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1 07:37:32

스가모 아동 방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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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사건 경위3. 발단4. 전개5. 발견과 이후6. 기타7. 유사 사건8. 관련 문서

1. 개요

巣鴨子供置き去り事件

1988년 도쿄도 도시마구(豊島区)의 모 아파트에서 어린이 4명만 두고 어머니가 집을 나갔던 사건. 일본 영화 < 아무도 모른다>의 모티브가 된 사건이기도 하다. 기사

2. 사건 경위

  • 1979년 대출에 의한 부담으로 장남의 아버지가 갑자기 사라진다. 그 후 첫째 아들이 초등학교에 갈 나이가 되어도 취학통지가 오지 않자 어머니는 관공서를 찾아갔는데 그 때 사라진 아버지가 혼인신고 출생신고를 하지 않았던 사실을 알게 된다.
  • 1982년 둘째 딸[2]이 태어남. 출산장소는 병원 등이 아닌 집이었다.
  • 1983년 셋째 아들[3]이 태어남. 이 아이는 출생 직후 사망했다.
  • 1985년 막내 딸[5]이 태어남. 2세 때 폭행으로 사망
  • 1987년 가을 무렵 당시 사귀던 남자친구와 동거하기 위해 아이들의 어머니는 첫째에게 동생들을 떠맡기고 집을 나간다. 이후 어머니는 생활비로 몇 만엔 정도를 송금했으며 가끔 아이들을 보러 나타나곤 했다.
  • 1988년 4월 당시 2세[6]였던 막내 딸이 울음을 그치지 않자 그 때 놀러왔던 첫째의 친구들이 옷장에서 막내 위로 뛰어내리거나 때리는 와중에 두부손상으로 결국 사망에 이르렀다.[7]
  • 1988년 7월 17일 집주인으로부터 이 집으로 비행 청소년들이 몰려든다는 신고를 받은 스가모 경찰서는 조사를 위해 경찰을 파견했다. 조사 결과, 세 아이들과 아기의 백골이 발견되었다. 당시 첫째 장남은 14세, 둘째 장녀는 5세, 셋째 차남은 이미 백골화된 상태였으며 넷째 차녀는 3세였다. 당시 부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며, 이후 세간에 이 사건이 알려지게 되었다.
  • 1988년 7월 18일 도쿄도 도시마구에 있는 아파트의 집주인이 "어머니가 집에 아이 3명을 내버려 둔 채 귀가하지 않는다."라고 경찰에 신고하였다. 복지 사무소 상담원이 집을 방문하자 세 아이만 있고 어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방 안에 옷가지들이 산만하게 펼쳐져 있었고, 커튼도 닳아버린지 오래인 상태였으며 음식물 쓰레기가 부패한 듯한 냄새가 가득했다는 상담원의 증언이 있었다.

    첫째에 따르면 아이들 3명은 각각 아버지가 다르지만 어머니와 함께 아파트에서 생활하였으며 학교에 가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1987년 10월에 집을 나간 후 가끔 돌아왔지만 1988년 1월부터는 아예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가끔 2~3만 엔의 생활비를 송금할 뿐 어머니로서 어떠한 역할도 하지 않았다. 첫째는 어머니가 주고 간 생활비로 슈퍼에서 주먹밥 등등의 정크푸드를 사 함께 끼니를 때웠다고 한다. 가스나 전화는 이미 끊겼으며, 전기도 마찬가지였고 집세도 2월부터 미납되어 있었다. 놀랍게도 주변 주민들은 이러한 사정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는 주변의 무관심 때문이거나 어머니의 철두철미한 교육 탓일 수도 있다.

