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1-28 14:25:19

부여준

성씨 부여(扶餘)
이름 준(準)
국적 당나라
관직 삭방기장(朔方騎將)
예왕부사마(澧王府司馬)[1]
생년 미상
몰년 미상

1. 개요2. 생애3. 기타4. 출처


1. 개요

[원화] 12년(817) 젠뽀가 죽었다.[2] 사신 논걸염(論乞髯)이 와서 (알리니), 우위장군(右衛將軍) 오중기(烏重玘)와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단균(段鈞)을 보내 조문했다. 가려가족(可黎可足)이 젠뽀에 등극했다. 오중기(重玘)가 부여준(扶餘準), 이참(李驂)과 함께 돌아왔다. 부여준(準)은 동명(東明)[3] 사람으로, 본래 삭방기장(朔方騎將)이었고, 이참(驂)은 농서(隴西) 사람으로 정원(貞元) 초에 전쟁에서 전사하였다. (그러나) 사신이 그가 죽지 않은 것을 알고 구해 돌아올 수 있었다. 조를 내려 부여준은 예왕부사마(澧王府司馬)로, 이참은 가왕우(嘉王友)로 삼았다.
- 신당서 권 196 상 토번전

당나라의 인물. 부여씨인 점을 볼 때 백제 왕족의 후손으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백제 유민 출신의 장수인 흑치상지처럼 대토번 전선에서 복무했다.

2. 생애

787년 당나라 토번(티베트)은 평량에서 회맹을 가지게 되었는데, 토번이 회맹을 깨트리고 당군을 공격했다. 이 때 당군은 대패하고 60여명의 인사들이 포로로 잡히게 되었다. 부여준 역시 이 때 토번의 포로로 잡혀 선주(鄯州)[4]에 구금당하게 되었다. 당시 부여준의 관직은 대장, 열장(列將)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817년 귀환 당시의 기록으로 보아 삭방 지역의 기병대장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로부터 30년 뒤, 817년 토번으로 보내진 우위장군 오중기, 단균이 돌아올 때 부여준은 이참과 함께 당으로 귀환하게 된다. 당나라는 부여준을 예왕부사마(澧王府司馬)로 임명했다. 예왕부사마로 임명한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5]

3. 기타

18세기 청나라 시기 편찬된 《고금도서집성》에도 등장한다. 정확히는 무왕, 의자왕과 함께 부여씨 인물로 당나라의 무장으로 소개하고 있다. 헌데 부여씨의 연원을 서술할 때, 오나라 부개왕(夫概王)이 초나라로 도망친 뒤, 그의 아들이 초나라에서 부여를 씨로 삼았다는 명대에 저술된 《풍속통》의 기록을 대고 있다.[6]

부여태비, 사타충의, 흑치준, 물부순, 예소사, 예인수, 난원경 등과 함께 8세기에 당나라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 몇 안되는 백제계 유민이다. 위의 인물들의 생존시기가 8세기 전반에 끝나는 점을 고려하면, 가장 마지막으로 기록에 등장한 백제계 당나라인이기도 하다.

부여준과는 상관없지만 2010년 방영된 드라마 근초고왕에서 계왕이 '부여준'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4. 출처

동북아역사재단 중국정사조선전


[1] 당나라 예왕부의 사마(司馬). [2] 기록 오류인데, 당시 젠뽀 치데송젠은 815년에 사망했다. [3] 660년 당이 백제를 멸망시킨 뒤 세운 5개의 도독부 이름 중 하나이다. [4]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칭하이성 시닝시 일대로 비정된다. [5] 다만 30년 간 구금 상태 후 풀려난 점을 보면 이미 당으로 귀환했을 때 노령의 나이었기에 귀환 후 머지않아 사망했을 가능성도 높은 편이다. [6] 조선의 실학자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선산고》에서 《풍속통》에 등장한 기록으로 소개하고 있다. 다만 《오주연문장선산고》에는 부개왕 일화는 소개하고 있지만, 부여준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