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라틴어: Sextus Julius Caesar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46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시리아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아버지) |
참전 | 카이사르의 내전 |
직업 | 로마 공화국 시리아 총독 |
[clearfix]
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정치인, 군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사촌으로, 카이사르의 내전 시기 시리아 총독을 맡았으나 반란으로 피살되었다.2. 생애
기원전 91년 집정관을 역임한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손자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사촌이었다. 기원전 57년 폰티펙스 막시무스를 역임하고 있던 카이사르에 의해 플라멘 퀴리날리스( 퀴리누스 신의 제사장)로 임명되었다. 기원전 49년 군사 호민관으로서 카이사르의 히스파니아 원정에 참여했으며, 기원전 48년경 재무관을 역임했다.기원전 47년 카이사르와 함께 알렉산드리아로 갔으며, 카이사르가 폰토스 왕국의 파르나케스 2세를 정벌하러 출정했을 때 시리아 총독으로 임명되어 후방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폼페이우스가 유대의 군주로 임명한 대제사장 요한 히르카노스 2세에 맞서던 안티파트로스와 그의 아들 헤로데를 지지하였으며, 헤로데가 사마리아와 코일레-시리아의 총독이 되는 것을 도왔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기원전 46년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바수스가 반란을 일으켜 그를 죽였다고 한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와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바수스는 폼페이우스의 추종자로, 처음에 반란을 일으켰을 때 섹스투스에게 격퇴되자 카이사르가 아프리카 원정에서 전사했다는 위조된 편지를 병사들에게 뿌려 반란에 동참하게 한 뒤 섹스투스를 기어이 죽였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 7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 카이사리온 외에는 아들을 보지 못했기에, 그가 법적 상속인으로서 가장 가까웠다. 동방의 군대를 총괄하는 역할을 맡은 시리아 총독으로 선임한 걸 볼 때, 그를 개인적으로 총애했고 후계자로 삼을 생각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섹스투스는 허망하게 죽어버렸고, 카이사르는 그 다음으로 가까운 혈육인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