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by(Wild Cat Heart, ruby=ワイルド・キャット・ハート)]> [ruby(齋藤, ruby=さいとう)] [ruby(彰俊, ruby=あきとし)] / Akitoshi Saito |
<colbgcolor=#ffffff,#2d2f34> 본명 |
<colbgcolor=#ffffff,#2d2f34> 사이토 아키토시 [ruby(齋藤, ruby=さいとう)] [ruby(彰俊, ruby=あきと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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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 |
비공개 실제 : 1965. 8. 8 ([age(1965-08-08)]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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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 | 177cm | |
체중 | 123kg | |
혈액형 | B형 | |
출생지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미야기현 센다이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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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츄쿄([ruby(中京, ruby=ちゅうきょう)])고교 (졸업)[1] 츄쿄대학 (체육학부 / 학사, 수영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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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파워하우스 + 브롤러 | |
시그니쳐 무브 |
엘보 어택[2] 케사기리 찹 래리어트[3] 키친 싱크 아이언 클로, 아이언 클로 슬램[4] 백드롭[5] 데스클록 스위클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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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니쉬 무브 |
데스 퍼니시[6] DDE[7] 데스클록[8] 스위클데스[9] 데스브랜드[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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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
사신 ([ruby(死神, ruby=しにがみ)])[11] [ruby(Wild Cat Heart, ruby=ワイルド・キャット・ハー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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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곡 |
Ghost of the Navigator -
Iron Maiden (2000 - 2004) Never Can Say Goodbye - The Communards (2021 - 2023) Deathtiny〜[ruby(死神, ruby=しにがみ)]の[ruby(宿命, ruby=しゅくめい)]〜 (2004 - 2021, 2023 - 2024.1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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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
1990년 12월 20일 (25세) 아이치현 한다시 한다 시민홀[13] 파이오니어 전지([ruby(戦志, ruby=せん し)])[14] vs 카네무라 유키히로[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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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
2024년 11월 17일 (59세, 커리어 34년) 아이치현 나고야시 돌핀즈 아레나[16] NOAH 사이토 아키토시 은퇴기념 대회 Deathtiny vs 마루후지 나오미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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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 | ||
주요 커리어 |
GHC 헤비웨이트 태그팀 챔피언 5회 GHC 그레이트 해피 크리스마스 챔피언 1회 GHC 글로벌 태그 리그 우승 (2008년) GHC 글로벌 태그 리그 우승 (2011년) ZERO-1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 1회 |
1. 개요
” [ruby(方舟, ruby=はこぶね)]に[ruby(乗, ruby=の)]りし[ruby(人生, ruby=じんせい)]、わが[ruby(心, ruby=こころ)]、[ruby(夜空, ruby=よ ぞら)]に[ruby(輝, ruby=かがや)]く[ruby(月, ruby=つき)]に[ruby(一点, ruby=いってん)]の[ruby(雲, ruby=くも)]なし!”[17]
( 방주에 올라탄 인생, 나의 마음, 밤하늘에 빛나는 달에 구름 한 점 없노라!)
( 방주에 올라탄 인생, 나의 마음, 밤하늘에 빛나는 달에 구름 한 점 없노라!)
일본의 전 수영 선수, 전 프로레슬러.
2. 커리어
2.1. 수영 선수
초등학교 4학년 때 수영을 시작한 사이토 아키토시는, 센다이 시립 코바시 중학교 시절 1학년 때 '제 1회 전국 JOC 주니어 올림픽 컵 하계 대회' ( 평영 부문) 50m, 100m부문에서 학생 신기록을 세우며 우승하고, 전국 중학교 수영 경기 대회에서는 3위의 실적을 남겼다.토호쿠 지방을 중심으로 스카웃 제의를 받았는데, 당시 전국적인 수영 명문이었던 나고야시의 츄쿄 고교에서는 스카웃 제의가 오지 않자 오기가 생긴 사이토는 츄쿄 고교에 수험을 봐서 입학했으며, 고등학교 3년 내내 인터하이(전국 고교 종합 체육대회) 평영 100m 우승을 차지했다.
츄쿄대 진학 후에도 수영을 계속해 2학년 때는 일본 학생 선수권(인터칼리지) 평영 100m, 200m에서 우승, 같은 해의 일본 선수권에서 당시 평영 100m 일본 기록을 가지고 있던 니혼대학의 후와 히사시에게 승리하며 우승, 이후 유니버시아드, 팬퍼시픽의 일본 대표팀에도 선정되었다.
당연하다시피 올림픽 강화 선수(올림픽 후보 선수)까지 올랐으나 대학교 졸업 이듬해 개최된 1988 서울 올림픽 대표 선수 선발대회에서 5위를 기록하면서 올림픽 출전이 좌절되자 교토 국민 스포츠 대회를 마지막으로 수영을 은퇴하고, '아이치현 스포츠 신흥 사업단'에 취직하여 닛신시의 한 운동 공원에서 근무했다.
