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준 徐東俊 |
|
출생 | 1935년 9월 1일 |
경기도 인천부 | |
사망 | 2014년 10월 17일 (향년 79세)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인천고 - 한양대 |
포지션 | 투수 |
소속팀 |
조선운송 야구단 (1954~1956) 해군 야구단 (1956~1959) 한국운송 야구단 (1960~1961) 한일은행 야구단 (1962~1964) |
해설위원 | TBC 야구 해설위원 (1965~1977)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야구 선수 출신 해설가, 금융인.대한민국 최초의 야구 국가대표 선수 중 한 명이자 최초의 전속 방송 해설가로도 유명하다.
2. 선수 경력
인천고등학교 야구부의 우완 에이스로서 1952년 유일무이한 전국 대회였던 전국체전에서 우승을 달성하고 1953년에는 쌍룡기(화랑기)[1], 청룡기, 전국체육대회 우승에 성공하며 전관왕[2]의 위업을 달성하며 인천고의 전성시대를 열었다.인천고 졸업 후 한양공대로 진학하였다. 1954년 제9회 대학야구선수권대회에서 결승전에서 선발 투수로 등판하였으나 패전투수가 되었다. 그럼에도 우수 투수상을 수상하였다. 제11회 월게기 쟁탈전 도시 대항전에서도 우수 선수상을 수상하였다.
1954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대한민국 최초 야구 국가대표에 최연소로 선발되었고 1,2,3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하였다. 1958년에는 당대 메이저 리그 최강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내한 경기에도 전서울군으로 선발되었다.
1955년 대한체육회가 선정한 그 해의 대한민국 최우수 선수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1957년에는 제38회 부산에서 열린 전국체전에서 대표로 선서하는 등 체육 선수 최고의 영광을 누렸던 대표적 인물이었다.
이후 조선운수 - 해군 등에서 선수 생활을 하였으며 1960년대 중후반부터는 지도자로 활동하다가 1968년 은퇴했다.
3. 최연소 야구 국가대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1954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개최된 제1회 아시아 야구선수권에 참가하였다.광복 후 필리핀, 중화민국(당시 기준, 대만)과의 교류전을 위한 대표팀 구성은 있었으나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경기에 파견된 첫 야구 국가대표팀은 1954년 아시아야구선수권 대회 대표팀이었다.
훗날 김양중이 회고하듯이 전란에 야구인들이 많이 희생되어 약관의 서동준을 제외한 대부분 선수가 당시 30대로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고교, 대학, 프로야구를 경험한 한국야구의 선각자들 (유완식, 김영조, 김양중, 박현식, 강대중 등)로 구성되어 있었다.
서동준은 그러한 대표팀에 유일한 젊은 피이자 전후 야구 선수였다.[3]
최초의 야구 국가대표팀은 일본 프로 야구를 경험한 유완식-김영조 배터리로 일본과 상대했으나 0-6으로 패했다. 그러나 중화민국(대만)[4]을 상대로 4-2 역전승을 거두고 1승을 올리며 모두가 꼴찌를 할거라는 예상과는 반대로 3위[5]를 차지했다. 대만전 선발 투수가 바로 서동준으로 2실점을 하였으나 김양중과 유완식의 마무리로 4대2로 신승하였다.
55년 2회 아시아선수권 대회 2차 리그 일본전에 4-4[6] 상황에서 2회 구원 등판하여 9회말 2사까지 7이닝 1실점으로 엄청난 호투를 하다가 9회말 2사 만루 풀카운트에서 스트라이크에 걸치는 공을 던졌으나 주심은 볼을 선언해서 끝내기로 6-5로 패전했다.
당대 일본과의 야구 격차를 감안했을 때 엄청난 호투를 선보인 것이며, 1회 대회에서 4이닝 2실점한 유완식 다음으로 일본을 상대로 호투를 펼친 투수이다. 또, 순수 한국 야구인으로서는 거의 처음이다.[7]
[인물로 보는 야구100년] 14. ‘약관 대표선수’ 서동준
1963년은 한국야구가 ‘극일’을 이룬 원년이다.
