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훈 PD 연출 드라마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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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물 등급 제도|{{{#ffffff 시청 등급 }}}]] | 15세 이상 시청가 |
방송 시간 | 월요일, 화요일 오후 9:55~ |
방송 기간 | 2005년 9월 5일 ~ 2006년 3월 27일 |
방송 횟수 | 55부작[1] |
채널 | SBS |
제작사 | 김종학프로덕션 |
연출 | 이병훈[2] |
극본 | 김영현[3] |
출연 | 조현재, 이보영, 류진 外 |
링크 | 공식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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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4구체 향가 서동요를 바탕으로 만든 2005년 9월 5일 ~ 2006년 3월 27일까지 방송된 SBS 창사 15주년 기념 드라마다.2. 특징
그동안 조연에 불과했던 백제가 주연으로 등장하는 최초의 드라마이다.[4] 이 작품 이후 백제가 중심이 된 드라마는 2010년 방영된 근초고왕이 있다.주인공인 백제의 서동( 부여장, 무왕)이 신라의 선화공주를 후려친다는 플롯은 향가 서동요와 같으나, 노래를 퍼뜨린 사람이 서동을 사랑한 선화공주라는 설정이었다.
대장금과 이산으로 유명한 이병훈의 작품. 특이한 건 이병훈 감독의 유일한 SBS 작품이자 유일한 삼국시대의 사극이라는 것이다.[5]
대부분 이병훈 사단과 야인시대에 나왔던 배우들이 출연했다,
서동이 태학사라는 백제의 연구 기관에서 연구원이었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온돌을 서동이 만들었고, 두부가 하늘재에서 발명되었다고 하는 등 어이 없는 구석이 많다.[6] 초반에는 서동의 활약을 통해 백제의 과학을 보여주겠다는 의도였는데, 제대로 보여주지도 못하고 그 의도가 묻혔다. 이것은 장악원에서 일하는 주인공 동이를 통해 조선의 음악을 보여주겠다던 동이의 초반 의도가 묻힌 것과 비슷한 경우다.[7]
3. 등장인물
3.1. 주요인물
- 서동 : 조현재 (아역 김석[8])
- 선화공주 : 이보영 (아역 설리[9])
- 사택기루/김도함[10] : 류진 - 화랑도의 풍월주인 신라의 왕족. 나중에 무서운 집념과 뛰어난 두뇌로 5년만에 공방의 후계자가 된다.
- 마나모진 : 정선경 - 남편인 도수[11]의 뒤를 이어서 의류 장인 태학사의 의박사가 된 여성. 은진의 어머니.
- 부여선 : 김영호 - 좌평, 상좌평 위덕왕의 동생인 부여계의 큰아들이며 위덕왕의 조카. 이 작품의 메인 빌런이기도 하다. 항상 사촌형인 아좌태자와 왕위 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였다. 이 후 백제의 29대 어라하 법왕으로 즉위하지만, 서동이 일으킨 정변으로 인해 붙잡히고 끝내 본인의 충신인 흑치평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
- 목라수 : 이창훈 - 백제 태학사의 기술박사. 야금술과 노반 분야에서 최고의 실력을 가지며 경학에도 조예가 깊다.
- 연경후: 김형일 - 통칭 '대장'. 아버지가 반란 혐의를 뒤집어써 몰락한 귀족 가문의 장자로[12], 서동과는 전의성 전투에서 함께 죽을 고비를 넘기며 안면을 텄다. 그후 전의성 전투에서 공을 세워 부여선으로부터 받은 자금을 밑천으로 상단을 꾸려 큰 세력을 쌓아올렸고, 서동을 따라 백제로 숨어든 선화공주를 숨겨주는 데에도 기여했다. 무왕 즉위 이후에는 위사좌평에 임명되었다. 마지막 화에선 상좌평으로 나온다.
3.2. 신라 측 인물
- 진평왕 : 최동준 - 신라 제26대 임금.
- 마야부인 : 김화란 - 진평왕의 부인. 전통적인 귀족가문의 딸로써 특히 셋째 딸인 선화를 매우 아낀다.
- 천명공주 : 이경화[13] - 선화공주의 언니. 위송과 손잡고 선화와 왕권을 놓고 경쟁하는 인물.
- 위송 : 김진호 - 신라 진골출신으로 상대등 벼슬에 있다. 진평왕의 신임을 받는 품주의 우두머리로 항상 김사흠과 대립한다.
- 초기 : 노윤 - 선화공주의 시녀로써 어릴 때부터 선화를 섬겨 온 몸종.
- 보명 : 안여진 - 선화공주의 측근여관이며 신라의 궁중여관 이기도 하다.
