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賓貢科과거 제도의 일종으로 외국인 전형 시험이었다.
과거 제도의 소과는 수도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상공(上貢), 지방민을 위한 향공(鄕貢), 그리고 외국인 대상의 빈공(賓貢)으로 나뉘고, 이 3가지를 합쳐 삼공(三貢)이라고 부른다. 바칠 '공'자를 쓰는 이유는, 고대 중국에서 지방의 제후가 지역 인재를 중앙의 천자에게 천거하는 행위를 '인재를 바친다'라고 해서 '공사貢士'라고 했고, 이것이 지역에서 소과 합격자를 뽑아 중앙에서 치르는 대과 응시자격을 주는 것과 같은 것으로 치환되었기 때문이다.
2. 한국의 빈공과
고려 광종대에 중국의 과거제도를 본떠 시행하면서 빈공과도 시행되었다. 특이점으로 탐라국( 제주도)은 외국으로 쳐서 탐라 학생은 고려 빈공과에 응시하도록 했다. 구체적인 사례로 탐라국이 고려에 복속할때 고려조정에 입조한 태자 말로의 아들 고유가 고려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을 받았는게 고유가 바로 빈공 자격이었던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고려가 탐라지역을 외국으로 바라본것은 아니고 사실상 외왕내제의 일환이었을것으로 보인다.[1] 그러나 이후 1105년에 탐라국이 탐라군으로 개편되어 외국으로서의 대우는 없어진다.[2]3. 중국의 빈공과
당나라의 빈공과가 잘 알려져 있다. 당시 통일신라와 발해에는 과거제도가 없었다. 신라의 경우 원성왕대에 독서삼품과라는 시험이 시행되었지만 본격적인 과거 제도는 아니었고 출세의 한계가 명확했기에 당나라 유학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6두품 이하의 신라인은 골품제에 막혀 일정 이상의 출세가 불가능했으며 국제교류도 동아시아에서 유례없이 활발했던 시대였기 때문에 굉장히 많은 유학생이 황해를 건넜고, 일종의 코리아타운인 신라방의 주요 계층 중 하나가 유학생과 거기 딸려온 인력이었다. 빈공과에 급제해도 관직은 주어지지 않았다. 당나라 사람도 과거를 거치고 또 여러 면접을 거쳐야 비로소 관직을 받을까 말까였는데 외국인에게 줄 관직따위는 당연히 없었다. 대신 운이 좋다면 작위정도는 받을 수 있었고 빈공에 급제했다는 사실을 스펙으로 절도사나 지방관의 비서로 임용되거나 고향으로 돌아와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한편 발해인이 당나라 빈공과에 응시한 사실은 동북공정의 반박자료로서의 가치도 있다. 발해인이 '외국인' 자격으로 시험을 보았다는 사실이 당나라와 다른 뿌리라는 근거이기 때문.
다만, 이 논리는 고려시대 탐라국 출신을 외국인으로 간주한것과 비슷한 논리로 반박을 당하기도 한다.
합격자의 약 80%가 신라인으로, 신라 출신 급제자가 가장 많았다. 그 뒤를 발해, 페르시아 등이 따랐다. 고려시대 인물인 최해가 쓴 글에 따르면 당나라 때 58명, 오대십국 때 32명이 빈공과에 급제했는데 이 중 대부분은 신라인이고 발해인은 10여 명이 전부였다고 한다.
이 당시 발해 출신 유학생과 신라 출신 유학생간의 알력이 상당했다. 최치원은 신라 출신의 이동(李同)이 발해 출신의 오소도(烏炤度)에게 수석을 뺏기자 국제망신이자 나라가 망할 징조라며 힐난했다. 그리고 발해에서 수석을 차지하자 신라에서 한 때 맞선 국가에게 수석을 내주는 게 옳냐고 당나라에 따지기도 했다.
위 경쟁에는 후일담도 있다. 906년, 오소도의 아들 오광찬(烏光贊)이 당나라의 빈공과에 합격하였으나, 석차가 신라의 최언위(崔彦撝)보다 밑이었다. 마침 오소도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이 사실을 알고 전에 자신이 이동보다 위였음을 상기시키면서 아들 오광찬이 최언위보다 위 석차에 놓이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당나라 조정은 최언위의 재주와 학식이 오광찬보다 빼어남을 들어 받아들이지 않았다.
앞에서 언급된 최언위와 함께 ' 신라삼최'로 이름을 날렸던 최치원, 최승우 또한 당나라에서 시행한 빈공과 급제자 출신이다.
물론 모든 신라 유학생들이 전부 빈공과에 합격하는 건 아니었다. 합격하면 당나라에서 관리를 하면서 학문을 더 쌓고 당나라 각지를 돌아다니며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었지만, 당연히 시험에 합격하는 인원은 소수일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은 공부만 하다가 합격은 못하고 수업연한 10년이 지난 뒤 신라로 돌아와야만 했다. 문성왕 때는 10년 동안 합격하지 못한 학생 105명을 한꺼번에 강제 귀국시키기도 했다.
다만 빈공과 합격자 출신은 말할 것도 없고 합격하지 못한 사람들도 당에서 유학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대를 받았다. 원성왕 때 자옥(子玉)이라는 사람은 당나라에서 공부하고 왔다는 경력을 가지고 양근현(楊根縣, 지금의 양평군)의 관리가 되었다.
송나라, 원나라대에도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시험은 '제과(制科)'로 이름은 바뀌었지만 계속 존재했다. 이 때는 신라나 발해와 달리, 고려 광종 이후로 과거시험이 시행되기 시작했지만, 큰 나라에서 입신양명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했고, 결과적으로 제과도 주로 고려 사람들이 많이 응시했다. 대표적인 급제자로 이색, 이인복 등이 있다. 특히 이색은 1, 2, 3차 시험에 각각 1, 1, 2등을 차지할 정도였다.
원나라 시대의 반동으로 고립주의적인 성향이 강해진 명나라 시대부터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시험은 중단되어 조선 시대부터는 과거를 보기 위해 공부하는 학생들의 목표가 중국 유학보다는 국내 과거시험 위주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