김응용 박영길 등 역대 최강멤버로 짜여진 한국 대표팀은 1963년 9월 서울에서 열린 제5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일본을 2차례나 격파하며 대회 첫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한국야구는 이보다는 8년쯤 빨리 일본야구를 꺾을 수도 있었다. 스무살짜리 투수의 깜짝 피칭이 그런 기대감을 부 풀게 했었다. 1954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 참가한 대표선수들 틈에는 고교생 투수 한명이 끼어있었다. 바로 인천고 3학년 서동준. 53년부터 2년 동안 고교대회를 석권하며 인천야구 전성시대를 연 서동준은 막상 마 닐라에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이듬해 55년 마닐라에서 열린 2회 대회에 출전해서는 멋지게 한건을 해낸다.
그해 조선운수 야구단 초년병이던 서동준은 이 대회 2차리그 일본전에서 일본의 콧대를 반쯤은 눌러앉혔다. 선발 한태동이 2회말 4점을 빼앗겨 급히 등판한 서동준은 4-4로 맞선 3회 1점을 빼앗겼지만 4회부터 그야말로 철벽피칭을 했다. 당시 일 본타선은 사상 최강으로 일본의 영웅 나가시마를 비롯해 사사키, 모리 등 일본 대표타자들이 포진돼있었다. 일본 타자들은 풋내기 투수에게 농락을 당하자 초초해지기 시작했고, 서동준은 6회초 한국이 2안타로 1점을 추가해 5-5로 균형을 맞추 자 신이 나서 공을 뿌렸다. 적어도 9회말 2사 만루에서 서동준이 던진 운명의 1구에 필리핀 주심이 손을 들어줬다면 한일 야구사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9회말 가볍게 투아웃을 잡은 서동준은 1번 사사키에게 짧은 안타를 맞고 도루를 내주며 위기를 만났고 벤치 사인으로 다음 두 타자를 고의4구로 내보내며 2사 만루. 서동준은 운명의 타자 모르키를 만난다. 그리고 볼카운트 2-3. 서동준은 스트라 이존에 걸치는 듯한 커브를 던졌으나 주심은 볼을 선언했다. 밀어내기로 결승점 허용. 통한의 순간이었다. 서동준은 일본 격파의 소망을 다시 이루지 못했지만, 인천고 졸업 뒤에도 조선운수-해군 등을 거치며 맹활약했다. 또 55년부터 3년간 인천고교야구 전성시대를 이어간 동산고 신인식과 함께 50년대 인천야구의 양대산맥으로 남아있다.
경향신문 2005.01.23 19:27
1963년은 한국야구가 ‘극일’을 이룬 원년이다.
김응용 박영길 등 역대 최강멤버로 짜여진 한국 대표팀은 1963년 9월 서울에서 열린 제5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일본을 2차례나 격파하며 대회 첫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한국야구는 이보다는 8년쯤 빨리 일본야구를 꺾을 수도 있었다. 스무살짜리 투수의 깜짝 피칭이 그런 기대감을 부 풀게 했었다. 1954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 참가한 대표선수들 틈에는 고교생 투수 한명이 끼어있었다. 바로 인천고 3학년 서동준. 53년부터 2년 동안 고교대회를 석권하며 인천야구 전성시대를 연 서동준은 막상 마 닐라에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이듬해 55년 마닐라에서 열린 2회 대회에 출전해서는 멋지게 한건을 해낸다.
그해 조선운수 야구단 초년병이던 서동준은 이 대회 2차리그 일본전에서 일본의 콧대를 반쯤은 눌러앉혔다. 선발 한태동이 2회말 4점을 빼앗겨 급히 등판한 서동준은 4-4로 맞선 3회 1점을 빼앗겼지만 4회부터 그야말로 철벽피칭을 했다. 당시 일 본타선은 사상 최강으로 일본의 영웅 나가시마를 비롯해 사사키, 모리 등 일본 대표타자들이 포진돼있었다. 일본 타자들은 풋내기 투수에게 농락을 당하자 초초해지기 시작했고, 서동준은 6회초 한국이 2안타로 1점을 추가해 5-5로 균형을 맞추 자 신이 나서 공을 뿌렸다. 적어도 9회말 2사 만루에서 서동준이 던진 운명의 1구에 필리핀 주심이 손을 들어줬다면 한일 야구사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9회말 가볍게 투아웃을 잡은 서동준은 1번 사사키에게 짧은 안타를 맞고 도루를 내주며 위기를 만났고 벤치 사인으로 다음 두 타자를 고의4구로 내보내며 2사 만루. 서동준은 운명의 타자 모르키를 만난다. 그리고 볼카운트 2-3. 서동준은 스트라 이존에 걸치는 듯한 커브를 던졌으나 주심은 볼을 선언했다. 밀어내기로 결승점 허용. 통한의 순간이었다. 서동준은 일본 격파의 소망을 다시 이루지 못했지만, 인천고 졸업 뒤에도 조선운수-해군 등을 거치며 맹활약했다. 또 55년부터 3년간 인천고교야구 전성시대를 이어간 동산고 신인식과 함께 50년대 인천야구의 양대산맥으로 남아있다.