- 서충 : 서범식 - 선화공주의 측근 호위무사.
- 아비지/김사흠 : 나성균 - 사택기루의 아버지로 신라 진골출신의 고관. 위송의 숙적. 세력기반이 약해 아들 기루의 첩자활동과 통해 권력을 잡으려 한다.
- 구산 : 성창훈 - 사택기루의 충실한 부하. 신라와 사택기루 사이를 오가며 정보를 전달한다.
3.3. 백제 측 인물
- 위덕왕 : 정욱 - 백제 제27대 임금.
- 왕구 : 맹상훈 - 오부 부장출신으로 위덕왕의 시종무장. 왕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치는 최고위급 측근.
- 해도주 : 한인수 - 백제의 명문 귀족인 해씨가의 우두머리.
- 흑치평 : 이희도 - 위사부의 4관등인 덕솔이며 부여선의 핵심 측근. 부여선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내던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충성심을 보인다.
- 진려 : 이우신 - 사공부의 달솔. 아좌태자의 장인. 후에 위사좌평 백제의 귀족세력인 진씨 가문의 실권자가 된다.
- 아좌태자 : 정재곤 - 위덕왕의 큰아들. 예술과 기술에 관심이 많다.
- 백무 - 손건우 - 아좌태자의 측근이자 백제 객부의 수장.
- 아택걸취 : 라재웅 - 백제 태학사의 경전박사. 태학사의 연락책으로 후에 목라수와 대립한다.
- 우영공주 : 허영란 - 왕의 조카 부여선(효순)의 이복동생.
- 은진 : 구혜선 - 모진의 딸. 어떠한 기술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놀기 좋아하는 성격. 항상 범로와 티격태격 한다.
- 고모 : 신국 - 하늘재의 의술사. 의료를 담당하고 있다. 실력 있는 의술사로써 맥도수와 태학사 동기이기도 하다.
- 주리영 : 김유진 - 하늘재의 여성 기술공. 남몰래 고이소지를 흠모하고 있다.
- 연가모 : 이일화 - 서동의 어머니. 백제 궁중의 무희로써 나중에 익산에서 목라수와 서동일행을 피신시키다가 죽음을 당한다.
- 국수 : 이숙 - 하늘재의 잡일과 취사 담당으로 호탕한 성격을 가진 중년 아주머니.
- 우수 : 이승아 - 하늘재의 여자 기술공. 가야 출신. 은진의 양숙이기도 하다.
- 맥도수 : 임현식 - 하늘재의 최고 기술사로 범로와 범생의 아버지. 연꽃 기와 제조기술을 가진 와(瓦)기술자이기도 하다.
- 아소지 : 송영용 - 하늘재의 기술사. 맥도수와는 젊은 시절부터 활동하였다.
- 고이소지 : 편일태 - 하늘재의 남성기술공. 아소지의 조카이기도 하다.
- 범로 : 백봉기 - 맥도수의 작은아들로 범생의 동생. 은진과는 티격태격하는 사이. 범생의 일로 서동과 틀어졌으나 나중에 화해하고 절친한 신하가 됨
- 범생 : 오승윤 - 맥도수의 큰아들이자 범로의 형. 총명하여 천문기술, 야금기술 등에 능하다.
3.4. 그 외 인물
- 공재원
- 박통일
- 한춘일
- 김동현 - 백가 역
- 여재구
- 홍승모
- 김재권
- 박규점 - 촌장 역
- 이종구
- 나재균
- 최윤준
- 고태산
- 유재익
- 단강호
- 김대성
- 원종선
- 김영
- 전해룡
- 구중림
- 윤서현
- 박우열
- 최성웅
- 김광인
- 성우진
- 김진형
- 김영석
4. 줄거리
서동은 위덕왕과 무선공녀 연가모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어머니 연가모는 당시 태학사의 기술사였던 목라수의 약혼녀였다. 목라수가 박사가 되면 혼인하기로 약조했는데 위덕왕의 과오로 모든 일이 어그러져 목라수가 위덕왕한테 자신의 여인을 빼앗긴 것인데 훗날 이 목라수는 서동의 스승이 되어 서동을 교육시킨다. 성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죽은 뒤 백제의 왕권은 땅에 떨어졌고, 귀족들의 등쌀에 기도 못 펴고 살던 위덕왕은 일본에서 백제로 돌아오던 아좌태자(쇼토쿠 태자의 초상을 그렸다는 그 아좌태자 맞다.)가 풍랑에 휩쓸려 죽었다는 이야기에, 아좌의 시신을 찾지도 못한 상황이라 그리 내키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상좌평이던 동생 부여계를 태제로 책봉하려 한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천재지변으로 인해 태제 책봉식은 취소되고, 이를 위덕왕과 아좌태자의 편이던 태학사의 목라수 박사가 꾸민 흉계로 몰아간 부여선은 목라수 박사 일행을 도륙하려 하나, 이 계획을 알아챈 서동이 태학사 일행과 함께 백제를 떠나 신라 하늘재에 숨어들게 된다. 신라궁에 물품을 공급하게 된 하늘재 일행을 따라 간 신라궁에서 서동은 우연히 선화공주를 만나 사랑을 키우게 된다. 그러나 서동이 선화공주에게 준 백제 태학사의 신표를 선화공주가 잃어버리게 되면서 하늘재 사람들이 백제인이라는 사실이 들통나게 되고, 문초 과정에서 서동이 친형처럼 따르던 범생이 죽게 되었고, 동료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이유로 서동은 하늘재 일원이 되지도 못하고 근처 허름한 집에서 10년 간 혼자 살게 된다.