2.2. 프로레슬러
2.2.1. 카라테에서 시작한 프로레슬링과의 인연
한편 고등학생 때 사이토는 고등학교 3학년 때 ' 신센구미'라는 이름으로 교내 조직을 만들었는데, 츄쿄고교의 다음 역인 카와나역의 극진공수도 도장에 입문한 동급생이 엄청 얻어맞았다는 이야기를 듣자 '내가 가 주지'라는 마음으로 자신도 입문하였다.[18]대학생 때도 도장은 옮겼지만 카라테를 계속해오던 사이토는 처음에는 슨도메(논컨택트) 카라테 도장에 잠깐 다녔으나 풀 컨택트 카라테를 하고 싶어서 다른 학원에 들어갔는데, 카라테 연맹에 가입되어있지 않은 곳이여서 대회에 출전할 때는 기술 교류 관계에 있던 아오야기 마사시의 '성심회관' 소속으로 출전했으며, 관장 아오야기를 비롯한 성심회관 소속 선수들과 연습을 같이 하며 아오야기를 만나게 되었다.
수영을 그만두고 스포츠 단체에 입사한 후에도 아오야기와 인연을 이어오던 사이토는 1989년에 아오야기에게 의뢰를 받았는데, 7월 2일 코라쿠엔 홀에서 펼쳐지는 '격투기의 제전'에서 오니타 아츠시와 카라테 vs 프로레슬링의 이종격투기 시합을 벌이기로 한 자신의 세컨드를 서 달라는 것이였다.[19]
거기서 뭐가 모르는 상태에서 세컨드에 섰다가 상대 세컨드와 난투극을 벌이게 되엇지만, 문자 그대로 눈앞에서 좋아하던 프로레슬링을 목격한 사이토는 다시금 프로레슬링이 대단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20]
아오야기는 오니타 아츠시가 이윽고 창설한 단체 FMW 창설전인 같은 해의 10월 6일 나고야시 대회에서 또다시 오니타의 대결 상대가 되었는데, 이 때 사이토 아키토시도 카라테 엑시비젼 매치에 등장하면서 처음 프로레슬링 링을 밟았다.
2.2.2. 파이오니어 전지 ~ 신일본 프로레슬링
또한 고등학생 시절 친우였던 마츠나가 미츠히로가 어느덧 성심회관의 카라테가가 되어 프로레슬링 데뷔를 했는데, 아오야기 마사시와 마츠나가는 고 류마가 창설한 신생 단체 '파이오니어 전지([ruby(戦志, ruby=せん し)])'에 참전했고 이윽고 이 둘과 친분이 깊은 사이토 아키토시에게도 프로레슬링 데뷔 요청이 들어왔다.이를 승낙한 사이토 아키토시는 데뷔전 직전 "프로레슬링은 좋다! 사이토도 해라"라고 말해준 아오야기 마사시의 말에 힘입어 직장에 곧바로 사표를 던지고[21] 1990년 12월 20일 아이치현 한다 시민홀에서 열린 파이오니어 전지([ruby(戦志, ruby=せん し)])의 흥행에서 갑작스럽게 출전, 카네무라 유키히로와의 경기를 통해 프로레슬러로 데뷔하게 된다.[22] 경기 이후 고 류마가 '파이오니어에서 앞으로 함께 열심히 하자'라는 말을 듣고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답하면서 파이오니어 소속이 되기로 결심했지만 파이오니어는 이 대회를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졸지에 갈 곳을 잃은 사이토는 낮에는 이사짐 센터, 밤에는 코메다 커피[23] 직원과 바텐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비를 벌었고, 이듬해인 1991년 7월 13일에 성심회관 주최 대회에 참여했다. 거기서 대회에 협력해 주었던 단체인 재팬 여자 프로레슬링의 레퍼리였던 테드 타나베와 윌리 야마구치가 사이토에게 새로운 단체를 만들 건데 오지 않겠냐고 스카우트하면서 이윽고 '세계 격투기 연합 W☆ING'에 입단하게 되었다.
1991년부터 W☆ING에서 활동하며 가라테 출신답게 격투를 이용한 스타일을 구사했고, W☆ING이 망하면서 신일본 프로레슬링에서 활동하게 된다. 1992년 스승인 아오야기 마사시가 운영하는 가라테 유파 도장인 성심회관을 대표하며 신일본 소속 선수들과 대립을 하였고 대립 종료 이후 신일본 프로레슬링에 정식 입단하였다.