경향신문 2005.01.23 19:27
(중략)
1954년. 동족상잔의 비극이 끝난 직후,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폐허였다. 3년간의 전쟁으로 거의 모든 사회적 기능이 마비된 터였다. 이는 야구도 마찬가지였다. 전쟁통에 야구는 중단됐고, 전쟁 중 사망하거나 부상 혹은 월북과 납북으로 많은 야구인이 그라운드를 떠 나며 대한민국 야구는 심장 박동이 정지된 상태였다.
그러던 중 그해 5월 17일 한국, 일본, 필리핀, 자유중국 등 4개국을 회원국으로 하는 아시아야구연맹이 필리핀 마닐라에서 결성됐다. 한국야구계에선 이홍직 대한야구협회장과 이영민 부회장이 마닐라로 떠나 아시아 야구연맹 결성식에 참가했다.
결성식에선 의미 있는 합의안이 도출됐다. 바로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의 탄생이었다. 아시아야구연맹 4개 회원국 임원들은 ‘1954년 12월 18일부터 23일까지 마닐라에서 제1회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 개최하자’고 결정하며 모든 회원국이 참가하기로 결의했다. 문제는 한국이었다. 당시 한국은 4개 회원국 가운데 가장 빈국( 貧 國 )이었다. 먹고 사는 게 걱정이었던 시절이라, 국외 원정은 꿈도 꾸 기 어려웠다. 특히나 아시아야구대회는 출전국이 왕복 경비(대회 기간 숙식비는 주최국 필리핀이 부담)를 감당해야 했기에 한국에서 필리핀까지 가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대표팀 선발이야말로 난제 중의 난제였다.
생전 김양중 선생은 기자에게 “전란 중에 다수 야구인이 희생되고, 야구경기도 중단된 통에 유망주가 자라지 않아 막상 아시아야구대 회 대표팀 참가 선수들을 소집하려니 젊은 선수가 보이지 않았다”며 “과거 일제하에서 일본이나 만주에서 뛰던 30대 노장 선수들이 대표팀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회상했다.
정확한 기억이었다. 제1회 아시아야구대회 참가 한국 대표팀 선수들의 평균 연령은 31세였다. 당시는 20대 중반만 돼도 ‘노장’ 소릴 듣던 때라, 31세면 현역선수론 ‘환갑’이나 다름없었다. 놀라운 건 현역선수론 ‘환갑’이 훨씬 지난 30대 중반 이상 선수도 수두룩했다 는 점이다.
그도 그럴 게 대표팀 주장에 선임된 좌익수 노정호는 당시 38세였고, 투수 유완식은 36세, 포수 김영조는 36세, 1루수 심양섭은 34 세, 2루수 김계현은 36세, 유격수 강대중은 34세, 우익수 홍병창은 37세나 됐다. 32세의 포수 장석화, 30세의 2루수 박상규, 32세 의 우익수 정관칠, 31세의 유격수 이덕영, 28세의 3루수 이기억은 고참축에도 끼지 못했다.
막내그룹이 24세의 중견수 허곤, 25세의 투수 김양중과 장태영(중견수), 26세의 박현식, 27세의 1루수 김정환이었을 정도였다. 흔히 말하는 ‘젊은 피’라곤 19세의 투수 서동준이 유일했다.