10년이 흐른 뒤 596년, 여전히 방황하던 서동은 겨우 하늘재에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지만, 또 다시 오해가 얽혀 하늘재에서 쫓겨나 정처없이 떠돌다 우연히 선화공주와 재회하게 된다. 활달한 성격의 선화공주는 10년 전에 이미 죽은 줄 알았던 서동이 그때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서동을 찾고자 일부러 화랑들처럼 신라 전역을 주유하고 싶다며 아버지 진평왕에게 청해 궁에서 나온 뒤 서동을 찾기 위해 스스로 서동요를 퍼뜨리는데, 서동이 10년 전 만들었던 서동요 구절에 卯(토끼 묘) 자를 첨가해 어릴 적 서동과의 추억이 담긴 토끼굴로 서동이 스스로 찾아오게 한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둘은 재회하게 되지만 어릴 때 선화공주와의 만남으로 인해 범생이 형이 죽었다는 이유로 더 이상 선화와 만나지 않겠다고 하지만 둘은 결국 풋풋한 사랑을 시작한다. 선화공주는 아예 하늘재 근처의 진각사에 눌러앉아 틈만 나면 서동을 찾아와 서동에게 경학을 가르쳐 준다. 그 사이 서동은 선화의 호위무사가 되어 가야 유민들이 살던 척박한 땅을 지렁이를 이용해 기름지게 만드는 등 활약하기도 하는데, 서동이 굉장히 머리가 비상한 사람이며 주관이 뚜렷하다는 점을 알게 된 선화는 서동이 비록 신분은 낮을지언정[14]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걸 직감하게 되고, 서서히 서동을 깊이 사랑하게 된다.
한편 서동은 사촌동생 부여선의 위협 때문에 백제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던 위덕왕의 아들 아좌태자를 하늘재에서부터 백제로 잠입할 때까지 호위하게 된다. 서동은 파자놀이를 이용한 참요[15]를 퍼뜨리는 기지를 발휘해 아좌태자가 오히려 부여선의 호위를 받으며 백제로 돌아와 자신의 자리를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이후 아좌태자 옆에서 공을 세우며 목라수와 하늘재 사람들이 백제로 다시 돌아올 수 있게 한다.
서동의 깊은 영혼을 사랑하게 된 선화는 "저는 반말을 할 수 없는 여인은 마음에 품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한 서동으로 인해 신라 공주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서동이 충분히 존대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분이라며 존댓말을 하게 된다. 서동을 비롯한 하늘재 식구들을 수나라 노예 신분에서 면천시켜 주고 크게 들어 써주겠다는 선화의 제안에 서동은 결국 자신들이 백제인이라고 밝히게 되어 선화는 다시 서동에게 "넌 날 속였다."며 명령조 어투를 쓰고 다시는 서동을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쉽게 접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다 하늘재 기술사였던 사택기루가 실은 신라의 화랑 김도함이자 진평왕이 보낸 첩자이며 사택기루가 하늘재 박사가 되어 백제신기[16]에 접근할 수 있게 되면 바로 하늘재 사람들을 모두 죽인 뒤 선화공주와 혼인할 것이라는 계획을 알게 된 선화는 서동과 김도함이 하늘재에서 동시에 위기에 처하자 신라 공주로서는 김도함을 선택해 그를 위기에서 구하고, 여자로서는 서동을 선택하여 그를 하늘재에서 구해내 함께 야반도주한다. 둘은 평민으로 살아가기로 하지만 결국 김도함이 보낸 추격자들에게 꼬리가 밟혀 선화는 궁으로 돌아가게 되고, 서동은 백제 전의성으로 도망친다. 힘이 없어 사랑하는 사람 하나 지키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통감한 서동은 전의성 전투에서 공을 세우는 것을 시작으로 서서히 자신의 입지를 다지게 된다.