가라테 스승인 아오야기와 함께 신일본의 고참 선수인 코시나카 시로가 만든 스테이블인 헤이세이 유진군에 가입하며 여러 선수들과 경기를 가지며 꾸준히 출전하다가 1998년 12월 말에 후지타 카즈유키와의 경기에서 패한 것을 끝으로 신일본을 퇴단하였다.
2.2.3. 프로레슬링 NOAH
나고야에서 개인 식당을 운영하는 등 한동안 프로레슬링 활동이 없다가 2000년에 신생 단체였던 프로레슬링 NOAH 창단 소식을 듣고 직접 미사와 미츠하루에게 참전 요청을 부탁했고, 미사와가 흔쾌히 받아들이면서 아오야기 마사시와 팀을 이뤄 마루후지 나오미치 & 이노우에 마사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다. 이후부터 NOAH에서 활동을 계속하면서 ZERO-1에도 출연하는데, 2002년에 아키야마 쥰과 팀을 이뤄 리키오 타케시 & 모리시마 타케시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GHC 태그팀 챔피언에 등극하며 첫 커리어를 만든다.
매번 태그팀 챔피언으로 군림하며 방어를 해 나갔으나 2003년에 혼다 타몬 & 코바시 켄타에게 패하며 챔피언 자리를 잃고, 그 후로는 싱글 및 태그팀 경기게 번갈아가며 출연하며 챔피언십에서 거리가 멀어지고, 2005년에 드래곤 게이트에도 잠시 출연해 경기를 가진다. 2006년 1월 프로레슬링 NOAH에 정식 입단하였다.
2008년부터 바이슨 스미스와 같이 팀을 이루며 글로벌 태그 리그에서 우승하고, 계속 뜨면서 마루후지 나오미치 & 스기우라 타카시를 꺾고 통산 2회 GHC 태그팀 챔피언에 오른다. 그러나 1년후 사사키 켄스케 & 모리시마 타케시에게 패하며 챔피언 자리를 잃고, 시오자키 고의 GHC 헤비웨이트 챔피언 자리에도 도전했으나 패하며 챔피언 등극에 실패한다.
2009년 6월 13일에 벌어진 GHC 태그팀 챔피언십 매치에서 미사와 미츠하루에게 고각도 백드롭을 시전했을 때 미사와 미츠하루가 접수 실패로 경추 신경이 절단되어 의식불명 및 심폐정지 상태에 빠져 사망하는 사고가 생겼고, 결과적으로 사이토 아키토시는 미사와 미츠하루의 마지막 대전 상대가 되었다.[24]
사고의 발단이 된 백드롭은 봉인기가 되었지만 '사장(미사와 미츠하루)의 마음의 소리가 들릴 때가 되면 해금한다'라고 말했으며, 3개월 후인 9월 12일에 벌어진 모리시마 타케시와의 싱글 매치에서 미사와 미츠하루에게 용서를 빌듯이 하늘을 우러러 보며 3개월만에 백드롭을 사용하게 되었고, 스위클데스를 써서 승리를 거둔다. 경기 후 사이토 아키토시는 "여러분 죄송합니다. 백드롭 써버렸습니다"라고 울먹이며 팬들에게 사과했다.
2012년에 아키야마 쥰과 팀을 이뤄 자이언트 버나드 & 칼 앤더슨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통산 3회 태그팀 챔피언이 되고, NOAH & 신일본 프로레슬링 & 전일본 프로레슬링이 합동으로 개최한 무대에서 고토 히로오키 & 신자키 진세이와 팀을 이뤄 야노 토루 & 이이즈카 타카시 & 나카무라 신스케를 상대로 승리를 가둔다. TNA 소속의 사모아 조 & 매그너스에게 패해 태그팀 챔피언 벨트를 잃고 3달 후 시오자키 고와 팀을 이뤄 마이바흐 타니구치 & KENTA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통산 4회 태그팀 챔피언이 된다.
FA가 된 후부터 NOAH를 중심으로 해서 여러 단체에 각각 참전하고, 2014년부터 다시 NOAH 소속으로 활동한다.
한동안 전처럼 챔피언십 전선에서 멀어지다가 2018년에 마루후지 나오미치와 팀을 이뤄 마사 키타미야 & 나카지마 카츠히코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통산 5회 태그팀 챔피언이 된다. 2009년에 모리시마 타케시 & 사사키 켄스케에게 패하며 챔피언 벨트를 뺏기고, 그후로는 챔피언십 매치를 제외한 다른 경기들에서만 이기는 상황이었다.
2021년에 반선수회동맹의 동료 이노우에 마사오와 같이 펑키 익스프레스의 모하메드 요네 & 타니구치 슈헤이를 상대로 패자 유닛 흡수 매치를 벌이나 패하면서 펑키 익스프레스 멤버로 들어가게 된다.