    두 딸들은 영양실조 상태였기 때문에 이 날 아동복지시설에 맡겨졌다. 첫째에게 자초지종을 물었으나 애매한 내용이 많았으며 둘째의 진술에서 첫째가 동생들을 돌보고 있었다는 것이 파악되었다. 아이들은 그동안 편의점 도시락 등의 정크푸드를 먹으며 살고 있었기 때문에 영양실조 상태였다.
  • 1988년 7월 20일 첫째 장남의 출생신고가 안 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언론에 보도되었다. 사실 첫째는 학교에 갈 나이인데도 낮에 놀고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를 의심스럽게 생각한 어른들이 "어느 학교에 다니니?" 라고 물으면 항상 "릿쿄 초등학교"라고 대답했다. 이는 어머니가 그렇게 대답하도록 시킨 것이었다. 릿쿄 초등학교는 릿쿄대학 부설 초등학교로 공부를 잘하는 아이처럼 보여야 했기 때문에 이렇게 시킨 것으로 보인다.
  • 1988년 7월 23일 TV 뉴스에서 이 사실을 안 어머니가 경찰서를 방문한다. 본인의 증언으로 9개월 전에 집을 나왔고 다섯째 막내 딸이 실종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 1988년 7월 25일 막내 딸이 친구들의 폭행으로 사망했으며 시신은 사이타마현 치치부시 근처 덤불에 묻었다는 증언이 첫째로부터 나왔다.
  • 1988년 8월 어머니가 보호책임방임 및 치사 혐의로 구속 기소되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첫째는 막내 딸의 폭행에 가담했다는 혐의와 함께 상해치사 및 사체유기로 도쿄가정법원에 송치되었지만 상황을 고려하여 고아원에 보내졌다. 당시 검사들은 기소가 되지 않는 사건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으나 이 사건만은 굉장히 이례적으로 처리하였다.

3. 발단

사건이 발각된 당시 어머니의 나이는 40세였다.[8]

어머니는 가나가와현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의류학과로 진학했지만 가수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실제 음반도 낸 적이 있었으나 팔리지는 않았다.

그 후 영화에도 잠깐 나왔던 것처럼 백화점의 판매원으로 일하다가 그 때 만난 남성과 동거를 시작하면서 4명의 아이들이 방치되기 시작한다. 결국 이 남성과의 결혼도 부모의 반대로 실패하고, 사건이 발각된 후 둘 사이에 생긴 아이는 양자로 보내졌다.

이 사건의 발단은 첫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살 때부터 일어났다. 사실 아이들의 어머니는 당시 아버지와 결혼상태인 줄 알고 있었으며 당연히 혼인신고도 되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혼인신고는 되어 있지 않았다.

첫째가 태어난 후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출생신고를 부탁했으나, 아버지는 출생신고를 하지 않았음에도 했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이것이 이 사건의 원인이 되었다.

4. 전개

아버지는 다른 여성을 만나면서 커다란 액수의 대출을 받고 사라진다. 이 때가 딱 첫째가 초등학교에 취학할 나이였으나 어떤 통지서도 날아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구청에 문의 후 자신의 혼인신고와 아이들의 출생신고가 안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때 어떤 조치를 취했다면 이 사단이 나지 않았겠으나 결국은 이 사실을 끝까지 숨기는 결정을 하고 만다.

그 후 다른 남자들을 만나며 임신하면 집에서 출산했다. 그렇게 4명의 아이들을 낳았는데 병으로 사망한 셋째는 집에 은폐했다.

5. 발견과 이후

어머니는 5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대부분 집에서 출산했고 출생신고조차 하지 않았다.[9]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를 기대하고 있었지만 출생신고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취학 통지는 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행정기관이나 관계기관에 어떠한 문의나 상담을 하지 않았다. 교재를 사주고 공부를 시키는 등의 교육을 하긴 하였지만 그 수준은 매우 낮아 장남은 당시 14세였는데도 자신의 성만 한자로 쓸 수 있었고 이름은 히라가나로만 쓸 수 있었다.

수사 과정에서 차남이 사망한 이후의 행적이 밝혀졌다. 사건 발생 2년 전인 1985년 2월, 차남이 우유병을 입에 문 채 죽어 있었다. 어머니는 처리가 어렵다는 이유로 신고하지 않고 그대로 비닐 봉투에 숨겨 두었으며 스가모로 이사할 때도 가방에 넣어 이동했다. 그나마 벽장을 불단으로 꾸며 비교적 깨끗하게 관리하였고 제물(祭物)도 올렸다고 한다. 경찰이 발견한 백골 시신은 그 때 사망한 차남이었다.