이후 김도함이 하늘재에서 박사가 되던 날 하늘재 식구들을 도륙하기 위해 신라에서 보낸 군사들이 서동을 비롯한 하늘재 사람들을 죽이지 못하게 하고 백제로 달아나도록 방조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선화공주는 신라 공주의 신분을 박탈당할 위기에 처하지만, 딸을 구하고자 진평왕은 대아찬 김도함이 신라를 배신하고 백제에 붙어먹었기에 스스로 백제로 향한 것이라며 김도함과 김사흠의 가문을 멸문시킨다. 한편 하늘재 도륙 현장에서 화살을 맞고 정신을 잃은 김도함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백제로 오게 된 뒤 자신의 가문이 멸문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안 그래도 질투하던 서동과 선화를 증오하게 되고, 하늘재에서 쓰던 사택기루라는 이름으로 부여선 일당에 가담하여 목라수와 서동을 벼랑 끝으로 몰아간다.
백제로 완전히 돌아온 후, 그저 나약한 왕자인 줄 알았던 아좌태자가 백성을 아끼는 성군의 재목임을 알게 된 서동은 아좌태자를 성심껏 보필한다. 서동은 스승 목라수와 함께 아좌태자를 보필하며 당시 백제의 실세였던 부여선의 계속되는 위협과 방해를 이겨내고 성장해 간다. 공주의 신분을 버리고 수나라 상인 진가경으로 신분을 위장한 선화도 상단 활동을 하며 부여선 일당을 비롯한 백제 고관대작들과 교분을 쌓으며 서동의 입지를 탄탄하게 해주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서동을 돕는다. 서동이 항상 지니고 있었던 오색야명주의 푸른빛 보석이 실은 백제 왕실에서만 쓰는 보석이라는 걸 알게 된 선화는 서동이 위덕왕의 숨겨진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선화를 통해 자신이 백제의 왕자였다는 것을 깨달은 서동은 왜 어렸을 때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른 채 어머니 연가모와 함께 숨어 살아야 했는지 이해하게 되기도 하지만 백제의 왕자라는 엄청난 정체성에 잠시 방황하고, 위덕왕과 아좌태자가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을까 두려워하기도 한다.
위덕왕은 아들 아좌태자에게 양위하기로 결심하고 동명제를 빌미 삼아 동명제 의식에서 아좌에게 선위하려는 계획을 비밀리에 세우지만, 부여계 일당이 이를 눈치 채게 된다. 아좌태자는 황룡신석을 받기 전에 상대포의 공혈(동굴)로 가 몸을 경건하게 하는데, 여러 의식을 치르다 마지막 의식에서 사택기루가 몰래 잠입시킨 자객 장두에 의해 암살당할 뻔 하지만 서동의 도움으로 큰 부상은 피한다. 몸을 추스리던 중 서동은 아좌태자가 잠든 사이 죽지 말라며, 아직 형님이라 불러 보지도 못했다며 말하는데 이를 들은 아좌태자는 형님이라 불러 보라 한다. 결국 서동은 자신이 바로 아좌태자와 부여선이 그토록 찾았던 연가모의 아들이자 위덕왕의 넷째 아들이라는 사실을 아좌태자에게 털어놓게 되고, 아좌는 자신을 충심으로 보필하던 서동이 실은 자신의 이복동생이었다고 하자 무척 기뻐하며 감격의 형제 상봉을 하여 형제의 의를 다진다. 서동은 아좌태자가 무사히 양위받을 수 있도록 사비성까지 그를 호위하여 가지만, 동명제 선위 제단을 눈 앞에 두고 사택기루가 보낸 암살자들에 의해 아좌태자는 서동에게 "폐하와 백제를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긴 채 사비성의 시전에서 시해당한다.