2024년에 ZERO-1에서도 활동하게 되면서 크리스 바이스를 꺾고 새로운 ZERO-1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에 등극하면서 커리어 첫 싱글 벨트를 획득했으며, 이후부터 NOAH와 ZERO-1을 오가며 활동한다. 챔피언 자리를 지켜나갔으나 7월 13일에 시오자키 고에게 패해 챔피언 자리를 잃는다. 경기가 끝난 후 사이토 아키토시는 11월에 은퇴한다는 은퇴 선언을 하고, 20일에는 이시카와 슈지와 팀을 이뤄 시오자키 고 & 후지타 카즈유키를 상대로 경기를 갖지만 패한다. 9월에 모하메드 요네와 같이 마루후지 나오미치 & 스기우라 타카시를 상대로 GHC 태그팀 챔피언십 매치를 갖지만 패하면서 챔피언 등극에 실패한다.
2.2.4. 무거운 십자가를 내려놓다
11월 17일에 사이토 아키토시 은퇴 기념 대회 Deathtiny가 개최되었고, 세미 메인 이벤트에서 NOAH의 상징이자 미사와 미츠하루의 직계 제자인 마루후지 나오미치를 상대로 마지막 싱글 경기를 갖게 되었다.
경기 전부터 마루후지는 '사이토 아키토시의 상대는 나와 미사와 미츠하루 두 명'이라고 언급했고, 이에 화답하듯 사이토 아키토시는 마지막 입장 때 한 손에는 팬들이 써준 메시지로 만든 깃발, 한 손에는 미사와 미츠하루의 가운을 들고 입장했다.
경기 마지막에 사이토가 마루후지에게 미사와 미츠하루에게 썼던 그 백드롭을 작렬했는데 마루후지는 사이토의 마음의 짐을 내려주듯 즉시 함성을 지르며 일어났고, 이어서 미사와의 상징 그 자체인 원투 엘보 → 롤링 엘보에 이은 러닝 엘보 어택을 사이토에게 작렬하고 사이토에게 쓰리 카운트를 얻어내면서 사이토의 은퇴 경기가 마무리되었다. 이렇게 미사와의 직계 제자 마루후지 나오미치가 그날 못 다한 경기의 마무리를 지어줌으로써 사이토 아키토시가 언제나 짊어지고 있던 십자가를 내려주었다. #
[ruby(俺, ruby=おれ)]は[ruby(引退, ruby=いんたい)]してNOAHのプロレスファンとなる、そうなって[ruby(一番, ruby=いちばん)][ruby(最初, ruby=さいしょ)]に[ruby(見, ruby=み)]れるのがGHCなんて[ruby(最高, ruby=さいこう)]じゃねえか! リングを[ruby(降, ruby=お)]りるまではプロレスラー。[ruby(見得, ruby=みえ)]を[ruby(切, ruby=き)]らせてくれ。[ruby(倒, ruby=たお)]れぬ、[ruby(疲, ruby=つか)]れないのがプロレスラーだ![ruby(方舟, ruby=はこぶね)]に[ruby(乗, ruby=の)]りし[ruby(人生, ruby=じんせい)]、わが[ruby(心, ruby=こころ)]、[ruby(夜空, ruby=よ ぞら)]に[ruby(輝, ruby=かがや)]く[ruby(月, ruby=つき)]に[ruby(一点, ruby=いってん)]の[ruby(雲, ruby=くも)]なし!”
(나는 은퇴하고 NOAH의 팬이 된다. 그리고 처음 볼 수 있는 게 GHC라니 최고이지 않은가! 링을 내려갈 때 까지는 프로레슬러니까, (잠시) 나를 과시하게 해줘.[25] 쓰러지지 않고, 지치지 않는 것이 프로레슬러다! 방주에 올라탄 인생, 나의 마음, 밤하늘에 빛나는 달에 구름 한 점 없노라!)
(나는 은퇴하고 NOAH의 팬이 된다. 그리고 처음 볼 수 있는 게 GHC라니 최고이지 않은가! 링을 내려갈 때 까지는 프로레슬러니까, (잠시) 나를 과시하게 해줘.[25] 쓰러지지 않고, 지치지 않는 것이 프로레슬러다! 방주에 올라탄 인생, 나의 마음, 밤하늘에 빛나는 달에 구름 한 점 없노라!)
