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05 22:31:38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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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투스 세르토리우스
Quintus Sertorius
생몰년도 기원전 123년 ~ 기원전 72년
출생지 로마 공화국 사비네 주 누르시아
(現 이탈리아 움브리아주 노르치아)
사망지 로마 공화국 히스파니아 속주
(現 스페인)
지위 귀족
법무관/히스파니아 총독
국가 로마 공화국
가족 레아(어머니)
복무기간 기원전 105년 ~ 기원전 72년
계급 에퀴테스(equites)
참전 킴브리 전쟁
동맹시 전쟁
술라의 내전
세르토리우스 전쟁
직업 장군, 정치가

1. 개요2. 생애
2.1. 초창기2.2. 히스파니아의 총독2.3. 세르토리우스 전쟁2.4.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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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장군.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로마 진군에 맞서 싸운 민중파 중 가장 유능한 인물이었으며 로마에서 축출된 뒤 히스파니아에서 발호해 민중파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그의 군사적 역량은 매우 훌륭하여 압도적인 전력으로 밀어붙이는 진압군을 상대로 게릴라 전술을 효과적으로 수행했다. 심지어 고대 로마 최고의 명장으로 손꼽히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조차 그를 상대로는 고전할 정도였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점차 히스파니아에서의 영향력이 축소되었고 결국 부하인 마르쿠스 페르페르나 베이엔토에게 암살당했다.

2. 생애

2.1. 초창기

기원전 123년 이탈리아 사비네 주의 누르시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일찍 잃었지만, 어머니인 레아(Rhea)의 각별한 애정을 받으며 양육받았다. 레아는 그가 최대한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힘썼다. 이렇게 헌신적인 양육 덕분인지, 그는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깊은 소년으로 자라났고, 웅변가나 법학자가 되고자 하는 큰 꿈을 품고 10대 중후반에 로마로 이주했다.

로마에서 변호가이자 연설가로서 명성을 얻은 그는 20대 초반 때부터 군대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킴브리 전쟁에서 전직 집정관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의 군단에 배속되어 아라우시오 전투에 참전하였다. 이 전투에서 로마군은 전멸하였지만 그는 말을 잃고 부상당한 상태에서도 론 강을 헤엄쳐 건너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 후 기원전 102년 집정관 가이우스 마리우스 휘하에 들어가 아쿠아이 섹스티아이와 베르켈라이에 벌어진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게르만족을 격파하는데 한 몫을 톡톡히 했다.

기원전 97년, 가까운 히스파니아 총독 티투스 디디우스 휘하 군단의 트리부누스 밀리툼(Tribunus militum)으로 배속되었다. 그는 카스툴로에서 켈티베리아인의 습격으로 도시가 함락당하자 탈출 후 병사들을 규합한 뒤 켈티베리아인의 복장으로 꾸며 성으로 접근했다. 켈티베리아인들이 동료인 줄 알고 성문을 열자, 그는 사방으로 공격해 그들을 섬멸하고 살아남은 자들을 모조리 노예로 팔아버렸다. 그후 기원전 91년, 동맹시 전쟁을 치르기 위해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에서 신병을 모집하여 훈련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전투를 수행하다가 한쪽 눈을 잃었다. 하지만 그는 이에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용기와 명예를 증명하는 표식이 언제나 몸에 있으므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용기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며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로마로 돌아온 그는 기원전 88년에 호민관 선거에 출마했다. 그런데 집정관 술라가 알 수 없는 이유로 훼방을 놓았고 결국 낙선했다. 마리우스를 북아프리카로 축출한 술라가 폰투스 미트리다테스 6세와 전쟁을 벌이기 위해 로마를 떠나자, 그 직후 킨나가 이끄는 민중파는 추방당한 마리우스를 불러들였다. 세르토리우스는 마리우스가 지나친 복수심으로 일을 그르칠 거라며 마리우스의 합류를 반대했지만, 결국 마리우스는 로마에 입성하여 세르토리우스가 우려했던 대로 대규모의 숙청을 단행하고 7번째 집정관에 취임한 지 보름도 채 지나지 않아 사망한다.

2.2. 히스파니아의 총독

기원전 83년, 미트리다테스 6세와 전쟁을 치르던 술라는 미트리다테스와 다르다누스 평화 협정을 맺은 뒤 브룬디시움에 상륙했다. 술라는 로마로 진군하면서 민중파와 이에 가담한 동맹시들을 상대로 격렬하게 맞붙었다. 세르토리우스는 술라에 맞서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했고 히스파니아로 달아났다가 다시 아프리카로 도피했다.