(중략)
해방 이후 국가대표팀을 조직하려는 움직임은 많았으나, 국제무대 참가를 위해 조직한 야구 국가대표팀은 그때가 처음이었고, 국가대 표팀이 국외 원정길에 오른 것도 역시 당시가 처음이었다. 특히나 이 팀이 ‘대한민국(KOREA)’을 대표하고, 이 ‘KOREA'팀을 국제야 구연맹(NBC)이 한국 대표팀으로 인정한 것도 1954년 제1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가 처음이었다.(NBC는 1954년 11월 5일 대한야구협회가 전쟁 이후 다시 회원국으로 정식가입하자 아시아야구대회에 참가하는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을 ’KOREA' 대표팀으로 인정했다. 국제야구연맹이 한국 대표팀을 국제무대의 일원으로 인정한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중략)
초대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를 축하하는 개막 행사가 열린 뒤 곧바로 한국-일본의 대회 개막전이 시작됐다. 한국이 상대할 일본팀은 이해 전일본도시대항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사회인 야구팀 야와타제철(신일본제철의 전신)로, 투·타 전력 에서 야와타제철은 다른 참가국을 압도했다. 특히나 대회 전 늦가을 날씨의 가고시마에서 전지훈련을 마친 터라, 선수들의 컨디션과 경기 감각 역시 꽤 좋았다.
그런 야와타제철을 맞아 한국은 유완식을 선발투수로 지명했다.[8]
(중략)
유완식은 일본 프로야구에서 성공하지 못한 ‘한(恨)’을 풀려는 듯 일본을 상대로 1회 초부터 호투를 펼쳤다.
따지고 보면 유완식과 배터리를 이룬 포수 김영조도 ‘한( 恨 )의 사나이’였다. 어쩌면 유완식보다 더 깊은 한이 맺혔을지 몰랐다. 그도 그럴 게 김영조는 젊은 시절 일본야구계에서 유망주 가운데 유망주로 뽑힌 이였다[9]
(중략)
생전 김영조는 ‘언젠가 일본과 대전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그날을 위해 한 국에서 열심히 야구에 매달리자’는 각오를 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는 자신의 다짐을 이루고자 한국에 남아 여러 실업팀에서 현역 선수로 뛰면서 후진양성에 힘썼다. 그리고 일본 프로야구에서 뛴 지 10년 만에 제1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해 일본 대표팀과 운명적 만남을 갖게 됐다.
일본야구 관계자들은 ‘불운의 유망주’ 김영조를 한눈에 알아보고 그와 반갑게 해후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당시 그의 나이 36세. 현역 선수론 ‘환갑’이 넘은 나이였기에 김영조가 다시 일본 프로야구에서 뛸 순 없는 일이었다. 김영조는 ‘언젠가 일본과 대전할 날’이 10년 만에 찾아오자 온힘을 다해 유완식과 함께 경기를 풀어갔다.[10]
(중략)
윤 아나운서의 연재기에서 보듯 한국이 일본에 이기리라 예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되레 ‘콜드 게임으로 지지 않을까’ 우려했다. 하 지만, 예상과 달리 한국은 3회까지 1점도 내주지 않는 완벽한 수비력을 자랑했다.
한국 배터리 유완식-김영조는 일본 타자들의 허를 찌르는 공 배합으로 별다른 위기없이 3회까지 버텼고, 야수진 역시 1개의 실책도 범하지 않는 철통 수비를 자랑했다. 물론 한국 역시 일본 선발투수의 구위에 눌려 3회까지 안타를 기록하지 못했다.
고비는 4회였다. 3회까지 호투하던 유완식은 4회 들어 갑자기 제구가 흔들렸다. 구위 역시 눈에 띄게 떨어졌는데 이유는 3회 말 무리 한 주루 때문이었다. 사정은 이랬다.
3회 말 유완식(9번 타자)이 볼넷으로 출루하자 오윤환 코치는 1루 주자 유완식과 1번 노정호에게 ‘히트 앤드 런’ 사인을 냈다. 문제는 타자의 스윙이 번번이 파울로 이어지며 1루에서 2루로 뛰던 유완식이 기진맥진 상태가 됐다는 것이다.
마닐라의 고온과 두 번의 베이스러닝으로 온몸이 땀으로 적셔진 유완식은 4회 초 갑자기 난조를 보이며 볼넷과 안타, 2루타를 맞고서 2실점했다. 윤 아나운서는 “께임의 승자는 4회에 가려졌다”며 “일본은 (2점을 낸 뒤) 승기를 잡았으며 한국은 비 맞은 비둘기인양 의 기소침한 빛을 보였다”고 기술했다.
한국 벤치는 지친 유완식[11] 을 내리고, 김양중-박현식을 차례로 올렸지만, 일본에 6회 1점, 7회 2점, 9회 1점을 내주며 0대 6으로 패하 고 말았다.