아좌태자와 함께 새로운 백제를 만들어 가려던 꿈이 좌절된 데다, 형제로서의 정을 나눈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형을 잃은 서동은 큰 슬픔과 절망에 빠지고 그런 서동을 선화는 위로해 준다. 그러나 서동이 자신의 아들임을 알고, 더 이상 자신의 무력함 때문에 아들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아버지 위덕왕을 보고 마음을 다잡는다. 위덕왕은 비밀스럽게 서동을 새로운 태자 '무강태자(武康太子)'로 책봉하고, 부여선을 몸소 암살하려다 실패해 오히려 부여선 세력에게 시해를 당한다. 위덕왕의 뒤를 이어 부여선의 아버지이자 위덕왕의 동생인 부여계( 혜왕)가 잠시 왕위에 있다 세상을 떠나자, 백제는 곧 부여선의 천하가 된다. 서동은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부여선의 신하가 되어 와신상담한다. 서동은 서서히 자신의 사람들을 모으며 힘을 키워가고, 선화공주는 변함없이 늘 곁에서 서동을 지켜보며 내조한다. 부여선 치하에서 서동은 목라수, 우영공주와 함께 서동이 세운 국책안을 실현시켜 보라며 적전 노비로 끌려가 죽도록 고생을 하며 자신이 만든 국책안이 얼마나 이상에만 치우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노비 생활을 하던 서동은 반란 세력을 진압하라는 부여선의 명을 받고 현장에 복귀해 백성들에게 돌을 맞아가며[17] 반란군을 진압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러면서 더욱 더 힘을 모으게 된다.
마침내 서동은 연등제 행사에서 부여선 세력을 역습해 부여선을 폐위시키고 아버지와 형의 원수인 부여선을 백성들의 앞에 세운다. 부여선은 백성들 앞에서 위덕왕과 아좌태자의 환영을 보며 정신이 나갔고, 결국 그를 보다못한 심복 흑치평이 부여선을 죽이고 자신도 따라 죽는다. 가장 낮은 백성이었기에 백성들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아는 서동은 마침내 백성을 위한 왕으로 등극한다. 즉위 과정에서 그 어떤 귀족들의 힘도 빌리지 않았고 오로지 백성들의 힘과 자신의 힘으로 왕위에 오른 무왕이었기에 귀족들은 이전과는 달리 무왕을 좌지우지할 수 없었다. 귀족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우영공주를 황후로 만들려는 계획을 세워 신라의 천명공주 세력과도 은밀히 손을 잡으려고 하지만, 자신의 마음보다 더 컸던 선화공주의 마음의 크기를 통감한 우영공주가 무왕과 선화공주가 맺어질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 귀족들의 이러한 물밑작업을 스스로 무왕에게 폭로하고 낙향함에 따라 귀족들은 이전보다도 더 힘을 잃게 된다. 이에 무왕은 백제의 왕으로서 신라의 공주인 선화공주에게 정식으로 청혼해 마침내 선화공주를 왕후로 맞이한다. 그러나 선화공주의 아버지 진평왕은 이 결혼을 백제 내부에 신라인 스파이를 다수 침투시킬 수 있는 기회로 보고 있었고, 이에 백제와 신라는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게 된다[18]. 남편과 아버지의 계속되는 전쟁 끝에 선화공주는 마음의 병을 얻게 되고, 결국 서동과 함께 그가 어렸을 때 살았던 집으로 나들이를 나갔다가 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만다. 세상을 떠나기 전 선화는 서동에게 이 자리에 절을 세워서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명복을 빌어 달라 청하고, 얼마 뒤 서동은 목라수로부터 백제금동대향로를 받게 되는데[19], 선화가 목라수에게 몰래 제작을 의뢰했던 것이었다. 이에 서동은 선화가 세상을 떠난 곳에서 향로를 피워놓고 그녀를 그리워한다.
5. 한계
시청률은 그럭저럭 나왔으나[20] 사극에서 현대적 말투와 억양을 보여준 데다가 배우들이 다 신입이라 연기력 논란이 불거져 나왔으며,[21] 소수의 엑스트라 동원과 초라한 세트로 인해 학예회라는 비아냥을 얻으면서 한국 사극의 초라한 규모에 대한 비아냥을 이끌어낸 기념비적인 업적을 달성한다. B급 사극이라고 지칭당하는 굴욕도 겪었다.특히 같은 시기에 방영한 비슷한 제작비를 가지고 만든 신돈이 전용 세트장 등을 만들어 꽤나 멋있는 모습을 보여준 것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수준낮은 세트는 욕을 먹을 만하다.
그리고 이 비아냥은 서동요가 종영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MBC에서 방영한 ' 주몽'에서 심화된다. 애초에 감독이 대규모 전쟁신보다는 오밀조밀한 재미를 추구하는 이병훈 감독이었기 때문에 규모가 초라했을지도 모른다는 변명 비슷한 것이 있지만, MBC의 초 히트 사극이었던 허준의 임진왜란 전투 신이 불과 50명으로 이뤄졌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반박의 여지가 없지 않아 있다. 물론 이것은 감독의 탓만으로 돌려질 문제라기보다는 효과음조차 제대로 준비하지 않은[22] 방송사의 문제다.
결국 SBS는 서동요에서 겪은 굴욕을 만회하고, 주몽보다 규모가 미칠 듯이 큰 고구려 관련 사극을 기획했는데, 하필이면 그것이 연개소문이었다.
