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29 22:33:21

브랜디와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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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대륙군3.2. 영국군
4. 전투 경과5. 결과

1. 개요

미국 독립 전쟁 시기인 1777년 9월 11일 델라웨어 카운트 채즈포드의 브랜디와인 강 유역에서 대륙군과 영국군이 맞붙은 전투. 조지 워싱턴은 이 전투에서 패한 뒤 미국 독립파의 중심지인 필라델피아를 영국군에게 내준다.

2. 배경

1777년 초, 뉴욕 주둔 영국군 사령관 윌리엄 하우 소장은 대륙군의 본거지인 필라델피아를 점령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그는 필라델피아로 가기 위해 펜실베이니아 주로 진입하려 했지만, 조지 워싱턴의 대륙군이 델라웨어 강을 방어선으로 삼고 버티고 있어서 쉽게 뚫을 수 없었다. 윌리엄 하우는 적을 끌여들이기 위해 일부러 군대를 후퇴시키기도 했고 별동대를 파견해 적 분견대를 기습해 소소한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워싱턴은 끝까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에 하우는 델라웨어 강을 돌파하는 건 무리라고 판단하고 함대에 군대를 싣고 바다를 거슬러 내려가 기습 상륙하기로 결심했다.

1777년 7월 23일, 뉴저지에서 수개월간의 준비를 갖춘 윌리엄 하우 소장과 그의 형인 리처드 하우 제독은 대륙군의 수도 필라델피아를 점령하기 위해 뉴욕에 주둔한 군대 대부분을 남쪽으로 수송하는 함대를 출범시켰다. 뉴욕의 군대는 함선에 몸을 싣고 남하하여 체사피크 만 상단에 상륙한 뒤 필라델피아를 향해 북쪽으로 진군할 예정이었다. 조지 워싱턴은 며칠 후 적 함대가 출항했다는 소식을 접했지만 그들이 어디로 가는 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적이 존 버고인 소장 휘하 캐나다 방면 영국군을 지원하기 위해 허드슨 강으로 갈 수도 있다고 봤고, 델라웨어 강을 돌파하기 위해 델라웨어 강 입구로 향할 수도 있다고 여겼다. 이후 영국 함대가 델라웨어 강으로 향하지 않고 남쪽으로 향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워싱턴은 여전히 윌리엄 하우의 목표가 필라델피아인지, 더 남쪽에 위치한 사우스캐롤리나의 찰스턴 인지를 확신하지 못하고 그저 적의 행보를 지켜보기만 했다.

8월 21일, 워싱턴은 영국 함대가 체서피크 만 하구에서 일주일 전에 목격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제야 필라델피아가 위험하다는 걸 깨달은 워싱턴은 즉시 전군을 남쪽으로 전속력으로 이동시켜 영국군을 저지하려 했다. 그러다가 그는 9월 초 브랜디와인 강 인근에 위치한 채즈포드에 전열을 갖춘 후 브랜디와인 강을 방어선으로 삼고 적이 도하하는 걸 막기로 했다. 이리하여 미국 독립 세력의 수도 필라델피아를 둘러싼 대륙군과 영국군의 대결이 임박했다.

3. 양측의 전력

3.1. 대륙군

3.2. 영국군

  • 지휘관: 윌리엄 하우 소장
  • 병력: 6,000명

4. 전투 경과

1777년 9월 9일, 워싱턴의 군대는 채드포드에서 브랜디와인 강의 동쪽 둑을 따라 주둔했다. 브랜디와인 강은 시공과 나무가 우거진 언덕 사이로 흘러갔고, 군데군데에 둑을 따라 가파른 절벽이 있었다. 강은 채드포드 아래를 지나면서 더욱 좁아지면서 더욱 빨라졌기 때문에 걸어서 건너는 게 불가능했다. 하지만 영국군이 필라델피아로 가려면 채드포드에서 브랜디와인 강을 반드시 건너야 했기에, 워싱턴은 하우가 서쪽에서 채드포드를 향해 정면 공격을 감행할 것으로 예상했다. 워싱턴은 적의 공세에 대비하기 위해 중앙에 네더니얼 그린 소장 휘하 웨인, 뮬렌버그 여단을 배치했고, 스태튼 아일랜드 전투를 치른 후 본대에 막 합류한 존 설리번 소장의 지휘하의 우익을 우스타르, 버핑턴 요새에 배치했으며, 브랜디와인 강 서부 일대에 경보병대와 전초부대를 배치해 영국군의 진격을 탐지하게 했다.