윤 아나운서는 “경기가 끝나고서 어느 필리핀 신문기자가 나에게 손짓을 하며 ‘키 큰 한국이 꼬마 일본에 맥 없이 졌다’고 말했다”며
“원통해도 일본이 확실히 우리보다 실력이 위였다”고 평했다.
사실이었다. 일본 투수들은 대부분의 한국 타자가 본 적이 없는 커브, 체인지업, 슬라이더 등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여기다 경기 경 험이 풍부해선지 몸놀림이 가볍고, 무엇보다 전체 선수가 20대 초·중반의 젊은 선수들이라, 체력 또한 좋았다.
이에 반해 한국은 실력은 둘째치고 경기 내내 스파이크가 천연잔디에 걸려 어기적어기적 움직였고, 난생처음 보는 강한 불빛(조명)에 적응하지 못해 번번이 외야 플레이를 놓치고 말았다.
일본에 패한 그날 밤. 한국 대표팀은 그야말로 초상집 분위기였다. 윤 아나운서는 <주간 스포츠>에 연재한 칼럼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날 저녁 패전지장(敗戰之將)은 그야말로 말이 없었다. 어느 선수가 오늘 실황을 방송했느냐고 나더러 묻는다. 내가 ‘이 비보(悲報) 는 이미 1초간에 지구를 일곱 번 반 도는 전파로 고국에 알려졌을 것이다’ 말하니 이 선수는 ‘우리는 고국에 돌아갈 수 없다’고 비통한 다. 그러더니 이내 ‘일본과 다시 께임할수 없소? 6대 0으로 이길 자신이 있소!’라고 한다. 나는 말했다. ‘1년에 한 번밖에 없는 거요. 내년에 이기도록 하시요.’ 나는 힘없이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후략)
박동희의 야구탐사, ‘잊힌 60년의 전설’ 최후의 국가대표
1954년. 동족상잔의 비극이 끝난 직후,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폐허였다. 3년간의 전쟁으로 거의 모든 사회적 기능이 마비된 터였다. 이는 야구도 마찬가지였다. 전쟁통에 야구는 중단됐고, 전쟁 중 사망하거나 부상 혹은 월북과 납북으로 많은 야구인이 그라운드를 떠 나며 대한민국 야구는 심장 박동이 정지된 상태였다.
그러던 중 그해 5월 17일 한국, 일본, 필리핀, 자유중국 등 4개국을 회원국으로 하는 아시아야구연맹이 필리핀 마닐라에서 결성됐다. 한국야구계에선 이홍직 대한야구협회장과 이영민 부회장이 마닐라로 떠나 아시아 야구연맹 결성식에 참가했다.
결성식에선 의미 있는 합의안이 도출됐다. 바로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의 탄생이었다. 아시아야구연맹 4개 회원국 임원들은 ‘1954년 12월 18일부터 23일까지 마닐라에서 제1회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 개최하자’고 결정하며 모든 회원국이 참가하기로 결의했다. 문제는 한국이었다. 당시 한국은 4개 회원국 가운데 가장 빈국( 貧 國 )이었다. 먹고 사는 게 걱정이었던 시절이라, 국외 원정은 꿈도 꾸 기 어려웠다. 특히나 아시아야구대회는 출전국이 왕복 경비(대회 기간 숙식비는 주최국 필리핀이 부담)를 감당해야 했기에 한국에서 필리핀까지 가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대표팀 선발이야말로 난제 중의 난제였다.
생전 김양중 선생은 기자에게 “전란 중에 다수 야구인이 희생되고, 야구경기도 중단된 통에 유망주가 자라지 않아 막상 아시아야구대 회 대표팀 참가 선수들을 소집하려니 젊은 선수가 보이지 않았다”며 “과거 일제하에서 일본이나 만주에서 뛰던 30대 노장 선수들이 대표팀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회상했다.
정확한 기억이었다. 제1회 아시아야구대회 참가 한국 대표팀 선수들의 평균 연령은 31세였다. 당시는 20대 중반만 돼도 ‘노장’ 소릴 듣던 때라, 31세면 현역선수론 ‘환갑’이나 다름없었다. 놀라운 건 현역선수론 ‘환갑’이 훨씬 지난 30대 중반 이상 선수도 수두룩했다 는 점이다.