사건 이후 이들 중 딸 자매는 어머니가 다시 데려갔고 이름을 바꾸고 평범하게 살고 있지만 첫째는 아직까지 행방이 묘연하다.[10]

6. 기타

JTBC에서 방송 중인 세계 다크투어에서 이 사건을 다뤘는데 이 문서에 서술된 정보와는 내용이 약간 다르거나 알려지지 않은 내용들이 있다. # #
  • 보통 아이들의 어머니에게 모든 비난이 집중되는데 문제의 발단은 아버지가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던 것과 일각에서는 일본의 호적 문제라고도 보고 있다. 일본의 호적에서는 부부와 미혼의 아이가 가장 작은 가족 단위인데 혼인신고도 남편이 해야 하며 부부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날 경우, 1차적으로 아버지에게 아이의 모든 권리가 있었다고 한다. 호적에 부인을 올리지 않고 출산 이후 사라져 버리는 경우나 일부러 부인을 호적에 올리지 않는 경우에는 아이들이 아버지의 호적에 올라갈 수 없게 되어 출생신고도 안 된다는 것이다. 출생신고를 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 아버지가 사라지면서 할 수 없게 된 것이라고 한다.[11]
  • 1987년 7월, 도쿄 소방청에 둘째가 신고했던 적이 있다고 한다. 내용은 '엄마가 많이 아파요.'였는데 현장에 출동한 경찰이 쓰레기로 가득찬 집 내부를 보게 됐고 아프다는 어머니가 보이지 않아 일단 철수하게 된다. 출동한 경찰은 어처구니 없게도 집 안 상황을 보고서 부모님이 어디 있는지, 집 안이 왜 그 지경인지, 누가 신고했으며 사고 경위가 어떻게 된 것인지 등 아이들에게 일절 묻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다음날 다시 찾아갔을 때 '일이 늦게 끝났고, 친구의 아이들을 잠시 봐주고 있는 것이다. 괜찮다.' 라는 어머니의 말에 경찰이 철수했다고 한다. 이로써 당국이 아이들을 구조할 수 있는 가장 큰 기회를 놓치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 막내의 사망사건은 넷째의 입가에 묻은 김 조각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집 안에 컵라면을 놔뒀는데 가뜩이나 부족한 음식을 말도 없이 먹은 것으로 보고 첫째가 넷째를 다그치자 이를 보고 놀란 막내가 소변 실수를 했고, 이로 인해서 울기 시작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친구들의 악행이 진행되던 중 그만두라고 말렸다고 한다. 이후 과거에 어머니가 셋째의 시신을 처리했던 방식대로 비닐에 싸서 놔뒀다가 며칠 뒤 부패로 인한 악취 등을 견디지 못하고 친구 둘과 함께 유기를 계획한다. 유기할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지하철에 탑승하지만 다시 돌아올 길을 걱정한 친구 한 명이 도중에 다시 돌아가버리고, 막내의 시신은 히즈지야마 공원에 묻었다고 한다. 첫째가 막내의 시신을 유기한 이유로는 부패가 진행 중인 시신을 방치해서 문제가 생길 경우 주변에서도 자신들의 존재를 알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해 어머니가 곤란해져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 1987년에 어머니가 집을 나간 뒤 아이들이 발견되기 6개월 전부터는 아예 아이들을 보러 오지도 않았고 첫째만 생활비를 받기 위해 외출을 했다고 한다. 하다못해 공과금을 해결한 상태에서 생활비를 줬다면 아이들의 생활이 그 정도로 처참하지는 않았을 텐데 대충 몇만 엔 쥐어주고 돌려보내는 식이었고, 공과금에 대해서 알 리 없는 아이들은 전기와 수도가 끊어지면서 어머니의 명령('외부 사람들에게 보이지 말 것.' 등)도 거부한 채 가까운 공원 등에서 간단하게 씻거나 물을 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집 안에 있을 땐 바깥으로 소리가 나가지 않도록 창문조차 열지 않았다고 한다.
  • 경찰과 아동복지 상담소 직원에 의해서 발견된 날 아이들 중 한 명이 경찰에게 용기를 내서 했던 말이 '빵 좀 주세요.'였다고 한다. 극심한 영양실조로 인해 건강 상태가 위험하다고 판단되어 둘째와 넷째는 보호소와 병원으로 이송된다. 특히 넷째는 약 10kg이 조금 넘는 기아에 가까운, 심지어 위험하다는 판단이 즉시 내려질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현장에서 '얘들은 사촌이다. 친동생이 아니다.' 라고 한 뒤 도주했으나 동생들 걱정과 다시 되찾겠다는 생각으로 3일 만에 경찰서를 찾아왔다고 한다. 이때 두 아이 모두 자신의 동생이며 자신이 돌보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 다음날 어머니가 나타나서 막내는 어디있냐고 소동을 피우는 과정에서 막내의 사망이 밝혀졌다고 한다.
  • 셋째가 발견된 것은 7월 17일이 아닌 22일로, 실내 수색 중 벽장 안에서 시신이 발견됐다고 한다. 정확한 사인은 알 수 없으나 골절 등의 학대 흔적이 없었고 첫째와 어머니의 반응 또한 다소 담담했던 것으로 보아 유아돌연사로 보고 있다고 한다. 막내가 사망했을 때에도 비닐에 싸 벽장에 넣어놨던 이유도 어머니의 과거 행동을 보고 따라한 것으로 보고 있다. 기본적인 교육도 받지 못했고 외부에도 알릴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첫째는 어머니가 했던 행동을 그대로 따라했다가 부패로 인해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해서 유기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 첫째는 상해치사와 시체유기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판결문에는 "어머니만 있으면 일어날 수 없었던 사건이며 교육적 조치가 필요하다. 소년원이 아닌 아동 자립지원시설(보호원)에 보낸다."는 내용이 있었으며 어머니는 보호자 유기, 유기치사 혐의로 재판을 받았는데 징역 3년, 집행유예 4년이 선고되었다. 판결문에는 "출생전달을 하지 않고 학교도 다니지 못하게 하는 등 보호자로서 자각이 없고 방치가 계속되면 생명이 상실될 위험이 있다. 부모의 책임을 포기한 죄는 무거우나 동거 상대와 결혼하고 보호를 맹세하고 있는 것을 고려, 자력갱생의 기회를 주기로 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낮은 처벌과 판결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처벌을 위해 또 다시 가장 심각했던 문제인 보호자 부재 상황을 만들기보다는 기관의 관리하에 보호자로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준 것으로 보고 있다. 아사히신문 토요판 영화의 여인에서 첫째는 학교에 다시 다니면서 학생회장을 역임하였다고 보도하였다.
  • 사망한 셋째와 막내는 시신을 거둬서 화장했고 남은 아이들 셋은 어머니에게 입양이 되는 방식을 통해 정식으로 가족이 됐다고 한다. 이 문서에서는 첫째의 행방은 알 수 없다고 했으나 방송에서는 세 아이 모두가 입양 절차를 밟는 방식으로 진행됐다고 한다. 여기에서 애초에 출생신고를 직접 할 수 없었다면 입양하는 방법을 선택하면 되지 않았느냐고 할 수 있지만 고정적인 수입이 보장돼 있으면서 아이들을 충분히 양육할 수 있는 환경이 되어야 심사를 거쳐 진행될 텐데 본인에게는 해당 사항이 거의 없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고, 수 년에 걸쳐 같이 살아 왔던 아이를 내치지도 못한 채 방임한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첫째가 부모의 부재를 대신해서 동생들을 지키려 한 것으로 보고 있다.[12]