이 밖에 자잘한 고증 오류도 많은 편인데, 몇 가지 거론하면 다음과 같다.
- 삼국 시대인데 상단이나 주막이 나오는데, 실제 역사에서는 삼국시대가 아니라 조선시대. 그것도 후기는 되어야 한다. 본작 뿐 아니라 한국 사극의 고질적인 문제[23][24].
- 신라나 백제의 군주를 황제라 부른다.
성왕 → '성황제' 위덕왕 → '위덕 황제' 혜왕 → '혜 황제' 법왕 → '법 황제' |
- 병약한 것으로 설정되어 사실상 엑스트라나 다름없기는 하지만, 위덕왕의 둘째 왕자가 본명 그대로 '부여도 왕자님' 으로 불린다. '아좌태자' 나 '무강태자' 등의 이름이 보여주듯 왕자나 공주라면 별도의 호칭이 있기 마련이고 극중에 등장하는 신라 공주들의 경우도 사료에 나오는 대로 천명이라거나 선화라거나 하는 등으로 부르는 것에 비한다면 아무리 엑스트라라도 엄연히 고증 오류가 되는 부분이다.
- 조연 인물 가운데 하나인 신라의 김도함이 백제에 잠입할 때의 이름으로 선택한 것이 '사택기루' 인데, 사택씨라고 하면 당시 백제에서 유력한 귀족 가문에 속했다[25]. 따라서 사택기루라는 이름을 쓴다는 것은 사택씨 가운데 신라와 내통하는 인물이 뒤를 봐 주었다거나 하는 설정이 덧붙지 않으면 어려운 일인데, 극에서는 이에 대해 아무런 설명이 없다.
- 태학사라는 기술자 조직에 속한 여성들이 관직을 받는다는 묘사가 나오며 가공인물인 '우영 공주' 도 실제로 관직을 받아 수행하는 묘사가 등장한다. 신라의 경우도 공주들이 관직을 받지는 않으나 국사에 참여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실제로 이랬을 가능성은 낮다. 삼국시대에 여성이 관직을 받은 사례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나마도 3세기 이전까지 왕족 여성들이 제사장 비슷한 것으로 임명되었다는 것이 전부이고, 7세기 한반도 여성이 행정직을 맡아 수행했음을 보여주는 사료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발굴된 바 없다.
- '칠지의 계' 라든가 태학사라든가 하늘재라든가 등등 사료에 전혀 보이지 않는 서약문이나 단체도 다수 등장한다. 삼국시대는 사료가 매우 부족하여 극작가의 창작에 의존하는 바가 크다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창작해 넣은 요소가 조금 과하다는 느낌이다.
한편 무왕의 아버지가 위덕왕이라는 것은 그저 일설에 불과하며[26] 법왕의 아들이라는 게 현재 학계의 정설이다.[27] 이 바람에 당시 드라마 시청자들이 무왕을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아버지로 법왕이 나와 몰입이 안 되었다고. 그리고 법왕은 드라마에 묘사된 것과 같은 악역이 아니라 날아가는 새도 풀어주라고 했던 인물이었다. 드라마에서는 왕위에 오르는 동안 업을 하도 많이 쌓다 보니 그를 없애기 위해 살생을 금하는 등의 조치를 내린 것으로 묘사했는데, 업을 쌓았느니 하는 것은 창작의 영역이다.[28]
OST에서는 대장금 OST와 유사한 느낌을 지울 수 없으며 뉴에이지/엠비언트 밴드인 |딥포레스트(Deep Forest)의 경향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음악으로서는 상당히 진일보한 모습이라 볼 수 있다.
6. 성과
하지만 어설프게 백제의 과학을 보여주려는 시도를 하다 실패한 초반과 달리 서동이 정치적으로 성장해 왕으로 등극하는 과정을 그린 중후반은 의외로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전개를 보여주며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주인공이 평범한 백성으로 태어난 탓에 작중 누구보다도 백성들의 삶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랬기에 백성들을 위한 왕으로 성장하는 과정이 매우 섬세히 묘사되었다. 이러한 면모는 작가 김영현이 뒤에 쓴 작품인 선덕여왕과 비슷하지만, 그보다 더 섬세하고 설득력 있게 그려졌다. 공주가 된 이후로는 별다른 성장과 변화를 보여주지 못했던 드라마 선덕여왕 덕만공주와 달리 서동은 끊임없이 고난을 겪으면서 오히려 고난으로부터 배우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인다.등장인물들 간의 관계도 서동요보다 4년 뒤에 나온 작품인 선덕여왕보다 더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특히 천명공주의 이른 죽음으로 제대로 형성되지도 못하고 그저 미실 세력에 대한 복수의 도화선으로 전락한 선덕여왕의 덕만-천명공주 자매의 관계와 달리 서동-아좌태자 형제의 관계는 비록 비극으로 끝나긴 했어도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었고 서로에게 성장의 계기가 되었다.