그도 그럴 게 대표팀 주장에 선임된 좌익수 노정호는 당시 38세였고, 투수 유완식은 36세, 포수 김영조는 36세, 1루수 심양섭은 34 세, 2루수 김계현은 36세, 유격수 강대중은 34세, 우익수 홍병창은 37세나 됐다. 32세의 포수 장석화, 30세의 2루수 박상규, 32세 의 우익수 정관칠, 31세의 유격수 이덕영, 28세의 3루수 이기억은 고참축에도 끼지 못했다.
막내그룹이 24세의 중견수 허곤, 25세의 투수 김양중과 장태영(중견수), 26세의 박현식, 27세의 1루수 김정환이었을 정도였다. 흔히 말하는 ‘젊은 피’라곤 19세의 투수 서동준이 유일했다.
(중략)
해방 이후 국가대표팀을 조직하려는 움직임은 많았으나, 국제무대 참가를 위해 조직한 야구 국가대표팀은 그때가 처음이었고, 국가대 표팀이 국외 원정길에 오른 것도 역시 당시가 처음이었다. 특히나 이 팀이 ‘대한민국(KOREA)’을 대표하고, 이 ‘KOREA'팀을 국제야 구연맹(NBC)이 한국 대표팀으로 인정한 것도 1954년 제1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가 처음이었다.(NBC는 1954년 11월 5일 대한야구협회가 전쟁 이후 다시 회원국으로 정식가입하자 아시아야구대회에 참가하는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을 ’KOREA' 대표팀으로 인정했다. 국제야구연맹이 한국 대표팀을 국제무대의 일원으로 인정한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중략)
초대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를 축하하는 개막 행사가 열린 뒤 곧바로 한국-일본의 대회 개막전이 시작됐다. 한국이 상대할 일본팀은 이해 전일본도시대항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사회인 야구팀 야와타제철(신일본제철의 전신)로, 투·타 전력 에서 야와타제철은 다른 참가국을 압도했다. 특히나 대회 전 늦가을 날씨의 가고시마에서 전지훈련을 마친 터라, 선수들의 컨디션과 경기 감각 역시 꽤 좋았다.
그런 야와타제철을 맞아 한국은 유완식을 선발투수로 지명했다.[8]
(중략)
유완식은 일본 프로야구에서 성공하지 못한 ‘한(恨)’을 풀려는 듯 일본을 상대로 1회 초부터 호투를 펼쳤다.
따지고 보면 유완식과 배터리를 이룬 포수 김영조도 ‘한( 恨 )의 사나이’였다. 어쩌면 유완식보다 더 깊은 한이 맺혔을지 몰랐다. 그도 그럴 게 김영조는 젊은 시절 일본야구계에서 유망주 가운데 유망주로 뽑힌 이였다[9]
(중략)
생전 김영조는 ‘언젠가 일본과 대전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그날을 위해 한 국에서 열심히 야구에 매달리자’는 각오를 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는 자신의 다짐을 이루고자 한국에 남아 여러 실업팀에서 현역 선수로 뛰면서 후진양성에 힘썼다. 그리고 일본 프로야구에서 뛴 지 10년 만에 제1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해 일본 대표팀과 운명적 만남을 갖게 됐다.
일본야구 관계자들은 ‘불운의 유망주’ 김영조를 한눈에 알아보고 그와 반갑게 해후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당시 그의 나이 36세. 현역 선수론 ‘환갑’이 넘은 나이였기에 김영조가 다시 일본 프로야구에서 뛸 순 없는 일이었다. 김영조는 ‘언젠가 일본과 대전할 날’이 10년 만에 찾아오자 온힘을 다해 유완식과 함께 경기를 풀어갔다.[10]
(중략)
윤 아나운서의 연재기에서 보듯 한국이 일본에 이기리라 예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되레 ‘콜드 게임으로 지지 않을까’ 우려했다. 하 지만, 예상과 달리 한국은 3회까지 1점도 내주지 않는 완벽한 수비력을 자랑했다.
한국 배터리 유완식-김영조는 일본 타자들의 허를 찌르는 공 배합으로 별다른 위기없이 3회까지 버텼고, 야수진 역시 1개의 실책도 범하지 않는 철통 수비를 자랑했다. 물론 한국 역시 일본 선발투수의 구위에 눌려 3회까지 안타를 기록하지 못했다.