7. 유사 사건

8. 관련 문서



[1] 1973년 10월생이며 현재 나이는 [age(1973-10-01)]세이다. [2] 1982년 11월생이며 현재 나이는 [age(1982-11-01)]세이다. [3] 1983년 11월생. [4] 1984년 9월생이며 현재 나이는 [age(1984-09-01)]세이다. [5] 1985년 9월생. [6] 당시 생일이 지나지 않았다. [7] 당시 첫째가 친구들과 함께 폭행에 가담했다는 혐의가 있었으나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으며 고아원 송치가 결정되었다. [8] 1948년생으로 추정 [9] 2남 3녀 모두가 출생신고가 되어 있지 않았으며 둘째 아들이 태어나자마자 사망했음에도 출생신고와 사망신고를 하지 않았다. [10] 그도 그럴 것이 여동생을 친구들과 함께 죽이고 유기한 과거가 있는 이상 입양은 당연히 무리이며 범죄 기록은 당시에는 말소됐겠지만 알려지면 살아가는 게 힘들어지니 사실상 과거를 숨기며 혼자서 살 수밖에 없다. [11] 한국에서는 법률상 혼외로 태어난 아이의 출생신고는 어머니가 하도록 의무화되어 있다. 일본과는 달리 남편이 없어도 출생신고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미혼부의 출생신고에 문제가 많았다. 가족관계등록비송 문서 참고. [12]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마이니치 신문에서 보호 중인 동생들이 오빠를 변호한다는 작은 기사를 보게 됐는데 오빠가 친절했다는 관점으로 기사가 난 것을 보고 이를 토대로 영화화를 결심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