화당에서 평가가 더 좋다. 친공화당 성향으로 유명한 이상돈 교수는 "지미 카터 같은 아마추어가 대통령이 되었는데 반해 헨리 잭슨 같이 대통령 자질이 넘쳐 흐르는 사람이 별 볼일 없는 상원의원 자리에만 머무른건 미국 역사의 비극"(...)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4.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40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워싱턴 2구 |
|
66,314 (57.40%) | 당선 (1위) | 초선 |
1942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39,628 (59.86%) | 재선 | |||
1944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74,676 (60.39%) | 3선 | |||
1946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54,089 (53.07%) | 4선 | |||
1948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83,813 (61.64%) | 5선 | |||
1950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73,296 (61.18%) | 6선 | |||
1952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워싱턴 | 595,288 (56.23%) | 초선 | ||
1958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597,040 (67.32%) | 재선 | |||
1964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875,950 (72.21%) | 3선 | |||
1970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879,385 (82.43%) | 4선 | |||
1976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1,071,219 (71.84%) | 5선 | |||
1982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943,665 (68.96%) | 6선[13] |
5. 여담
- 미국 상원의 의원 사무실 건물인 필립 A. 하트 빌딩(Philip A. Hart Senate Office Building)에 처음으로 입주한 의원이다. 원래 미국 상원 의원 사무실은 러셀 빌딩(Russell Senate Office Building)만 있었는데 상원이 다루어야할 정책이 많아지고 컴퓨터 시대가 도래하자 미국 정부는 새로운 빌딩을 지어 공간을 확충하고자 했다. 많은 상원의원들은 익숙한 러셀 빌딩을 벗어나려 하지 않았는데 그래서 잭슨 의원은 중진 의원이 앞장서 모범을 보여야한다며 보란듯이 하트 빌딩로 사무실을 옮겨 빌딩의 1호 입주자가 되었다.
[1]
헨리 M. 잭슨 의원 사망으로 공석이 된 워싱턴 주 상원의원 자리를 채우기 위해 주지사에 의해 임명됨.
[2]
98대 상원 임기 도중 사망
[3]
존 F. 케네디와 로버트 F. 케네디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대소련 강경파이자 강력한 반공주의자였다. 그런 로버트 케네디가 오늘날 반전 시민운동의 아이콘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순전히 로버트 케네디가 베트남전의 여론이 나빠지자 대선 승리를 위해 슬그머니 말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존 케네디가 잭슨급의 대외 강경파라는건 아니었고 소련과 핵군축 협상에 나서고 평화공존에 대한 연설을 하기도 했다. 특히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로 이런 경향이 더 강해졌지만, 알다시피 그 이후 케네디의 임기는 길지않았다.
[4]
사실 잭슨도 첫번째 선택은 아니었고 첫번째 선택은 미주리 주 상원의원
스튜어트 시밍턴이었다.
[5]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특별히 그에게 감사를 표할 정도였다.
[6]
이는 동구권의 유대인 거주 제한 정책 및 강제수용소 정책을 겨냥한 것이다.
[7]
이 법은 너무 극단적이어서 닉슨 대통령에게도 비판을 받았으며 백악관과의 협상을 거쳐 통과되었다. 탈냉전 시대에는 시대에 맞지 않는 법안이라는 비판이 일었고 이에 2012년 오바마 행정부는 이 법안을 폐지한다.
[8]
현재도 워싱턴주 에버렛과 랜튼에 공장이 위치해 있다. 잭슨 의원의 지역구인 에버렛에선
보잉 767,
보잉 777,
보잉 787기를 생산하고 있고[14] 랜튼 공장에선 현재
보잉 737기를 생산하고 있다. 과거엔 본사도 있었지만 1997년
맥도널 더글라스와 합병 후 시카고로 본사를 이전했다. 이 본사 이전이 최근에 발생한
보잉 737 MAX 사고와 관련해 보잉의 문제점들의 시발점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9]
이 당시 노조는 험프리를 지지했지만, 험프리가 확실하게 희망을 접었을 때는 지지를 바꾸기 너무 늦은 때였다.
[10]
처음 당선된 선거를 제외하고 출마한 모든 상원의원 선거에서 주의 모든 카운티를 싹쓸이했다.
[11]
네오콘 0세대인
어빙 크리스톨의 아들이다.
[12]
다만 불개입주의 성향이 강한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자 이들은 하나같이 공화당을 비판하고 있으며 빌 크리스톨 같은 경우 아예 2020년 대선을 앞두고 수십년만에 다시 민주당에 복당하기도 했다. 당연히 민주당 지지자들 반응은
이뭐병.
[13]
1983.9.1 임기 중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