기원전 83년 연말에 육로를 통해 히스파니아로 향한 세르토리우스는 재무관 루키우스 히르툴레이우스를 최측근으로 삼았다. 그는 히스파니아로 향하는 도중에 모집한 군단들을 이끌고 히스파니아를 빠르게 장악한 뒤, 히스파니아 부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선정을 베풀었다. 과중한 세금을 줄이고, 도시 내 군사 기지를 줄였으며, 부족 귀족들과의 관계를 개선했다. 역사가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는 세르토리우스가 온화하면서도 지도력이 뛰어난 인물이었으며, 반항적이었던 히스파니아 부족들은 그의 성품에 깊은 감명을 받고 진심으로 충성했다고 기술했다.

기원전 81년 로마를 평정한 술라는 세르토리우스를 숙청 대상자로 지정하고 가이우스 아니우스 루스카를 가까운 히스파니아의 새 총독으로 임명했다. 루스카는 2만 가량의 병력을 이끌고 진군하다가 피레네 산맥에서 세르토리우스의 부하 루키우스 살리나토르가 지휘하는 6,000명의 분견대에게 저지되었다. 그러나 살리나토르는 부하에게 살해되었고, 6천 수비대는 뿔뿔이 흩어졌다. 루스카가 히스파니아로 진입하자, 세르토리우스는 도저히 대항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3천 병력을 이끌고 카르타고 노바로 후퇴한 뒤 함대에 병사들을 싣고 마우레타니아로 떠났다. 그러나 마우레타니아 주민들의 저항에 직면하자 그곳을 떠났고, 킬리키아 해적들과 연합하여 피티우스 섬을 공략했다. 얼마 후 루스카가 파견한 함대가 쳐들어오자 이에 맞섰으나 패배를 면치 못하고 하데스 해협을 지나 히스파니아의 베티스 강 어귀에 상륙했다.

그는 그곳에서 병력을 보충하고 휴식을 취한 뒤 킬리키아 해적들과 함께 팅기스로 향했다. 해적들은 팅기스의 참주로 아스칼리스를 옹립하려 했지만, 그는 팅기스 주민들이 아스칼리스에게 반감을 품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그들과 연합해 해적들을 전투에서 물리쳤다. 이후 팅기스를 복속시키기 위해 술라가 파견한 파키아누스를 물리치고 파키아누스의 병사들을 회유해 자기 편으로 끌여들었다.

그러던 중 루시타니아 부족장들이 세르토리우스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들이 술라파 총독의 폭정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하소연하면서, 그를 지도자로 세울테니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이에 세르토리우스는 기원전 80년 팅기스에서 2,600명의 로마군과 700명의 마우레타니아 용병대를 이끌고 히스파니아로 건너가 벨론 시 부근에 상륙했다. 4,000명 이상의 루시타니아인들과 합세한 뒤, 그는 먼 히스파니아 속주 총독 루키우스 푸피디우스와 베티스에서 격돌했다. 푸피디우스는 이 전투에서 2,000명 이상의 로마 군단병을 잃고 도주했고, 먼 히스파니아 일대의 상당수 영역이 세르토리우스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세르토리우스는 자신의 입지가 아직 불안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루시타니아인들은 지금 당장은 그가 필요해서 지도자로 선출했지만, 조금만 수틀리면 이방인인 그를 배신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술책을 썼는데, 특히 신들과 소통하는 특별한 인간으로 포장했다. 한 번은 한 사냥꾼이 하얗고 작은 사슴을 발견하고 세르토리우스에게 선물했는데, 그는 이 동물을 아르테미스의 신성한 선물이라고 선언하면서, 이 하얀 사슴이 자신에게 비밀을 알려준다고 밝혔다. 적이 어느 지역을 공격했다는 비밀 통지를 받거나 반역 모의가 있다는 보고가 들어올 때, 그는 사슴이 그 사실을 알린 척하며 적절한 조치를 내렸다. 그리고 부하가 승리했다고 보고했을 때, 전령의 도착에 대해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좋은 소식의 표시로 화환으로 장식된 사슴을 공개했다. 이에 부족민들은 그가 아르테미스 여신의 총애를 받는 특별한 인간이 분명하다고 여기고, 그의 말을 순순히 따랐다.

그후 그는 잔여 세력을 끌어모은 뒤 히스파니아로 쳐들어가 아나스 강 전투에서 총독인 마르쿠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를 죽이고 스스로 히스파니아 총독을 자칭했다. 이에 메텔루스 피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히스파니아에 도착했지만 세르토리우스는 게릴라전으로 메텔루스 피우스를 격퇴하였고 그에게 희망을 건 민중파는 앞다투어 세르토리우스에게 가담했다. 또한 히스파니아인들은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그를 ' 한니발의 재림'이라 여기며 존경했다.