은퇴전을 마무리 지은 사이토 아키토시는 이와 같은 마이크웤을 남기고 하늘에 인사를 남긴 후 링에서 내려왔고, 퇴장 직전에 양 팔을 벌리며 함성을 지르며 건재한 모습으로 마지막 퇴장을 마쳤다. #
사이토는 백스테이지에서 "오늘, 미사와 사장의 가운을 가지고 입장했습니다. 마지막에, 하늘에 인사를 했을 때, 환청일지도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긴 시간 동안, 고생했다."라고 환청이 들렸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코멘트를 남겼고, 그렇게 자신이 짊어진 무거운 십자가에서 한 번도 도망치지 않았던 남자 중의 남자 사이토 아키토시는 무거운 십자가를 내려놓고 NOAH의 팬으로 돌아갔다.
3. 여담
- FC 마치다 젤비아의 팬이다.
- 수영을 시작한 계기는 체육 수업때 25m 수영에서 여자애한테 져서였다고. 이기지 못해서 분한 마음에 연습을 하자고 생각하여 센다이 시내의 수영 교실에 등록했고, 연습 때는 별로였는데 시합 때만 되면 유독 강해서 계속 하게 되었다고 한다.
- 초등학생 때 이미 170cm의 거구였는데, 의외로 초등학생 때부터 중학생 때까지 바이올린을 배웠다고 한다.
- 수영 선수였던 때부터 프로레슬링 팬이여서 안토니오 이노키를 보고 처음 프로레슬링에 빠졌고, 고등학생 시절 대회에서 우승했을 때는 헐크 호건의 일본 시절 아이덴티티였던 '이치방!(최고!)'을 시상식 때 외쳤다고. 1985년 일본 선수권에 출전했을 때는 더했는데, 당시 예선 1위 선수가 결승전 선수 입장 때 입장곡을 고를 수 있는 특권이 있었고, 예선에서 1위를 차지한 사이토는 초슈 리키 테마곡인 POWER HALL을 틀면서 입장했다고 한다.
- '미스터 덴져' 마츠나가 미츠히로(松永 光弘)와는 친한 고등학교 동급생이었다. 스모부였던 마츠나가를 고등학교 3학년 때 '신센구미'라는 교내 조직을 만든 사이토가 꼬드겨서 가입시켰고, 활동 내용은 사이토가 은퇴하기 직전 사이토와 인터뷰를 한 기자가 물어봤었는데, 기자 왈 현대의 규제 사항을 가볍게 넘어섰다고. [26]
- 링 외에서는 노란색 렌즈가 들어간 안경을 착용한다.
- 링 위에서는 웃음기 하나 없는 사신같은 모습을 고집하지만, 사석에서는 차분하고 지적인 패션을 위주로 한 패션 센스가 좋은 선수로 꼽히고 있다.
- 실제로도 글솜씨도 좋고 말도 잘하는 편인데다 다양한 분야에서의 지식이 굉장히 다양하여, NOAH에서 리그전이 있거나 할 경우에는 '사이토식 멋대로 선수 평가'라는 이름으로 뜬금없는 발화부터 시작해서 굉장히 다양한 접근법으로 선수를 소개하는 것이 일종의 명물이 되었다. 선수 생활 말기에는 객원 해설로도 상당히 자주 등장했다.
- 연말 크리스마스 흥행 등에서는 여장을 하는 등 평소에 보기 힘든 모습을 자주 보여줘서 흥행을 띄우는 것으로 유명하다.
- 입장 시에 에이트볼 당구의 8번이 새겨져 있는 목걸이에 입을 맞춘 후 하늘을 쳐다보며 왼손 검지로 하늘을 가르키며 미사와 미츠하루에게 기도를 보낸다. 8번이 새겨진 목걸이는 수십년 간 사이토와 함께 해 왔으며, 은퇴전에서 NOAH 팬 중 추첨을 받아서 이 목걸이를 당첨된 팬에게 직접 넘겼다.
4. 둘러보기
KENTA | 카네마루 요시노부 | 타카야마 요시히로 | 사이토 아키토시 |
스기우라 타카시 | 하라다 다이스케 | 다나카 마사토 | 마이바흐 타니구치 |
콰이어트 스톰 | 히라야나기 겐바 | SUWA | 코토우게 아츠시 |
<colbgcolor=#000000><colcolor=#000000> | ||||
시오자키 고 | 사이토 아키토시 | 모하메드 요네 | ||
코토우게 아츠시 | Hi69 | 오오하라 하지메 |
역대 더 토너먼트 우승자 | ||||
창설 | → | 2008 | → | 미정 |
- | → | 사이토 아키토시 | → | - |
역대 글로벌 태그 리그 우승자 | ||||
창설 | → | 2008 | → | 2009 |
- | → | 사이토 아키토시 & 바이슨 스미스 | → | 시오자키 고 & 미사와 미츠하루 |
2010 | → | 2011 | → | 2012 |
타카야마 요시히로 & 사노 타쿠마 | → |
스페셜 어택 팀 ( 아키야마 쥰 & 사이토 아키토시) |
→ |
BRAVE ( 마루후지 나오미치 & 모하메드 요네) |
도쿄 스포츠 프로레슬링 대상 최우수 태그팀 상 | ||||
초세대군([ruby(超世代軍, ruby=ちょうせ だいぐん)]) ( 카와다 토시아키, 미사와 미츠하루) (1991) |
→ |
반선수회동맹([ruby(反選手会同盟, ruby=はんせんしゅかいどうめい)]) (사이토 아키토시, 기무라 켄고, 아오야기 마사시, 코시나카 시로) (1992) |
→ |
초세대군([ruby(超世代軍, ruby=ちょうせ だいぐん)]) ( 코바시 켄타, 미사와 미츠하루) (1993, 1994) |
[1]
현 츄쿄대학 부속 츄쿄고교.
