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상임위원회 의장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
초대 | 제2대 | 제3대 |
한덕수 | 서만술 | 허종만 | }}}}}}}}} |
<colbgcolor=#b6e4fe><colcolor=#ffffff> 제2대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중앙상임위원회 의장 서만술 徐萬述 | So Man-sul |
|
|
|
출생 | 1927년 4월 14일 |
경상북도
영일군
동해면 입암동 (現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동해면 입암리)[1] |
|
사망 | 2012년 2월 19일 (향년 84세) |
일본 도쿄도 에도가와구[2] | |
국적 |
[[북한| ]][[틀:국기| ]][[틀:국기| ]] |
가족 | 아버지 서봉수, 어머니 송귀비 |
종교 | 무종교 |
직업 | 정치인 |
최종 당적 |
|
[clearfix]
1. 개요
북한의 정치인.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제2대 의장을 지냈다.2. 생애
1927년 4월 14일 경상북도 영일군 동해면 입암동(現 포항시 남구 동해면 입암리)에서 가난한 소작농 서봉수와 송귀비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국민학교 졸업 이후 1941년에 공부를 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중학교에 입학, 1945년에 졸업했다.중학교 졸업과 함께 해방을 맞이하여 귀국을 하기 위해 야마구치현 오노다시로 이사했다가 조련 오노다 지부가 결성되자 청년부원으로 합류, 1946년 6월, 조련중앙고등학원 1기생으로 입학하였으며 1947년 재일본조선민주청년동맹 야마구치현 본부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48년 민청 히로시마현 본부 조직부장에 임명, 1949년 조련 히로시마현 본부 상임위원에 선출되었다.
1955년 5월 25일, 조총련 성립 이후 히로시마현 본부 선전부장, 조직부장, 부위원장 등으로 사업하였으며 1968년 히로시마현 본부 위원장이 되었다. 김병식이 한덕수를 몰아내고 조총련을 장악하려 했을 때는 한덕수 충성파로 남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병식이 숙청된 이후 1972년 12월 28일, 중앙 조직국장에 임명, 1974년 9월, 공화국창건 26돐 재일조선인축하단 단장으로 북한에 다녀왔다.
1979년 6월, 사무총국장에 선출, 1982년 4월, 김일성 칠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83년 6월, 조총련 제13차 전체대회에서 부의장 겸 사무총국장에 선출되었다. 1986년 9월, 조총련 제14차 전체대회에 사무총국장에서 물러나 부의장 직함만 남겼으며 1990년 5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90년 8월 15일, 조국통일상 1차 수훈자로 선정되었다. 1998년 5월, 조총련 제18차 전체대회에서 제1부의장에 선출되었으며 1998년 8월,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2001년 2월, 한덕수 장례위원장을 지냈으며 2001년 5월, 조총련 제19차 전체대회에서 한덕수의 뒤를 이어 조총련 의장에 선출되었다. 2002년 3월 27일, 김일성 탄생 90주년 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2003년, 1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2009년 1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2006년 5월, 민단 단장 하병옥과 회담을 가지고 민단과 화해, 협조를 강화하려 했으나 민단의 격렬한 반발 때문에 하병옥 등 민단 지도부가 총사퇴해서 없던 일이 되었다.
2012년 2월 9일, 김정일훈장의 초대 수훈자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불과 열흘 후 2012년 2월 19일 오후 7시 5분 도쿄도 에도가와구 자택에서 심부전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김정은이 화환을 보내주었으며, 로동신문과 민주조선에도 부고와 략력이 게재되는 등 북한 당국의 성대한 대접을 받았다. 2012년 3월, 최영림의 주재 하에 애국렬사릉에 시신이 안장되었다. 후임 조총련 의장으로는 허종만이 선출되었다.
3. 수훈
4. 참고문헌
- 2012년 2월 21일자 조선신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