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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0년 1월 15일 |
경기도 파주군 월롱면 내포리(현 파주시 문산읍 내포리) | |
사망 | 1990년 4월 7일 (향년 70세) |
경기도 파주군 | |
묘소 | 경기도 광명시 가학동 장터말 |
본관 | 창녕 성씨 |
서훈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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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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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난 뒤 만세시위에 합세한 인사들.[1]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920년 1월 15일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1 운동에 참가한 모친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투철한 민족의식을 갖추고 있었다.그는 1938년 경성전기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중앙방송국에 입사하였다. # 1940년 경성방송국에 기술직으로 근무할 때 단파수신기(短波受信機) 3대를 제작하여 해외방송을 청취하면서 임시정부(臨時政府) 소식과 구미외교부(歐美外交部) 활동을 알게되어 독립운동 상황을 가친(家親)을 통하여 이인, 조병옥 등에게 전달했다. 이후 1942년 8월 개성방송소로 전근되어 소장인 이이덕(李二德)과 함께 단파수신기를 제작하여 미국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국어 방송을 접하고 연합군의 승전과 광복군의 활동 등을 수시로 청취해 민족 지도자들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1942년 12월 27일 경기도 경찰부 고등경찰과 경부 사이가 시치로(齋賀七郞)에게 발각되어 체포된 그는 1943년 9월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및 무신전신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8.15 광복 직후 출옥했다. 그는 출옥 후 동료들과 함께 서울 시내로 나와 만세시위를 벌였는데, 매일신보는 이 광경을 촬영해 기사로 올렸다. 이 사진은 8.15 광복 직후 풍경을 전하는 대표적인 사진으로 손꼽힌다. 이후 방송국으로 돌아온 그는 6.25 전쟁 때 이리 방송국 방송과장 겸 기술과장을 맡았고, 연희송신소장, 수원송신장, 남양송신소장 등을 역임하다 1975년에 퇴임했다. 이후 회고록 '효암행장기'를 출간했으며, 1990년 4월 7일에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경기도 광명시 가학터 장터말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성기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우측 중앙에서 오른손에 깃발을 들고 만세를 부르는 인물이 성기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