아이치현
나고야시 소재. 수영, 피겨스케이트, 야구 명문으로 수많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2루수
요시카와 나오키를 비롯한 수많은 야구 선수들이 이곳을 나왔다. 같은 업계에서는 같은 NOAH의
스기우라 타카시와,
DDT 프로레슬링의
마츠나가 토모미츠가 있으며, 데스매치로 이름이 높았던 전 프로레슬러이자 스테이크 가게 운영으로 크게 성공한 '미스터 덴져' 마츠나가 미츠히로는 고교 시절 동급생이었다.
[2]
몸통이
시오자키 고 왈 냉장고만큼 두꺼운 사이토인 만큼 몸통의 무게를 실어서 치는 엘보가 굉장히 묵직하다.
[3]
몸통의 움직임은 거의 없이 팔을 크게 휘두르는 식의 래리어트를 주로 사용한다. 코너식으로도 사용한다.
[4]
둘 다 2011년 사망한 친우 '빅 버팔로'
바이슨 스미스의 기술로, 바이슨 스미스를 추모하는 의미로 이어받아 사용했다.
[5]
이 기술 낙법에 실패한 미사와 미츠하루가 사고사하는 비극도 있었으나, 사이토가 모든 비난과 갈 곳 없는 분노 등 모든 것을 감수한다는 의미에서 은퇴까지 이 기술을 사용하면서 사이토의 책임감과, 사이토가 짊어진 무거운 십자가의 상징이 되었다.
[6]
상대를 리버스 DDT의 자세로 잡아 가슴에 숏 레인지식 래리어트를 박는 기술.
카즈 하야시의 파이널 컷과 동일하다. 뜻은 사신의 처벌.
[7]
데스 데드 엔드의 약칭. 저먼 수플렉스.
혼다 타몬의 피니셔였던 데드엔드를 계승하여 독자적인 타이밍에 던진다.
[8]
스탠딩 사이드 슬램. 뜻은 사신의 요람. 초크 슬램과 비슷한데, 차이점은 상대의 목을 완전히 팔로 감싸고 뒤로 떨군다는 것. 각도가 높지는 않은데 들어올리는 것이 빠르며 카운터로도 자주 사용한다. 간혹 연발로 갈겨서 상대를 그로기 직전으로 만들거나 핀을 따내는 경우도 있다.
[9]
죽음의 낫이라는 뜻으로, 제자리에서 점프해서 사용하는 엔즈이기리이다. 프로필상 120kg가 넘는 사이토가 아무런 도움닫기도 없이 점프해서 상대의 뒷목을 걷어차야 한다는 점에서 상당한 신체능력이 요구되는 기술인데, 사이토는 이 기술을 60세 직전인 은퇴 때까지 사용했다. 카운터 기술로 사용하거나, 주저앉아 있는 상대에게도 사용하는데 이때는 기존 스위클데스보다 확실히 고속으로 들어간다. [10] 사이토의 진 피니셔. 브레인버스터 자세에서 변형된 리버스 파일드라이버로 날리는 기술. 스캇 스타이너의 SSD(스타이너 스크류 드라이버)와 동일하다. 죽음의 낙인이라는 뜻. [11] 펑키 익스프레스 시절 즈음에 공식 별명은 변경했으나, 사이토를 상징하는 별명으로 쭉 남아 있었다. [12] Deathtiny~사신의 숙명~. 사신 기믹일 때 항상 사용하던 테마곡으로 펑키 익스프레스 시절 잠시 테마곡을 바꿨다가, 자신의 상징곡인 만큼 펑키 익스프레스 이후 은퇴 때까지 사용했다. [13] 2006년 노후화로 인해 해체되었다. [14] 일본 내 인디 단체의 시작이라고 불리는 단체. 1986년 전일본 프로레슬링에서 로스터 과다를 이유로 짤린 고 류마, 타카스기 마사히코, 아폴로 스가와라가 당시 신일본과 전일본의 사이가 최악이여서 신일본에 이적하지도 못하고 강제 은퇴 위기를 맞자 1988년 세운 단체이다. 