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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대구 서씨[1] |
출생 | 1920년 11월 25일[2] |
충청남도 논산군 채운면 우기리 | |
사망 | 2005년 1월 15일 |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147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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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서재필의 종손자(從孫子)이며, 갑신정변 때 처형된 서재창의 손자이다. 그리고 서명원 제28대 문교부 장관은 그의 4촌 형이다.[3]
2. 생애
서영원은 1920년 11월 25일 충청남도 논산군(현 논산시) 채운면 우기리에서 아버지 서찬석(徐灒錫, 1893. 11. 29 ~ 1979. 11. 21)과 어머니 해평 윤씨 윤신천(尹宸天, 1892. 4. 9 ~ 1969. 3. 30)[4] 사이의 6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그는 연희전문학교에 재학하던 1939년 12월 학우 김상흠(金相欽), 이동원(李東元), 김영하(金永河), 민영로 등과 함께 논산군 사직동에 거주하던 윤주연(尹柱淵)의 집에 모여 조선학생동지회(朝鮮學生同志會)를 조직했다. 조선학생동지회는 제2의 3.1 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고 1942년 3월 1일을 거사일로 정했다.
그들은 그동안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키기로 하고 도쿄 유학생 등 해외에 유학간 이들과 연락해 거국적인 거사를 계획했다. 이때 서영원은 미국 유학생과의 연락을 책임졌다. 이후 서영원은 1940년 2월부터 1941년 7월까지 남한산성, 냉천동 약수터, 연희전문학교 뒷산, 벽제관 등 각지에서 모임을 갖고 독립의식을 고취시키고 동지를 규합해 조직 확대에 힘썼다.
그러나 1941년 7월 원산상업학교에 결성된 조선학생동지회 지부가 일제 경찰에 발각되면서 조선학생동지회가 드러나고 말았다. 결국 그는 1941년 9월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연희전문학교에서 퇴학당했다. 이후 그는 모진 고문을 받고 1943년 3월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자택에서 일제 경찰의 감시를 받다가 8.15 광복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
연희전문학교는 광복 후 서영원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했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에 그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이후 서울에서 평범하게 지내던 그는 2005년 1월 15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사후 그의 유해는 2015년 1월 18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