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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5B4B4><colcolor=#fbe673> 신라 진흥왕의 제2비
소비 부여씨 | 小妃 扶餘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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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성왕의 왕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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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 ||
백제 | |||
사망 | 미상 | ||
재위기간 | 신라 소비 | ||
553 10월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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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5B4B4><colcolor=#fbe673> 성씨 | 부여 | |
부모 | 성왕 | ||
부군 | 진흥왕 | ||
봉작 | 소비(小妃)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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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제의 공주이자 신라의 왕비. 성왕의 딸, 진흥왕의 소비(小妃, 작은 왕비).2. 행적
백제가 신라에게 한강 하류를 빼앗긴 직후, 553년 10월, 백제 성왕은 딸(소비 부여씨)을 신라 진흥왕에게 시집보냈고 진흥왕은 그녀를 소비(小妃)로 삼았다.[1] 이는 성왕이 한강 하류 영유권 문제를 문제삼지 않고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자는 표현이었지만, 백제의 군사 동맹이자 지원군을 파병한 일본 측 기록인 일본서기에 의하면 성왕은 이미 553년부터 신라를 대대적으로 공격할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결국 소비 부여씨는 전쟁을 준비할 약 1년간의 시간을 벌고 신라를 방심시키기 위한 희생양으로 비정하게 이용된 것이다.결국 소비 부여씨가 신라로 시집간지 약 1년이 지난 554년, 관산성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아버지 성왕이 남편 진흥왕과의 전투 중 사망했고, 한때는 동맹이었던 두 나라의 관계는 이 때부터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이후 소비 부여씨의 행적은 기록이 없다.
3. 여담
- 한국사에서 소비(小妃)라는 칭호로 기록된 유일한 인물이다.
-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 명문에 기록된 위덕왕의 누이 공주와 동일인인지는 불분명하다.
- 견훤이 선조라고 주장했던 진흥왕의 아내 백숭부인(白𪀚夫人)과 동일인일 가능성이 있다. 우선 백제 계승을 내세운 견훤에게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가장 좋은 인물이고, 더불어 신라의 정통성도 동시에 이어받은 셈이므로 삼한일통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다. 한편 한자를 살펴봐도 백(白)은 오방색에서 서쪽을 뜻하며 숭(𪀚)의 부수인 융(戎)은 서융으로서 서쪽 오랑캐를 뜻하므로, 관산성 전투로 백제와 사이가 틀어진 신라 측에서 백제를 그렇게 생각했던 입장을 담은 호칭으로 해석할 수 있다. 동시대의 경쟁자 왕건도 조상을 당나라 황제라고 남겼고 그것이 고려시대 당대에도 의심과 비판을 받았을 정도로[2] 후삼국 당대에는 조상을 유명인에 이어붙이는 윤색이 활발했기에 견훤도 그랬을 가능성은 물론 있으나, 견훤의 이 주장은 고고학적으로 근거가 있다. 다름아닌 진흥왕의 선대왕 법흥왕 때 견훤과 아자개의 고향 상주와 문경 일대가 신라 왕실의 직접적인 투자를 받아 크게 발전했고 그 일대 지방세력가들의 부장품 또한 그 양과 질이 대폭 개선되는 게 고고학적 연구 결과 밝혀지고 있다. 그러니 법흥왕 이후부터 이 일대 호족들이 신라 왕실과 인척 관계를 맺었을 개연성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어쩌면 견훤과 아자개의 부계 선조가 진흥왕과 이 소비 부여씨 사이에서 나온 자손과 혼인 관계를 맺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신라는 모계 혈통이 너무나도 중요했기에 진골이라고 해도 6두품 이하 자손들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들은 절대로 진골이 될 수 없었고 당연히 왕위계승권도 없었다. 물론 소비 부여씨가 진흥왕과의 사이에서 자녀가 있었다면 그 왕자녀는 진골 대우는 받았겠지만 다른 신라 진골들에겐 꽤 꺼려지는 결혼 상대였을테고[3], 그러면 상대는 6두품 이하 왕경인이나 왕실 직할령(문경, 상주, 영주 등이 포함된 죽령, 추풍령 일대)지방 유지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4]
[1]
이미 진흥왕에게는
사도부인이 있었지만, 조선 태종 이전에는 왕비가 동시에 여러 명인 경우가 종종 있었다.
후궁이 아니다.
[2]
왕건의 주장도 아주 허무맹랑한 건 아니었다. 왕건 정권이 후당에 찔러준 정보를 바탕으로 후당의 2대 황제인
이사원이 왕건을 고려왕으로 책봉했을 때, 왕건을 장회무족(長淮茂族)이라 하여 회이(淮夷)의 번성한 일족 출신이라고 추켜세워주었는데 이 회이라는 말은 지역적으로 고구려 유민
이정기 일가가 준독립세력인 평로치청번진을 세웠을 정도로 고구려 유민이 대단히 많았던
회하 유역에서
산둥성 동남부에 걸쳤던 지역을 말한다(주로 현
장쑤성
양저우시 일대). 또한 무려 최소한
한사군의
낙랑군 시대부터 시작하여 고구려 시대를 거치며 융성했던 고구려 계열 성씨가 다름 아닌 '왕씨'였던 것도 강렬한 시사점이 있다.
[3]
심지어는 신라와 대단히 관계가 돈독한
가야
금관국 왕족 출신의 신 김씨들도 문무왕의 시대가 되기 전까진 적어도 진골 상대 결혼 후보자로는 꺼려질 정도였다.
[4]
견훤의 족보들 중 백숭 부인이 등장하지 않고 아예 부여융을 선조로 하여 세대수가 납득이 가게 작성된 족보가 있는데, 해당 족보는 그 시기의 정확성 탓에 오히려 진실성이 의심된다. 어느 누가 봐도 뭔가 어설픈 부분이 있고 세대수도 분명 좀 엉터리인 백숭부인판 족보가 적어도 진실성이나 신뢰도는 높은 형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