9월 11일 아침, 하우 소장의 영국군이 채드포드 서쪽에 있는 케넷 미팅 하우스에 도착했다. 그는 이곳에서 병력을 분리했다. 헤센 출신의 크니파우센 준장은 주력군을 이끌고 채드포드 쪽으로 진격했다. 크니파우센 준장은 9월 11일 정오경에 브랜디와인 강에 도착한 뒤 서쪽 둑의 언덕을 따라 자리를 잡고 포병대를 동원해 대륙군 진영을 포격하기 시작했다. 한편, 하우 소장과 찰스 콘월리스 소장 휘하의 제2 영국 보병 연대는 케넷 미팅 하우스에서 북쪽으로 진군하여 채드포드에서 몇 마일 떨어진 브랜디와인 강 상류를 급비리에 도하했다. 이후 하우와 콘월리스는 북쪽으로 계속 진군해 대륙군이 점령하고 있지 않은 교두보에 이르렀다. 그들은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스콘넬타운을 거쳐 버밍엄 미팅 하우스에 도착해 워싱턴이 이끄는 대륙군의 우익 후방을 위협했다. 이윽고 자리를 잡은 하우와 콘월리스는 워식면의 우익 측면을 통과해 필라델피아와 대륙군간의 진로를 차단하려 했다.

이때 워싱턴은 존 설리번 소장의 부관 모제스 하젠 대령으로부터 영국군이 전장을 멀리 우회해 아군의 후방을 노릴 수도 있다고 경고받았지만, 워싱턴은 이를 무시했다. 그는 적이 채드포드를 정면 공격하리라고 확신했다. 그러다가 이른 오후 무렵 적이 아군의 우측면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첩보를 접하자, 그는 마침내 영국군의 주요 공세가 대륙군의 우익 후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즉시 병사들에게 전선을 다시 짜라는 지시를 내렸고, 설리번 소장은 우익 부대를 이끌고 북동쪽으로 진군하여 버밍엄 미팅 하우스 언덕에 군대를 편성했다. 얼마 후, 하우의 영국 보병 연대는 세 개의 분견대를 형성한 후 대륙군을 향해 진군했다. 워싱턴은 설리번을 돕기 위해 네더니얼 그린 소장에게 예비군을 이끌고 버밍엄 미팅 하우스로 달려가게 했다. 그러나 그린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설리번의 군대가 영국군의 공세에 밀려 언덕에서 쫓겨난 뒤였고, 둘은 급히 군대를 수습해 안전한 곳으로 후퇴했다.

한편, 채드포드에서는 크니파우센 준장이 제 4, 5 보병 연대를 이끌고 브랜디와인 강을 건너 공격을 개시했다. 여기에 하우 부대의 영국군 보병 부대와 척탄병 부대가 숲을 헤치고 나아가 워싱턴의 대륙군 우측면을 공격했다. 이에 전의를 상실한 대륙군은 진영을 벗어나 안전한 곳으로 퇴각했다. 워싱턴은 혼란에 휩싸인 부대를 가까스로 수습한 뒤 필라델피아로 퇴각했고, 영국군은 어둠이 깔리자 적을 더이상 추격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브랜디와인 전투는 영국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5. 결과

대륙군은 브랜디와인 전투에서 약 1,000명의 사상자 및 포로를 기록했고 대포 11문을 상실했다. 반면 영국군은 55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이렇게 해서 영국군의 공세를 저지하는데 실패한 워싱턴은 필라델피아를 포기하기로 결심했고, 대륙의회는 필라델피아를 떠나 랭커스터로 이동했다가 나중에는 요크로 옮겨졌다. 이후 하우의 영국군은 워싱턴의 게릴라 작전으로 인해 여러 차례 진군에 방해를 받았지만, 결국 9월 25일 필라델피아에 입성했다.

한편 브랜디와인 전투는 19세의 나이에 미국으로 건너간 라파예트가 조지 워싱턴의 참모로서 참가한 첫번째 전투였다. 그는 이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지만 개의치 않고 계속 독립 세력을 위해 싸웠으며, 나중에는 독립 세력에 대한 프랑스의 지원의 상징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