세르토리우스는 군사적으로 유능할 뿐만 아니라 정치가로서도 상당한 역량을 갖췄다. 그는 로마에서 도망쳐 온 사람들 사이에서 300명의 원로원을 구성하고 이들과 함께 히스파니아를 안정적으로 다스렸다. 또한 자신에게 협조하는 히스파니아인의 자녀들을 위해 우에스카에 학교를 짓고 로마식 교육을 받게 했다. 또한 독자적으로 동전을 주조하고 군대 편제를 자신의 뜻대로 구성해 노골적으로 옵티마테스 파가 장악한 로마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2.3. 세르토리우스 전쟁

메텔루스 피우스가 세르토리우스의 효과적인 게릴라 전술에 고전하면서 전쟁이 장기화되자, 집정관 레피두스와 에트루리아의 반란을 진압한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휘하 군단을 이끌고 메텔루스 피우스와 합류했다. 폼페이우스는 적의 본거지로 진격하기 위해 연안 도로를 개척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3만의 보병과 1천의 기병을 지휘한 폼페이우스는 라우론에서 세르토리우스의 공격을 받고 1만의 병력을 잃는 등 메텔루스 피우스와 마찬가지로 세르토리우스에게 패전한다.

기원전 75년, 세르토리우스는 수크로에서 다시 폼페이우스와 맞붙었다. 이 때 폼페이우스의 부하들은 다른 곳에서 세르토리우스의 부하들과 싸우고 있는 메텔루스 피우스가 합류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진언했지만 폼페이우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전투를 감행했다. 세르토리우스는 이 전투에서 적의 한쪽 측면을 돌파하고 폼페이우스가 도주하게 만들었지만, 그 사이에 자신이 이끄는 군대의 또다른 측면이 폼페이우스의 부관인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에게 격파되는 바람에 철수한다.

그 후 메텔루스 피우스가 세르토리우스의 부하인 루키우스 히르툴레이우스를 격파하고 폼페이우스와 합류하자, 세르토리우스는 사군툼 근방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였으나 히르툴레이우스가 전사하는 등 전세가 불리하자 퇴각했다. 이 패배로 히스파니아에서 그의 영향력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기원전 74년, 폼페이우스와 메텔루스는 압도적인 군세를 활용해 세르토리우스를 압박했다. 세르토리우스는 게릴라 전법을 활용해 몇번의 소규모 승리를 거뒀지만 전세를 역전시키지 못했다.

2.4. 최후

디오도로스 시켈로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세르토리우스는 패배를 거듭하면서 절망감에 점차 폭군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로마의 전우들과 함께 논의하는 걸 그만두고, 그동안 관계가 좋았던 히스파니아 사람들을 억압하고, 쾌락과 사치에 탐닉했으며, 주변에서 자신을 해치려 든다고 의심하여 자신이 세운 우에스카 학교의 히스파니아인 학생들을 죽이는 등 무고한 사람들을 해쳤다고 한다. 또한 마르쿠스 페르페르나 베이엔토가 음모를 꾸민 게 밝혀져 거의 모든 공모자들이 처형되었지만, 페르페르나는 모종의 이유로 살아남았다고 한다. 한편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페르페르나가 최고 권력에 대한 공허한 욕망을 마음에 품고, 부하들에게 "로마인은 도망자 세르토리우스의 수행원 취급을 받고 있으며, 야만족은 우리를 꾸짖고 명령하고 의무를 지게 하고 있다"라고 선동했다. 이후 암살 시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퍼지자, 암살을 단행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기원전 72년, 공모자들은 세르토리우스에게 아군이 승리했다고 보고하면서 이를 기념하는 연회를 열자고 제안했다. 세르토리우스는 한동안 망설였지만 주변에서 거듭 권하자 결국 받아들였다. 연회가 한창일 때 페르페르나가 희석되지 않은 포도주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후 바닥에 떨어뜨리자, 즉시 세르토리우스 옆에 기대고 있던 마니우스 안토니우스가 단검으로 세르토리우스를 찔렀다. 세르토리우스는 달아나려 했지만, 안토니우스는 그의 가슴에 몸을 던지고 그의 손을 잡았다. 저항할 능력을 상실한 세르토리우스는 많은 공모자들의 연이은 공격으로 결국 살해되었다.

페르페르나는 세르토리우스의 세력을 물려받았으나 그의 군사적 재능은 세르토리우스만 못했고 폼페이우스의 매복에 걸려들면서 세르토리우스와 같은 해에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