별 반응이 없어서 1990년 12월 20일 대회, 즉 사이토 아키토시의 데뷔전이 포함되어 있는 흥행을 마지막으로 해체했고 남은 멤버들은 오리엔탈 프로레슬링에 흡수되었다. 단체 이름은 '전사(戦士)'와 일본어 발음이 동일하다. [15] 재일교포 출신 프로레슬러. 별명은 '불합리 애송이(理不尽小僧)'. 본명은 이형호. 카네무라도 이날이 데뷔전이였다. 이후 '카네무라 킨타로(金村キンタロー)'로 링네임을 변경했고, 데스매치로 유명해졌으나 2008년 1월에 여성 스태프에게 강제 외설행위를 하여 체포를 당하면서 이미지가 나락으로 갔다. [16] 아이치 현립 체육관이 이름을 변경하였다. [17] 사이토 아키토시의 은퇴 마이크웤. 문학적 소양이 높은 사이토 아키토시다운 은퇴사로, NOAH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의 마음을 구름 없는 밤하늘에 빛나는 달로 묘사했다. [18] 첫 연습에서 브라운벨트를 로우킥으로 쓰러트렸는데, 블랙벨트한테는 작살났다고 한다. 목요일이 부활동을 쉬는 날이여서 고문 선생님께 비밀로 하고 매주 목요일만 다녔다고 한다. [19] 규칙은 3분 5라운드로 KO와 항복만 인정되었으며, 선수가 장외로 나가면 반대 진영의 세컨드들이 두들겨 패서 다시 링 안으로 집어넣는 일종의 럼버잭 매치였다. [20] 사이토 왈, "관장(아오야기 마사시)이 얼굴에 킥을 막 꽃아 넣는 것을 엄청난 표정으로 전부 다 받아내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고 카라테도 대단하지만 프로레슬링도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21] 직장 상사가 '그만두고 어떻게 하려고?'라고 물었을 때 프로레슬링을 하겠다고 하니까 엄청 놀랐다고 한다. 근데 퇴직하자마자 프로레슬러가 되려고 일 그만뒀다고 하면 아오야기가 환영해줄거라 생각해 아오야기에게 전화했더니 "멍청아! 왜 (직장을) 그만두는건데;;?"라고 했다고...다행히도 가족들은 이해해줬다고 한다. [22] 시합 당일날 갔더니 고 류마가 덜렁 '이 녀석이랑 싸워라'라고 했다고. 3라운드 형식이였고, 그동안 그냥 때리고 차고의 반복이였다고 한다. [23] 나고야시가 본거지인 일본의 커피 체인점. [24] 사망 소식을 들은 사이토 아키토시는 직후에 한숨도 못자고 은퇴, 심지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것까지 생각했지만, 6월 14일의 시합 후, 사이토 아키토시는 미사와 미츠하루의 영정사진을 향해 무릎을 꿇고 '어떤 무거운 십자가라도 짊어진다. 링에 계속 오르는 것이 사장에게의 보답'이라며 선수 생활을 계속할 것을 결의했다. 사고 후에는 많은 팬들이 이 일은 불행한 사고일 뿐이며 사이토는 잘못이 없다고 동정을 표하는 반면 여전히 인터넷에서 일부 팬들로부터 비난을 당했지만, 사이토 아키토시는 자신에게 말하는 것으로 기분이 풀리면 다 받겠다며 도망치지 않겠다고 말했다. [25] '[ruby(見得, ruby=みえ)]を[ruby(切, ruby=き)]る'라는 표현은 가부키에서 나온 용어로, 배우가 자신을 과시하듯 과장된 몸짓을 하는 것에서 유래됐다. [26] 이것 때문에 고교 수영계를 씹어먹고 있었던 사이토지만 고문 선생님한테 부활동 그만두라고 몇 번이나 들었다고 한다.