고비는 4회였다. 3회까지 호투하던 유완식은 4회 들어 갑자기 제구가 흔들렸다. 구위 역시 눈에 띄게 떨어졌는데 이유는 3회 말 무리 한 주루 때문이었다. 사정은 이랬다.
3회 말 유완식(9번 타자)이 볼넷으로 출루하자 오윤환 코치는 1루 주자 유완식과 1번 노정호에게 ‘히트 앤드 런’ 사인을 냈다. 문제는 타자의 스윙이 번번이 파울로 이어지며 1루에서 2루로 뛰던 유완식이 기진맥진 상태가 됐다는 것이다.
마닐라의 고온과 두 번의 베이스러닝으로 온몸이 땀으로 적셔진 유완식은 4회 초 갑자기 난조를 보이며 볼넷과 안타, 2루타를 맞고서 2실점했다. 윤 아나운서는 “께임의 승자는 4회에 가려졌다”며 “일본은 (2점을 낸 뒤) 승기를 잡았으며 한국은 비 맞은 비둘기인양 의 기소침한 빛을 보였다”고 기술했다.
한국 벤치는 지친 유완식[11] 을 내리고, 김양중-박현식을 차례로 올렸지만, 일본에 6회 1점, 7회 2점, 9회 1점을 내주며 0대 6으로 패하 고 말았다.
윤 아나운서는 “경기가 끝나고서 어느 필리핀 신문기자가 나에게 손짓을 하며 ‘키 큰 한국이 꼬마 일본에 맥 없이 졌다’고 말했다”며
“원통해도 일본이 확실히 우리보다 실력이 위였다”고 평했다.
사실이었다. 일본 투수들은 대부분의 한국 타자가 본 적이 없는 커브, 체인지업, 슬라이더 등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여기다 경기 경 험이 풍부해선지 몸놀림이 가볍고, 무엇보다 전체 선수가 20대 초·중반의 젊은 선수들이라, 체력 또한 좋았다.
이에 반해 한국은 실력은 둘째치고 경기 내내 스파이크가 천연잔디에 걸려 어기적어기적 움직였고, 난생처음 보는 강한 불빛(조명)에 적응하지 못해 번번이 외야 플레이를 놓치고 말았다.
일본에 패한 그날 밤. 한국 대표팀은 그야말로 초상집 분위기였다. 윤 아나운서는 <주간 스포츠>에 연재한 칼럼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날 저녁 패전지장(敗戰之將)은 그야말로 말이 없었다. 어느 선수가 오늘 실황을 방송했느냐고 나더러 묻는다. 내가 ‘이 비보(悲報) 는 이미 1초간에 지구를 일곱 번 반 도는 전파로 고국에 알려졌을 것이다’ 말하니 이 선수는 ‘우리는 고국에 돌아갈 수 없다’고 비통한 다. 그러더니 이내 ‘일본과 다시 께임할수 없소? 6대 0으로 이길 자신이 있소!’라고 한다. 나는 말했다. ‘1년에 한 번밖에 없는 거요. 내년에 이기도록 하시요.’ 나는 힘없이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후략)
박동희의 야구탐사, ‘잊힌 60년의 전설’ 최후의 국가대표
4. TBC 전속 해설가 시절
1965년 TBC는 1950년대 인천이 낳은 서동준이란 스타 투수를 전속 해설가로 영입하게 된다.[12] 대한민국 방송 사상 최초의 전속 해설가였다. 당시 TBC의 야구 중계 라이벌이라고 볼 수 있었던 DBS에선 김계현을 영입하였다.이후 은행 업무와 TBC 해설위원을 겸하던 그가 1977년 한일은행 지점장으로 발령이 나면서 해설위원 자리에서 물러났다.
여담으로 서동준의 대타로 바로 김성근이 들어왔는데 발음이 부정확한 데다 "공이 이빠이 들어왔어요" 같은 일본식 표현을 하다가 한 경기 만에 잘렸다. 김성근 이후에는 하일성이 후임으로 들어왔다.