또 드라마 선덕여왕과는 달리 정치와 로맨스도 적절한 비중을 차지하면서 잘 섞였던 것도 장점. 배우들의 연기력도 초반과는 달리 캐릭터의 성장과 함께 발전했다.[29] 이런 장점들이 있기에 서동요는 그저 '조촐한 사극', '사극 시트콤'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으며, 그저 설화 속 인물로만 느껴지던 서동에게 생생한 인간성을 입혔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고 정리할 만 하다.
서동요
선화공주. 저고리와 치마가 나뉘어진 투피스 형태의 한복을 입고 있다. |
선덕여왕
덕만공주. 당나라에서 유래한 형태의 치마인 제흉유군(齊胸襦裙)을 입고 있다. |
[1]
원래 54부작이었으나 드라마의 인기와 더불어 사전제작 중이던 후속작 <연애시대>의 준비시간을 더 확보하기 위해 연장했다. 당초 60회까지의 연장이 검토되기도 했으나, 장기간의 촬영으로 건강이 나빠져 살이 많이 빠져버린
조현재가 이에 반대하며 결국 55회로 마무리. 대신 종영 후 전 출연진들이 모인 가운데 <서동요 스페셜>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2]
허준,
대장금 등을 연출한 사극의 대가. MBC 퇴사 후, 타방송사에서의 첫 연출작이자 현재 마지막 연출작. 이 작품을 끝으로 김영현 작가와 결별하여 차기작부터는
김이영 작가의 집필작인 <
이산>, <
동이>, <
마의>를 연출한다.
[3]
전작인 <
대장금> 이후로 다시 한 번 이병훈 PD와 작업하게 되었다. 다만, 이 작품이 이병훈 PD와 협업한 마지막 작품이며 이후에는
박상연 작가와 공동집필하는 행보를 보인다.
[4]
영화까지 범위를 넓힌다면 2003년에 개봉한 <
황산벌>이 있다.
[5]
나머지는 다
MBC에서 방영했으며,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이다. 그래서인지 MBC에 주로 나오는 이병훈사단의 배우들이 SBS에 출연했다.
[6]
온돌은 그 이전에도 있었다. 그리고
두부가 최초로 만들어진 시기는 훨씬 뒤인 10세기 때다.
[7]
동이도 역시 이병훈 감독의 작품이다.
[8]
이후
KBS 대하드라마
대조영에서
발해 무왕을 연기했다. 현재는 승마선수를 하고 있다.
[9]
지금은 배우로서 작품에 이름을 올릴 때 '최진리'라는 본명을 사용하지만, 이 드라마 출연 당시에는 '최설리'라는 예명을 사용했다. 그리고 이 작품 이후 주목을 받으면서
SM 엔터테인먼트와 전속 계약을 맺고
f(x)의 멤버로 활동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019년에 생을 마감했다.
[10]
드라마에서의 내용은 완전한 허구이나, 사택기루(沙宅己婁)라는 인물은 일본서기에 나온다. 하지만, 일본서기에 나오는 인물과 이 드라마의 인물이 동일인물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는 두 인물의 활동 시대가 다르다. 드라마는
위덕왕 연간에서
무왕 연간까지가 시대적 배경이고 위덕왕 때 젊은 신하로 나오는 사택기루와 달리, 실존 인물 사택기루는 앞 시대인
성왕 때 최고위인
상좌평을 역임한 인물이다.
[11]
완산주 전투에서 신라군과 싸우다가 전사하고 만다.
[12]
반란군 '대장' 취급을 받았기에 별명이 대장이 된 것이다.
[13]
배우
김수로의 부인이다.
[14]
이때까지만 해도 선화는 서동이 수나라 노예인 줄로만 알았다.
[15]
달이 둘이면 산이 하나(月月一山 → 崩(붕할 붕)), 해가 하나면 집이 하나(一日一家 → 宣(펼 선, 부여선의 이름)) : 황제가 죽으면 선이 한 짓이요, 황제와 태자가 죽으면 그도 선이 한 짓이다.
[16]
서동요에 등장하는, 백제의 모든 과학력과 기술력이 집대성되어 있는 백과사전.
[17]
서동은 노비로 끌려가기 전까지만 해도 부여선의 유일한 반대세력이었기에 백성들의 희망이었는데, 그런 서동이 갑자기 변절한 듯 나타나 반란군을 진압한다.