죽음의 낫이라는 뜻으로, 제자리에서 점프해서 사용하는 엔즈이기리이다. 프로필상 120kg가 넘는 사이토가 아무런 도움닫기도 없이 점프해서 상대의 뒷목을 걷어차야 한다는 점에서 상당한 신체능력이 요구되는 기술인데, 사이토는 이 기술을 60세 직전인 은퇴 때까지 사용했다. 카운터 기술로 사용하거나, 주저앉아 있는 상대에게도 사용하는데 이때는 기존 스위클데스보다 확실히 고속으로 들어간다. [10] 사이토의 진 피니셔. 브레인버스터 자세에서 변형된 리버스 파일드라이버로 날리는 기술. 스캇 스타이너의 SSD(스타이너 스크류 드라이버)와 동일하다. 죽음의 낙인이라는 뜻. [11] 펑키 익스프레스 시절 즈음에 공식 별명은 변경했으나, 사이토를 상징하는 별명으로 쭉 남아 있었다. [12] Deathtiny~사신의 숙명~. 사신 기믹일 때 항상 사용하던 테마곡으로 펑키 익스프레스 시절 잠시 테마곡을 바꿨다가, 자신의 상징곡인 만큼 펑키 익스프레스 이후 은퇴 때까지 사용했다. [13] 2006년 노후화로 인해 해체되었다. [14] 일본 내 인디 단체의 시작이라고 불리는 단체. 1986년 전일본 프로레슬링에서 로스터 과다를 이유로 짤린 고 류마, 타카스기 마사히코, 아폴로 스가와라가 당시 신일본과 전일본의 사이가 최악이여서 신일본에 이적하지도 못하고 강제 은퇴 위기를 맞자 1988년 세운 단체이다. 별 반응이 없어서 1990년 12월 20일 대회, 즉 사이토 아키토시의 데뷔전이 포함되어 있는 흥행을 마지막으로 해체했고 남은 멤버들은 오리엔탈 프로레슬링에 흡수되었다. 단체 이름은 '전사(戦士)'와 일본어 발음이 동일하다. [15] 재일교포 출신 프로레슬러. 별명은 '불합리 애송이(理不尽小僧)'. 본명은 이형호. 카네무라도 이날이 데뷔전이였다. 이후 '카네무라 킨타로(金村キンタロー)'로 링네임을 변경했고, 데스매치로 유명해졌으나 2008년 1월에 여성 스태프에게 강제 외설행위를 하여 체포를 당하면서 이미지가 나락으로 갔다. [16] 아이치 현립 체육관이 이름을 변경하였다. [17] 사이토 아키토시의 은퇴 마이크웤. 문학적 소양이 높은 사이토 아키토시다운 은퇴사로, NOAH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의 마음을 구름 없는 밤하늘에 빛나는 달로 묘사했다. [18] 첫 연습에서 브라운벨트를 로우킥으로 쓰러트렸는데, 블랙벨트한테는 작살났다고 한다. 목요일이 부활동을 쉬는 날이여서 고문 선생님께 비밀로 하고 매주 목요일만 다녔다고 한다. [19] 규칙은 3분 5라운드로 KO와 항복만 인정되었으며, 선수가 장외로 나가면 반대 진영의 세컨드들이 두들겨 패서 다시 링 안으로 집어넣는 일종의 럼버잭 매치였다. [20] 사이토 왈, "관장(아오야기 마사시)이 얼굴에 킥을 막 꽃아 넣는 것을 엄청난 표정으로 전부 다 받아내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고 카라테도 대단하지만 프로레슬링도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21] 직장 상사가 '그만두고 어떻게 하려고?'라고 물었을 때 프로레슬링을 하겠다고 하니까 엄청 놀랐다고 한다. 근데 퇴직하자마자 프로레슬러가 되려고 일 그만뒀다고 하면 아오야기가 환영해줄거라 생각해 아오야기에게 전화했더니 "멍청아! 왜 (직장을) 그만두는건데;;?"라고 했다고...다행히도 가족들은 이해해줬다고 한다. [22] 시합 당일날 갔더니 고 류마가 덜렁 '이 녀석이랑 싸워라'라고 했다고. 3라운드 형식이였고, 그동안 그냥 때리고 차고의 반복이였다고 한다. [23] 나고야시가 본거지인 일본의 커피 체인점. [24] 사망 소식을 들은 사이토 아키토시는 직후에 한숨도 못자고 은퇴, 심지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것까지 생각했지만, 6월 14일의 시합 후, 사이토 아키토시는 미사와 미츠하루의 영정사진을 향해 무릎을 꿇고 '어떤 무거운 십자가라도 짊어진다. 링에 계속 오르는 것이 사장에게의 보답'이라며 선수 생활을 계속할 것을 결의했다. 사고 후에는 많은 팬들이 이 일은 불행한 사고일 뿐이며 사이토는 잘못이 없다고 동정을 표하는 반면 여전히 인터넷에서 일부 팬들로부터 비난을 당했지만, 사이토 아키토시는 자신에게 말하는 것으로 기분이 풀리면 다 받겠다며 도망치지 않겠다고 말했다. [25] '[ruby(見得, ruby=みえ)]を[ruby(切, ruby=き)]る'라는 표현은 가부키에서 나온 용어로, 배우가 자신을 과시하듯 과장된 몸짓을 하는 것에서 유래됐다. [26] 이것 때문에 고교 수영계를 씹어먹고 있었던 사이토지만 고문 선생님한테 부활동 그만두라고 몇 번이나 들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