5. 이후
상술하였듯이 한일은행 지점장을 역임하고 은행 내부에서 제법 높은 직위까지 승진하여 금융계에서도 제법 성공하였다. 은행에서 정년 퇴임한 서동준은 외부 활동은 거의 접으면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2014년 10월 17일 별세했다.은퇴 후인 1995년 제50회 청룡기 이벤트 경기인 청룡 올스타전 용군 코치로 출장하기도 하였다. 참고
6. 관련 문서
[1]
당시 부산의 쌍룡기는 메이저 대회의 위상이었다.
[2]
1953년에는
황금사자기가 열리지 않음
[3]
장태영, 박현식, 김양중도 해방 후 선수이지만 한국전쟁 전에 중학 야구(현재 고교 야구) 선수였다.
[4]
당시 기준
[5]
당시 일본, 중화민국(대만), 필리핀, 한국 4개국 참가
[6]
일본과의 1차 경기에서는 패했다
[7]
유완식 선생은 일본 고교 야구를 경험하고 일본프로를 경험한 야구 선각자다.
[8]
김영석 감독이 당시 36살의 노장 투수 유완식을 선발로 지명한 덴 이유가 있었다. 유완식이 일본 프로야구 출신으로, 누구보다 일본 야구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1939년 일본 프로야구단 한큐군( 阪 急 軍 : 오릭스 버펄로스의 전신)에 입단한 유완식은 1939년 오사카군(한신 타이거스의 전신)에 입단한 박현명에 이어 한국인으론 두 번째로 일본 프로 무대를 밟은 이였다. 유완식은 1939년부터 1942년까지 한큐군 2군에서 뛰었는데 1943년부턴 1군 백업포수로 활약했다. 호방한 성격과 리더십으로 일본 선수들 사이에서 리더로 통한 유완식은 1944년부터 주전 포수가 기대됐으나, 일본의 침략전쟁이 극에 달하며 일본 프로야구가 중 단되는 통에 1945년 7월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유완식은 후배 야구인들에게 자신의 노하우와 경험을 아낌없이 전수하면서도 포수에서 투수로 전향해 현역생활을 이어갔다. 36살의 늦은 나이에 대한민국 최초의 국가대표팀에 합류할 수 있던 것도 그의 실력이 20대 투수와 비교해 전혀 떨어질 게 없는 까닭이었다.
[9]
1923년 전북 익산에서 태어난 김영조는 7살 때 가족과 함께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으로 이주했다. 유소년 시절부터 야구에 남다른 재 능을 보인 김영조는 야구 명문 데이쿄상고에 입학하고서 촉망받는 야구선수로 성장했다. 특히나 2년 연속 여름 고시엔 대회 도쿄지역 예선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김영조는 ‘고시엔이 주목하는 유망주’로 우뚝 섰다. 하지만, 일본의 침략전쟁이 최고조에 달하며 고시 엔 대회가 무산된 통에 꿈에 그리던 고시엔 무대를 밟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의 꿈이 모두 좌절된 건 아니었다. 고향에서 인삼밭을 팔고서 일본으로 건너온 뒤 와세다대 주변에서 조선요리 식당을 운 영하던 김영조의 부모는 ‘조센징’이라는 차별 속에서도 아들의 성공을 위해 노력했고, 그런 부모를 보며 김영조는 다시 꿈을 키웠다. 김영조가 이를 악물고 야구와 학업 ‘두 마리 토끼’를 좇아 결국 어린 시절부터 동경했던 와세다 대학에 입학한 것도 헌신적으로 자신을 뒷바라지한 부모 때문이었다. 전쟁으로 도쿄 6대학 야구리그가 중단되자 김영조는 1944년 일본 프로야구팀 아사히군에 입단한다. 많은 선수가 일본의 침략전쟁에 동원된 통에 김영조는 학생 신분이었지만, 프로야구팀에서 뛸 수 있었다. 그해 4월 22일 김영조는 거인군(요미우리의 전신)과의 경기에 대타로 출전하며 ‘제3의 꿈’이던 일본 프로야구 무대를 밟는다. 공교롭 게도 그의 프로 데뷔전 첫 타석의 거인군 상대 투수는 후지모토 히데오, 한국명 이팔용이었다.
[10]
유완식, 김영조 선생 모두 당시 36세로 지금으로서도 많은 나이지만 당시로서는 선수 수명을 훨씬 넘은 상태였다. - 인용자 주
[11]
4이닝 2실점
[12]
당시 전속 해설료는 월 7000원 정도. 2023년 현재 화폐가치로는 월 100만원 정도되는 액수로 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