[18]
무왕대 백제가 신라를 계속하여 침공했다는 역사적 사실과 서동요 설화 모두를 활용하기 위한 적절한 설정.
[19]
목라수가 서동에게 향로를 바치면서 용 장식이 된 향로의 아랫부분에서부터 선인(仙人) 장식, 향로 꼭대기의 봉황 등이 무슨 뜻인지 하나하나 설명하는데, 이것이 심히 작위적인데다 오글거리기까지 한다.
[20]
평균 시청률 19.9%였다.
[21]
2ch 등 해외 게시판 번역 사이트인 "개소문넷"에서는 "한국 사람이 다 연기를 잘하는 건 아니란 걸 느꼈어요"라는 일본인의 코멘트가 올라오기도 했다.
[22]
화살 발사 효과음은 딱 2종류다. 그것도 화살 발사로는 도무지 들리지 않는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70년대풍 효과음이 연개소문으로 그대로 이어졌다.
[23]
가령 극의 주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연경후가 상단을 꾸려 부를 축적한 것으로 나오고 공주 자리에서 쫓겨난 이후 백제로 숨어든 선화도 연경후의 수하로 위장하여 무왕의 즉위에 공헌하는데, 정작 백제가 다른 나라와의 교역에서 뭘 사고 팔았는가에 대한 사료는 없다고 해도 좋을 수준이다.
[24]
반론도 있는데, 백제 무왕과 14살 가량 나이차가 있지만 같은 시대를 살았던 김유신과 천관녀의 이야기에서 천관녀가 기생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최소 삼국시대부터 기생이 있었음을 파악할 수 있으며, 따라서 조선 후기처럼 산골 같은 곳에 적어도 하나 정도는 있을 법한 정도까지는 아니라도 주요 도시 등지에는 주막과 같거나 비슷한 역할을 한 숙박 시설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주장은 천관녀가 기생이 맞다고 전제하고 숙박 시설이 있었을 것이라고 가정한 것이라 결국 가정에 가정이 꼬리에 꼬리를 문 것인데, 이 자체로 설득력이 떨어진다.
[25]
당장 2009년 미륵사 발굴 당시 확인된 무왕의 왕비가 '좌평 사택적덕의 딸' 로 되어 있다. 즉 왕비를 낼 정도로 세력이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드라마가 방영된 것이 발굴 이전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묘한 우연인 셈이다.
[26]
무왕이 위덕왕의 아들이라고 나와있는 것은
북사의 기록. 다만 중국 사서에서 한반도 국가의 왕계를 착오로 누락시키는 경우가 많아서 이런 케이스가 아니냐는 추측이 대세이다.
[27]
당장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도 법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여러 정황상 법왕의 정실 아들은 아니고 서자나 양자였을 것이라는 게 학계의 추측. 이마저도 최근 쌍릉 발굴로 인해 다른 의견을 제기하는 이들이 많아진 상황이다.
[28]
오히려 법왕의 통치 기반이 불안정했기에
불교라는 신앙의 힘에 의지해 정치를 펼친 것 아니냐는 설이 있다. 아버지인 혜왕은 그렇다쳐도 법왕 역시 즉위 1년만에 승하했던 데다 선왕인 위덕왕 시기부터 왕권이 크게 실추되었다는 정황적 증거가 많기도 하다. 서동요 설화에서 무왕이 왕통에서 먼 민간생활을 하다가 민심을 얻어 즉위했다는 대목에서 왕통을 위덕왕계에서 혜왕계로 바꾼 정변의 기획자가 무왕이라는 해석도 가능해 무왕이
당 현종처럼 고령의 할아버지와 심약한 아버지를 옹립하는 형식으로 정변을 일으켜 사실상 혜왕 시절부터 실권을 잡았을수도 있다.
[29]
다만 마지막 화에서 무왕이 전쟁을 지휘하는 부분은 변호 불가. 무왕은 의자왕과 마찬가지로 신라를 수없이 공격했던 왕인데, 배우인 조현재의 성량이 받쳐주지를 못해서 도저히 야전 지휘관 타입으로는 보이지 않는 편이다.
[30]
한반도에서
당나라풍 의상이 도입된 건
진덕여왕 때인 648년과
문무왕 때인 664년이다.
[31]
이러한 오류는 실질적으로는
원삼국시대가 배경인
주몽 때부터의 일이다. 주몽 이전에 방영된
해신은
통일신라가 배경이라서 당나라풍 의상이 나오는 게 올바른 재현이기 때문이다. 만약 통일신라 배경 사극에 서동요의 삼국시대 신라 의상이 나온다면 오히려 그게 잘못된 재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